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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가 시집살이 너무 쉬운데요 (129)화 (129/177)
  • #129.

    그때를 기점으로 나와 아키드 사이에 있던 희미한 선이 완전히 끊어졌다.

    첫 키스의 달콤함은 아침까지 이어졌다.

    떨어졌다 도로 붙기를 반복하던 그는 동이 완전히 트고 나서야 방으로 돌아갔다.

    첫 키스의 황홀함에 취한 상태에서도 정신만은 또렷했다. 어쩜 입만 맞추었는데도 이렇게 심장이 떨어질 것 같은지.

    나는 아직도 아키드와 입을 맞춘 게 믿기지 않아 멍하니 입술을 매만졌다.

    불어 터진 입술은 꼭 앵두같이 탱글탱글했다. 한껏 민감해져 만질 때마다 알싸한 통증이 있을 정도였다.

    때마침 세숫물을 가지고 온 비비안이 깨어나 있는 나를 보며 눈을 둥그렇게 떴다.

    “어머, 일어나셨네요?”

    “안녕, 비비안.”

    “몸은 좀 어떠세요?”

    “더할 나위 없이 좋아.”

    아카드와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첫 키스로 충전을 받았는데 좋지 않을 리 없었다. 컨디션은 그야말로 최고였다.

    나는 내가 좋다고 고백하던 새벽녘의 아키드를 떠올리며 괜스레 입술을 앙다물었다.

    그 모습을 수상하게 보던 비비안이 곁에 다가와 말했다.

    “표정이 어쩐지 음흉한데요. 며칠 앓으셔 놓고선 너무 쌩쌩하시네.”

    “내가 얼마 동안 누워 있던 거야?”

    “한 이틀 정도요. 그래도 그만하길 천만다행이지 뭐예요. 작은 마님 사라진 거 보고 제가 얼마나 놀랐는데요.”

    “생각보다 짧은 성장통이었네.”

    아키드 때에 비하면 비교적 짧은 각성기였다. 스스로 느끼기에 현재 몸 상태는 최고였다.

    평소에 일하느라 누적된 피로감도 싹 가신 걸 보면 잠을 푹 자서인 것 같기도 했다.

    내가 막 세수를 하려고 세숫대야로 손을 뻗은 때였다.

    ‘어라.’

    나는 뒤늦게 매끈해진 손목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분명 납치됐을 때 무리해서 손목을 움직이다 피멍이 잔뜩 들었었다.

    하루, 이틀 만에 사라지긴 글렀다고 생각했던 게 통증도 없이 말끔해서 신기했다.

    내가 물에 손을 담근 채 물었다.

    “비비안, 혹시 손목도 따로 치료한 거야?”

    “네? 손목이라뇨? 다치셨었어요?”

    “피멍이 들었었거든. 피도 꽤 났던 거로 기억하는데.”

    “이상하다. 그 정도 상처라면 못 봤을 리가 없는데……, 벌써 나았을 리도 없고요. 아, 혹시 너무 놀라서 착각하신 거 아니에요?”

    그럴 리가.

    얼마나 필사적으로 움직였었는데 착각했을 리 없었다.

    나는 거듭 말씨름을 하기도 뭐 해서 우선 세수를 했다. 타월로 얼굴을 닦아 내자 비비안이 말했다.

    “아, 맞다. 옷을 갈아입히면서 속옷에 숨겨 두신 주머니는 테이블 위에 올려 두었어요.”

    “고마워.”

    “그러고 보면 작은 마님은 조심성이 많으신 거 같아요. 속옷에 그런 걸 넣고 다니는 사람은 처음 봐요.”

    그야 내가 죽는 미래를 알고 있으니 뭐든 조심하게 될 수밖에 없었다.

    내가 괜스레 웃기만 하자 비비안이 갈아입을 옷을 가져오겠다며 사라졌다.

    또다시 혼자가 되자 잔뜩 심각해진 내가 손목을 만지작거렸다.

    “이상한데.”

    아무리 키스가 좋았다 해도 손목의 상처까지 낫는 건 말이 안 되었다.

    게다가 입을 맞출 때 손목이 아프지 않았던 걸 보면 진즉 나았던 게 분명했다.

    아무리 아키드에게 정신이 팔려 있었대도 통증을 몰랐을 리 없다.

    ‘알고 보니 괴물 같은 회복력이라도 가지고 있던 걸까?’

    그렇다기엔 지난번에 입술이 부르튼 상처는 꽤 오래가서 그리 신빙성은 없었다.

    “뭐, 좋으면 좋은 거지.”

    아픈 것보다야 빨리 회복한 게 백배 나았다. 나는 테이블에 올려진 주머니를 속옷 안에 도로 넣었다.

    그래도 이게 있어서 조금 덜 무서웠다. 비록 혼자 있을 기회가 없어 사용하진 못했으나 마음만큼은 든든했으니까.

    어쨌거나 각성기를 무사히 마친 것도 마음이 편했다.

    나는 몸속에 자연히 개방된 마나코어를 감각으로 느꼈다.

    쌍둥이들만큼 강하지는 않다고 해도 내 몸 하나 건사할 수는 있는 힘.

    게다가 내게는 대지 속성의 신수와 정령이 함께했다. 지금이라면 충분히 흑마법사와 대치할 수 있을 터.

    ‘어차피 정령사라는 것도 발각된 이상 이쪽에 유리하도록 판을 다시 짜야겠지.’

    이미 아키드에게 내가 납치된 이후의 상황을 전해 들은 터라 생각이 많아졌다.

    “슬슬 수금하러 가야 할 때인 건가.”

    나는 인트라비아 13지구에 터를 두고 있는 쉐리를 떠올리며 머리를 굴렸다.

    오랜 시간 그녀를 후원한 덕에 이제는 제법 그럴듯한 길드를 운영하고 있었다.

    차용증과 계약서까지 쓴 터라 거의 내 산하의 길드라고 봐도 무방한 조직이었다.

    물론 그곳의 수장인 쉐리가 몹시 다루기 어려운 것만 빼고.

    그들이라면 나탈리 후작이 숨은 카타콤의 위치를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었다.

    게다가 쉐리를 움직일 만한 적당한 분노 대상도 마침 생각이 난 참이었다.

    ‘그 시절을 생각나게 하는 것들과는 가급적 멀리하고 싶었거든요.’

    나는 13지구와는 인연을 끊고 싶다고 했던 제이드를 떠올리며 히죽 웃었다.

    그 마음 변치 말고 쭉 조용히 있었다면 나도 가만히 있었겠지만, 자고로 건들면 무는 게 나였다.

    나는 괜스레 몸을 푸는 척하며 서늘히 중얼거렸다.

    “딱 기다리세요, 제이드 씨. 내가 아주 과거랑 지독하게 엮이게 해 줄게요.”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선방을 맞았으면 정당방위인 척 세게 받아쳐 주는 게 나의 방식이었다.

    어차피 아키드와 예정보다 일찍 수도로 향하기로 한 터라 쉐리네를 방문하기도 수월할 터.

    나는 곧장 테이블로 가 서신 두 개를 썼다. 그중 하나는 키나의 다리에 묶었다.

    “쉐리한테 다녀와.”

    깍?

    쉐리라는 말에 키나가 질색하며 깍깍거렸다. 쉐리의 길드가 몹시 거칠고 소란스러워 가기 싫은 눈치였다.

    쉐리가 어지간히도 못살게 구나 보다. 키나는 그곳만 다녀오면 녹초가 된 채 하루 내리 잠만 자곤 했다.

    나는 키나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으며 거부할 수 없는 달콤한 미끼를 던졌다.

    “다녀오면 슈리 몰래 청포도 한 송이 더 챙겨 줄게.”

    깍깍.

    매번 슈리 때문에 청포도를 양껏 먹지 못했던 키나의 눈이 반짝거렸다.

    결국 청포도의 유혹을 이기지 못한 키나가 발을 흔들어 서신이 잘 고정되었나 확인했다.

    뒤이어 날개를 펄럭이며 사라지는 키나에게 조용히 손을 흔들었다.

    이제 각성기도, 내가 전염병으로 죽을 위기도 무사히 넘겼으니 적을 제대로 잡을 차례였다.

    더 이상 몸을 사릴 필요도 없는 지금이 바로 준비해 둔 것을 시행할 때였다.

    나는 마침 들어오는 비비안에게 남은 서신 하나를 건넸다.

    “헨리한테 전해 줘.”

    그동안 마냥 각성기가 오기를 기다리기만 한 건 아니었다.

    나는 서신을 통해 헨리에게 그것을 해도 좋다고 전하고 얼마 후 수도로 향했다.

    * * *

    한편 무사히 카타콤으로 숨어들어 소식을 기다리던 나탈리 후작은 납치에 실패했다는 전갈을 받고 분노했다.

    더군다나 실패의 원흉이 신수였다는 말에 기가 막힐 지경이었다.

    하필 대지 속성이라 그들이 로에나의 위치를 빠르게 파악할 수 있던 게 실패의 요인이었다.

    로에나가 정령사라는 걸 알자마자 혹시 몰라 인형을 세워 몰래 하델루스령을 빠져나오기는 했지만 실패하리라곤 생각지 않았던 일이었다.

    그것도 이렇듯 엉망으로 실패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하!”

    로즈 나탈리가 헛웃음을 내뱉곤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핏발 선 눈으로 좌우를 왔다 갔다 했다.

    ‘설마 신수와 계약했을 줄이야.’

    정령에 이어 신수까지 등장하다니.

    이미 사라진 것들이라 여겼던 존재들의 등장은 나탈리 후작을 설레게 하면서 동시에 불안하게 했다.

    제 손에 먼저 들어왔어야 했을 것들이 왜 전부 하델루스에 몰려간 건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것도 정령사와 계약한 신수라니. 굉장히 위협적인 존재가 아닐 수 없었다.

    신수라는 변수가 없었다면 계획대로 로에나를 포획할 수 있던 차라 아쉬움이 컸다.

    포획했다면 지금쯤 고대의 광영을 되찾기 위한 위대한 사업을 시작할 수도 있었을 텐데.

    후작은 아쉬운 마음에 자꾸만 한숨을 내쉬었다.

    동시에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 제이드에게 화가 머리끝까지 난 상태였다.

    지금이라면 각성도 마쳤을 테니 더는 로에나를 구속할 구실이 없었다.

    완전해진 정령사를 상대하는 것만큼 버거운 일은 또 없는 탓이었다.

    결국 화를 참지 못한 후작이 손을 들어 제이드의 뺨을 내리쳤다.

    짜악―!

    날카로운 소음과 함께 제이드의 고개가 한쪽으로 꺾이었다. 첨예한 호갑투에 찢긴 뺨에선 피가 뚝뚝 흘렀다.

    하지만 후작은 그런 상처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대체 일을 어떻게 하는 거지? 이따위로 허술하게 조사할래?”

    “죄송합니다.”

    “이 일은 어떻게 할 텐가. 빼앗기도 전에 이쪽 정체만 탄로 나 버리지 않았나?”

    “속단하긴 이릅니다. 아직 저들이 제물의 존재는 알지 못합니다. 메이벨을 통해서…….”

    “퍽이나 그 아이가 우리를 돕겠구나. 아직도 모르겠니? 그 애는 우릴 도울 생각이 없어.”

    나탈리 후작이 비아냥거리자 제이드가 한쪽 무릎을 꿇고 말했다.

    “성녀로서 위치가 공고해진 지금, 메이벨도 저희를 외면하긴 어려울 겁니다. 애초에 성녀라는 모양새를 만들어 준 것도 우리의 조력 덕이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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