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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가 시집살이 너무 쉬운데요 (128)화 (128/177)
  • #128.

    미처 닦지 못한 물기가 아키드의 손에 번졌다.

    그제야 꿈에서 울다 깨어났음을 상기한 나는 소매로 얼굴을 훔쳤다.

    “아, 이건…….”

    그리고 내가 미처 변명하기도 전에 그가 내 입술을 지그시 눌렀다.

    그 서슴없는 행동에 나는 불가항력에 이끌리듯 멍하니 그를 올려다보았다.

    “아키드?”

    평소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입술을 쓰는 손길이 이상야릇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지난번과도 얼핏 비슷한 상황인데도 이상하게 말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내가 입술을 달싹이기만 하자 그가 말했다.

    “상처가 아물었네요. 전에 분명 피가 났었는데.”

    “제가 회복력이 빠른가 봐요.”

    어색하게 반응하자 그가 손을 물리며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 할 말은 많으나 애써 삼키는 듯했다.

    침묵 끝에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왜 여기서 있었어요. 자러 가지 않고.”

    “앓는 소리가 들려서 걱정돼 와 봤습니다.”

    “괜히 잠을 깨웠네요. 저 이제 괜찮아요.”

    아무래도 내가 꿈을 꾸면서 내내 끙끙거렸던 모양이다.

    맞은편 침실에서 자던 그가 들을 정도로 그렇게 크게 앓았나.

    그러다 문득, 그의 각성기 때 방문 앞에서 밤을 새운 일이 떠올라 되물었다.

    “설마 문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건 아니죠?”

    떠보는 말에 아키드는 옅은 미소만 머금은 채 부정하지 않았다.

    뒤이어 그가 내게로 바짝 다가오자 나는 심장이 쿵, 내려앉는 기분을 느꼈다.

    그가 내 손을 잡아 입가에 가져다 대며 말했다.

    “로에나도 이런 기분이었겠군요.”

    그건 내가 그의 각성기 때 내내 문 앞에 서성이던 걸 두고 한 말 같았다.

    아키드도 나처럼 내내 걱정했다고 하니 고맙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했다.

    “잠은 좀 잤어요?”

    내 질문에 그가 고개를 얕게 끄덕이며 말했다.

    “예. 그것보다 아픈 곳은 없습니까?”

    “딱히요.”

    손바닥에 닿는 감촉이 간지럽고 뜨거웠다.

    그가 말을 할 때마다 스치는 숨결도, 촉감도 모두 다 커다란 자극이 되어 돌아오는 듯했다.

    나는 긴장되는 분위기를 모면하려 입을 열었다.

    “제가 얼마나 누워 있었죠? 혹시 배후는…….”

    “배후가 나탈리 후작이었다는 건 이미 알고 있습니다.”

    “잡았나요?”

    “진즉에 인형을 두고 도망쳤더군요.”

    역시 그럴 줄 알았다. 나탈리 후작이 인형술사라는 걸 알게 된 순간부터 하델루스령에 머무는 그녀가 본체가 아닐지도 모른다고 판단했으니까.

    그만큼 정교한 인형이었다. 나조차도 깜박 속을 만큼.

    그나마 다행인 건 인형은 문신을 숨기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숨길 수 있었다면 진즉 숨겼을 텐데 대놓고 목덜미에 내놓고 다닌 것을 보면 확실했다.

    이 일을 교훈 삼아 다음에는 문신부터 확인하면 된다.

    저쪽도 정체가 탄로 났다는 점에서 우리보다 손해가 크면 컸지 적지는 않았다.

    도망자 신세가 되었으니 나탈리 후작도 섣불리 움직이려 들지 못할 터였다.

    그때 그가 내 손을 끌어 거리를 좁혔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반드시 붙잡을 테니까.”

    그렇게 말하는 아키드의 음성이 미세하게 떨렸다.

    아까 본 꿈에서 다짐하던 아키드와도 문득 닮아 있는 모습이었다.

    나는 그 찰나의 떨림을 통해 그가 화가 났음을 알았다.

    정확히는 그 자신에게.

    나는 가까워진 거리 그대로 그를 안심시켰다.

    “스스로에게 화내지 말아요.”

    “화 안 났습니다.”

    “거짓말. 저는 아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아키를 잘 알아요.”

    “…….”

    “눈은 마음의 거울이라잖아요. 아키 눈이 딱 화난 눈이에요.”

    그의 눈가를 쓸어 만지며 자신만만하게 내뱉자 그가 못 이기겠다는 듯이 한숨과도 같은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

    그 미소를 보니 안심이 되었다. 아키드에게서 풍기는 낯선 기운이 조금이나마 가신 것 같았다.

    잠시 후, 그가 아까보다 한결 풀린 음성으로 말했다.

    “로네에겐 못 당하겠습니다.”

    그가 내 귓불을 가볍게 쓰다듬었다. 그 야릇한 행위에 볼을 붉히며 말했다.

    “제가 하고 싶은 말을 하시네요.”

    나야말로 아키드를 당해 내 본 적이 없었다. 언제고 나를 강하게도, 약하게도 만드는 게 아키드였으니까.

    그를 만나고, 또 그의 곁에 있으면서 차츰 알게 된 사실이었다.

    그는 나조차도 모르던 잠재력을 끌어올리도록 하는 존재였다.

    내가 슬며시 눈을 내리깔자 아키드가 느릿하게 거리를 벌리며 말했다.

    “이만 자는 게 좋겠어요.”

    “가려고요?”

    아쉬운 마음에 나도 모르게 그를 붙들었다가 아차 싶어 눈을 끔벅였다.

    그가 붙들린 소매를 잠시 응시하다가 피식 웃으며 물었다.

    “가지 말까요?”

    “아뇨, 그건 아니…….”

    내가 막 이성을 되찾고 그를 보내 주려던 찰나였다. 그가 상체를 숙이며 말했다.

    “가지 말라는 눈을 하고는 자꾸 가라고만 하네.”

    “네?”

    낮게 울려 퍼지는 음성은 너무도 달콤해서 취하는 기분이었다. 놀라 되묻자 아키드가 다정히 속삭였다.

    “눈은 마음의 거울이라면서요. 자꾸 거짓말할 겁니까?”

    “난 그냥…….”

    “이제 솔직해질 때도 된 거 같은데.”

    그윽한 시선이 내게로 고정되었다. 잠시 후, 그가 부드럽게 말했다.

    “눈 감아요.”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그가 그대로 내게 입을 맞추었다.

    보드라운 입술이 닿자 숨이 삼켜졌다. 깜짝 놀란 나는 침대 헤드에 바짝 몸을 기대며 어깨를 움찔했다.

    입술이 맞닿은 적은 있었지만 그래 봤자 겨우 맞대는 수준이었다.

    그에 반해 이번 입맞춤은 여태까지와는 전혀 달랐다. 질척하게 따라붙는 입술은 무척이나 집요했다.

    코앞에 아키드의 검은 속눈썹이 보였다. 깨물리듯 삼켜진 입술 틈으로 무언가가 훑듯이 지나갔다.

    시각적으로나 촉각적으로나 무척이나 자극적이었다.

    나는 눈을 질끈 감은 채 아키드의 입술을 받아들였다. 손으로 여전히 그의 소매를 꼭 붙든 채로.

    그러자 그의 행동이 더욱 적극적으로 변모했다. 호흡과 호흡이 뒤섞이고 체온이 달아오르는 듯했다.

    따라붙는 입술에 호흡이 부족할 지경이었다.

    굿나잇 뽀뽀와는 차원이 다른 어른의 입맞춤이었다.

    내내 아슬아슬하게 유지하던 선이 강한 자극에 팅―! 하고 끊어진 기분이었다.

    강하게 다가왔다가 부드럽게 훑고 지나가는 자리마다 예민한 감각이 곤두섰다.

    어느새 새벽녘의 차가운 공기가 감돌던 방 안이 이전과 달리 조금 더워졌다.

    숨이 차는데도 황홀한 기분 탓에 버겁지는 않았다.

    내심 이런 날이 올 거란 걸 알았던 것 같다.

    그가 점점 노골적으로 굿나잇 뽀뽀를 했을 때부터 이미 짐작했던 수순이었다.

    나 역시도 그가 뺨이 아니라 입술에 해 주었으면 하고 늘 생각했으니까.

    잠시 후 아키드가 나를 놓아주었다.

    어느새 목을 쭉 빼고 있던 나는 아쉬움 가득한 눈으로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러자 아키드가 내 입술을 엄지로 훔치며 속삭였다.

    “그런 눈으로 보면 더 참기 힘듭니다.”

    “참은 거였어요?”

    딱히 참은 것 같지 않던 저돌적인 행동이었기에 하는 질문이었다. 그러자 그가 싱긋 미소 지으며 말했다.

    “물론이죠. 지금도 엄청 참고 있는 건데.”

    “……안 참으면 좋겠다.”

    나도 모르게 읊조린 말에 아키드가 웃음을 터트렸다.

    잔뜩 붉어진 채로 참지 말라고 부추기는 내가 웃기기라도 한 걸까. 아키드가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감당하기 어려울 수도 있을 텐데요.”

    그럼 더 오예, 인데요.

    내가 말없이 방긋방긋 웃기만 하자 그가 깊게 숨을 내쉬듯 내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닿고 나니 모를 때보다 더 참기 힘들군요.”

    “…….”

    “로네, 이제 누가 더 위험한지 감이 옵니까?”

    짓궂은 질문에 나는 조금 수줍어져 입술을 오물거렸다.

    그동안 내가 그에게 위험하다고만 생각했지, 그가 내게 위험하리라곤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런데 정작 입을 맞추고 나니 그도 나만큼이나 참아 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이쯤 되니 그 빌어먹을 서약서가 짜증스러웠다.

    그것만 없었어도 오늘 그와 나는 뭔가 대단한 일을 했을 것 같은데, 하고 말이다.

    나는 아키드를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 거사는 못 치르더라도 확인받고 싶은 게 있어서였다.

    “아키, 내가 좋아요?”

    내내 묻고 싶던 말이었다. 그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그가 나를 가족으로 여긴다는 건 진즉부터 알고 있었다.

    다만 내가 원하는 건 이성으로서 내가 매력이 있는지였다.

    내 뜬금없는 질문에 아키드가 눈을 깜박였다.

    잠시 후, 그가 내 양 뺨을 감싸 쥐며 대답했다. 조금 불퉁한 얼굴로.

    “좋아하지도 않는 여자한테 입을 맞추진 않는데요.”

    “…….”

    “제가 그렇게 형편없는 사람으로 보입니까?”

    “아, 아뇨! 그런 뜻이 아니라 그냥 궁금해서…….”

    나는 냉큼 고개를 내저어 항변했다. 한 번도 그를 그렇게 여겨 본 적이 없는데 오해하게 한 것 같아서였다.

    내 단호한 반박에 아키드가 느른히 웃으며 말했다.

    “좋아합니다. 좋아서 했어요.”

    “…….”

    “로에나는요?”

    짓궂게 되묻기까지 하니 열이 확 오르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내 대답은 하나였다.

    “나도, 좋아서 했어요. ……좋아하니까.”

    말하고도 수줍어져 시선을 내리깔자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가는가 싶더니 그가 낮은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역시 한 번으론 부족한 것 같습니다.”

    “네?”

    “가만히.”

    짧고 다정한 명령 뒤로 아키드가 도로 가까워지는 건 한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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