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공가 시집살이 너무 쉬운데요 (127)화 (127/177)

#127.

‘저 배후를 알아냈어요. 배후는 나탈…….’

아키드가 그 말을 곱씹던 때였다. 침실 로비의 문이 열리며 데미안과 엘레나가 등장했다.

“새아가는?”

엘레나가 두리번거리며 묻는 말에 아키드가 침착히 대답했다.

“오는 길에 각성이 시작됐습니다. 현재 에이프릴 소후작과 공자가 조치 중이고요.”

“어쩜 불안하다, 불안하다 싶었는데……. 그래도 다행이구나, 무사히 구해 낸 후에 시작되어서.”

엘레나가 긴장이 풀렸는지 몸을 한차례 휘청였다.

데미안이 부축하자 그녀가 찌릿, 노려보며 손길을 외면했다.

아키드의 시선이 엘레나의 손등으로 향했다. 그녀의 손에는 붕대가 미라처럼 칭칭 감겨 있었다.

흰둥이에게 할퀴어진 상처가 저렇게 크지는 않을 텐데.

아키드가 그 손등을 빤히 쳐다보자 엘레나가 손을 감추며 데미안을 노려보았다.

“날 환자 취급하는 건 네 아버지로 족하다.”

그 말인즉, 저 과한 처치가 데미안의 짓이라는 뜻이었다. 아키드는 흥미를 잃고 데미안에게 물었다.

“인형이 입을 열던가요?”

“역시 너는 그게 인형인 줄 알았나 보군.”

“그건…….”

아키드는 로에나가 비밀로 하라고 했던 걸 떠올리며 말을 얼버무렸다.

그러자 대공이 품에서 부서진 인형 하나를 내밀었다.

이를 본 아키드의 눈동자가 크게 떠졌다. 그건 나탈리 후작이 그에게 선물로 주었던 로에나의 인형이었으니까.

뒤늦게 로에나의 말을 이해한 아키드가 데미안을 쳐다보았다.

눈빛의 의미를 알아챈 데미안이 눈치껏 말했다.

“후작은 이미 도주했더군. 별장에 있던 것도 인형이었다.”

하긴 로에나를 납치하려고 했던 자들이었다. 실패할 경우도 대비해 도주 경로를 알아보지 않았을 리 없지.

아키드는 로에나를 연기했던 인형의 정체를 알게 되니 로에나가 어떻게 납치된 건지도 대강 짐작이 되었다.

나탈리 후작이 선물한 인형은 총 두 개였으니까.

제 얼굴을 한 인형으로 로에나를 속여 낸 게 분명했다.

우지끈.

돌연 아키드의 손 안에 있던 인형이 강한 압력에 우그러졌다.

아키드는 감히 제 얼굴을 이용해 로에나를 납치하려 한 것에 차디찬 분노를 느꼈다.

그때 엘레나가 말을 이었다.

“에비스 광산의 관리인에게서 연락이 왔다. 실종되었던 광부가 시체로 발견되었다고. 이미 저쪽에서 새아가의 정체를 알게 된 게 분명해.”

“제대로 한 방 먹었군요.”

아키드가 서늘한 눈으로 중얼거렸다. 그들은 일부러 각성기를 기다린 거였다.

상대가 가장 안전한 울타리를 만들도록 내버려 둔 후, 안심할 때를 노려 그 울타리 안에서부터 나가는 방법을 선택한 것.

“작정하고 자취를 감추었다면 찾아내기 힘들 거다. 흑마법사의 카타콤은 아직 소재지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으니까.”

데미안이 난감하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100여 년 전에도 흑마법사의 뿌리를 완전히 뽑아내지 못한 건 그들이 은신처에 숨어서 나오지 않은 탓이었다.

그런 곳이 있다는 것도 최근에야 밝혀졌다.

일종의 카타콤이었다. 세상의 박해를 피한 채 명예로운 일을 한다고 여기는 광증의 인간들이 모인 곳.

‘제 아들과는 먼저 인사를 나눴다고 들었습니다.’

‘그랬지요.’

‘어떻던가요?’

‘무얼 말입니까?’

‘제 아들도 수도 외곽 출신인지라 통하는 게 있을까 해서 여쭸습니다. 마음에 드신다면 친구가 되어도 좋고요.’

‘저는 출신에 연연하며 친구를 사귀지 않습니다만.’

‘아, 불쾌하셨다면 사과하지요. 저는 그저 대공자님과 제 아들이 친해지기를 바라서 공통점을 찾으려던 것뿐이니.’

‘사양하겠습니다.’

‘아쉽네요. 분명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말이죠.’

아키드는 나탈리 후작과의 대화를 떠올리며 피식 웃음 지었다.

당시엔 저와 제이드의 사이를 모른다고만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반대였다.

알고 일부러 제이드를 이곳 북부로 데려온 것이었다. 옛 친구의 등장으로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물론 아키드가 한눈팔게 된 이유는 제이드가 아니라 꿈 때문이었지만 어쨌든 불쾌한 건 똑같았다.

‘나중에 내가 필요해지면 13지구로 찾아와.’

아키드는 오래전 쉐리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녀가 제법 그럴듯한 길드를 만들었다는 것에까지 생각이 미쳤다.

쉐리라면 카타콤에 대해 알 수도 있었다. 음지의 존재는 음지를 잘 아는 사람에게 파헤쳐지는 법이니까.

로에나를 건드린 이상, 아키드는 흑마법사들을 하루빨리 없애 버리는 게 좋겠다 판단했다.

당하면 열 배로 갚아 주는 게 하델루스의 신조.

설령 제이드와 맞서게 된다 해도 아키드는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아키드는 데뷔탕트보다 먼저 수도로 향해야 할 이유를 되새기며 입을 열었다.

“로네가 깨어나면 함께 수도로 먼저 올라가겠습니다.”

* * *

나는 각성이 시작되자 꿈을 꾸었다. 누군가의 장례식이 치러지는 꿈.

델루스에서는 보기 드문 빗방울이 떨어지며 하늘도 애도하는 날이었다.

검은 옷을 입은 아키드가 비석 앞에서 비를 맞고 있었다.

그는 망부석처럼 우두커니 선 채 비석을 노려보고 있었다.

[로에나 하델루스]

비석에는 놀랍게도 내 이름이 적혀 있었다.

꿈에서 내 장례식을 보게 될 줄이야.

나는 어쩐지 두 번 죽은 것 같아서 기분이 좋지 않았다.

하지만 꿈을 나가는 법도 모르니 잠자코 있을 수밖에 없었다.

장례식은 무척 고요했다. 애도하는 이들이 돌아간 자리에는 비와 아키드와 비석뿐이었다.

아키드의 손에는 델루스 꽃이 있었다. 그가 줄기를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렸다.

‘언젠가는 이 꽃을 당신께 다시 선물할 날이 오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뒤이어 꽃을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

‘그게 설마 장례식일 줄은 몰랐죠. ……이제 만족하십니까?’

아키드의 목소리가 음울하게 들렸다.

이건 나와 아키드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원작도 아니다.

원작에선 이런 장면이 적혀 있지 않았으니까.

그럼 그냥 내가 만들어 낸 꿈인 걸까. 그런 거라면 이제 좀 깨어났으면 싶었다.

어쨌든 이 꿈은 내가 살아온 삶과는 조금 다른 내용 같았다. 굳이 따지자면 원작의 비하인드 스토리처럼 보였다.

그때 아키드가 말했다.

‘아버지는 당신이 타살되었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그리고 에이프릴가는 저를 의심하고 있죠.’

타살이라고?

나는 아키드의 말에 멍해지고 말았다. 동시에 아주 오래전 데미안의 서슬 퍼런 표정을 보고 이상한 기억에 휩싸여 그 충격에 기절했던 때가 문득 떠올랐다.

당시 주입되듯 흘러 들어온 기억에선 데미안이 지독한 열병에 시달리는 나를 보고 기사단장인 제널드에게 배후를 찾아내라 명령했었다.

그때는 원작에는 없는 로에나의 기억인가보다 했었는데, 이상하게 이 꿈과 연결되는 기분이었다.

각성을 할 때 환각 증세가 있다는 말은 들어 본 적이 없는데.

아키드가 뒤이어 입을 열었다.

‘저는 당신을 잃음으로써 더러운 핏줄임과 동시에 아내를 죽인 비정한 남자라는 오명을 남기게 되었습니다. 그 탓에 에이프릴 일가와는 완전히 틀어져 버렸죠.’

이상하다고 생각하기는 했다. 원작에서 에이프릴 쌍둥이는 아키드를 혐오하다 못해 증오하는 듯했으니까.

설마 아키드가 죽였다고 진심으로 믿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냥 말뿐인 줄로만 알았는데.

‘당신은 나를 남편으로 인정하지 못한다고 했지만…….’

아키드가 말을 하다 말고 머뭇거렸다. 잠시 후 그가 남은 말을 토해 냈다.

‘그래도 저는 당신을 아내이자 가족이라고 여겼습니다. ……지키지 못해 미안합니다. 만약 제게 한 번의 기회가 더 주어진다면 그때에는 꼭.’

비에 젖은 비석을 쓰는 손길이 애처로웠다.

뒷말은 삼켜졌지만 무엇을 말하고자 했는지는 분명히 전해졌다.

아키드는 자책하고 있었다. 과거 제이드의 실종에 대한 죄책감과 겹치기라도 한 건지 위태로워 보이는 모습이었다.

잠시 후, 아키드는 울 것 같은 얼굴로 내내 작은 소리로 로에나에게 미안하다고 했다.

그게 너무 먹먹해져서 눈물이 핑 도는 느낌이 들 무렵, 나는 꿈에서 깨어났다.

* * *

“흐윽.”

나는 울음을 삼키며 잠에서 깨어났다. 방금 꾼 꿈이 너무도 생생해서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꿈속의 아키드는 너무도 외롭고 쓸쓸해 보였다.

그리고 그를 그렇게 만든 게 다름 아닌 나, 로에나라는 사실이 뼈아팠다.

‘거지 같은 꿈이야.’

나는 너절한 기분을 떨치며 주변을 살폈다. 사위가 제법 어두웠다. 창을 보니 동트기 직전의 어두운 새벽하늘만이 보였다.

각성을 마쳤는지 더는 열이 나질 않았다. 동시에 내 안에 막혀 있던 무언가가 개방된 느낌이 들었다.

아마도 이게 말로만 듣던 개방된 마나코어인 것 같았다.

잠이 완전히 달아난 나는 등불을 찾아 손을 더듬었다.

그때 누군가 먼저 등불을 켜 방을 밝혔다.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나니 테이블 쪽에 아키드가 앉아 있었다. 그가 등불을 든 채 침대로 다가왔다.

“더 자도 됩니다.”

“아키? 거기서 뭘 하고 있었어요?”

불도 켜지 않고 내내 무얼 했던 걸까.

놀라 묻는 말에 아키드는 말없이 간이 테이블에 등불을 내려놓았다.

그러곤 침대에 비스듬히 앉은 채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청회색 눈동자가 어스름한 등불 탓에 붉은빛을 띠는 듯했다.

그가 내 뺨을 만지며 말했다.

“나쁜 꿈이라도 꾸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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