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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가 시집살이 너무 쉬운데요 (126)화 (126/177)
  • #126.

    “으아악!”

    흑마법사들이 고통에 찬 비명을 내질렀다.

    나는 찰나의 비명을 듣자마자 아키드가 힘을 사용했음을 눈치챘다. 차마 볼 수 없어 고개를 떨구려는데 아키드가 손으로 내 시야을 가렸다.

    뒤이어 우드득, 뼈마디가 꺾이는 스산한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아키드는 몹시 화가 났는지 그들을 포획할 생각조차 하지 않는 듯했다.

    나는 그의 손가락 틈새로 그를 바라보았다. 상대를 노려보는 아키드의 눈빛은 무척 낯설었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바싹 언 동상이 될 것처럼 흉흉한 기운을 풍기었다.

    ‘어떻게 아키드가 같이 왔지?’

    급한 대로 흰둥이만 불렀는데 마침 곁에 있기라도 했던 걸까.

    흰둥이의 능력 중 하나인 ‘땅굴 파기’는 빠른 이동을 위한 것이었다.

    누군가를 태우고 이동하는 건 아직 무리라 나도 시도하지 못한 것인데 아키드는 본능적으로 체득한 모양이었다.

    아니, 어쩌면 위험을 감수하고 흰둥이에게 뛰어들었을지도 몰랐다. 아키드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아서 등골이 오싹해졌다.

    잠시 후, 흑마법사를 모두 처리했는지 아키드가 내 몸에 칭칭 감긴 밧줄을 조심스럽게 풀기 시작했다.

    뒤이어 걱정에 푹 젖은 얼굴과 잔뜩 헝클어진 모양새를 하고 나를 바라보았다.

    “괜찮습니까?”

    어느새 나를 포박하던 밧줄이 끊어지고 구속구만 남은 채였다.

    그가 구속구를 확인하곤 손으로 가뿐히 부러뜨렸다. 동시에 구속구가 바스러진 것을 보면 마법을 사용한 것 같았다.

    내가 안간힘을 써도 끊어지지 않던 구속구는 아키드의 힘 한 번에 파삭, 하고 가루가 되었다.

    새삼 어둠 속성 마법의 괴력을 느낀 나는 얼이 빠진 채 이미 가루가 된 구속구를 힐끔거렸다.

    손과 발이 자유로워지자 자연히 몸에 힘이 도는 느낌이 들었다.

    ― 로에나! 괜찮아? 아이구, 우리 빨강이 놀란 것 좀 봐!

    ― 미안해, 미안해! 설마 고대의 구속구를 재현해 냈을 줄은 몰랐어!

    힘이 돌아오자 자연히 정령들이 눈에 보였다. 실체화하지 않은 정령들이 내게 붙으며 울먹거리고 있었다.

    그들도 내가 납치당할 줄은 몰랐는지 부산스럽게 날갯짓하며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나는 괜찮다는 듯이 아키드와 정령들을 향해 희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동시에 손목을 휘휘 돌리던 중 알싸한 통증이 느껴졌다.

    “아.”

    아까 감시망을 피해 힘주어 흙바닥을 향해 손을 뻗은 탓에 손목이 쓸리고 피가 난 모양이었다.

    이미 푸르뎅뎅해진 손목은 보기 흉할 정도였다. 이대로 두면 내일은 피멍이 들 게 뻔했다.

    아키드가 손목의 상처를 보고 “하” 하고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뒤이어 욕지거리 같은 말이 스쳐 지나가는 듯했으나 너무 작게 말해 제대로 듣지 못했다.

    늘 다정한 그의 입에서 험한 말까지 나오자 나는 말을 잃었다.

    “미안합니다. 지켜 주겠다고 약속해 놓고 다치게 해서.”

    아키드가 나를 품에 끌어안고 다정히 말했다.

    깊은 한숨을 내쉬는 걸 보니 나를 찾아서 다행이라고 여기면서도 지켜 주지 못한 것에 화가 난 것 같았다.

    “저야말로 미안해요. 걱정 끼쳐서.”

    나는 그를 마주 안은 채 등을 토닥였다. 예상치 못한 아키드의 등장으로 당황하기는 했어도 덕분에 무서움을 덜었다.

    스스로의 능력을 과신하던 차에 걸린 덫이라 이 상황이 내심 무서웠던 탓이었다.

    방심의 대가는 혹독해서 하마터면 혈혈단신으로 흑마법사의 소굴로 끌려갈 뻔했다.

    내가 의도하고 들어간 게 아니라 끌려갈 뻔했다는 점이 으스스했다.

    나는 아키드의 너머로 흑마법사가 있던 자리를 힐끔 쳐다보았다.

    흑마법사들의 시체는 흰둥이가 땅속으로 끌고 갔는지 희미한 핏자국만이 남아 있었다.

    내 눈 보호까지 해 주는 흰둥이의 깔끔한 솜씨에 저걸 칭찬해야 할지, 두려워해야 할지 감이 잘 잡히지 않았다.

    아키드가 나를 품에서 놓으며 이곳저곳을 살폈다.

    여전히 주름이 깊게 팬 미간은 그의 심리 상태를 여실히 보여 주고 있었다.

    나는 그의 성난 미간을 보며 가만히 생각했다.

    ‘아키의 미간에는 맑은 시냇물이 흐르는구나. 미끄럼틀도 타겠어.’

    이참에 별명을 바꿀까, 하는 엉뚱한 생각까지 미치자 웃음이 나왔다.

    아키드에 관해서는 뭐든 미화되어 보이는 건 내가 그의 덕후이기 때문이렷다.

    나는 이런 위급한 와중에도 내가 이딴 주접이나 떨고 있다는 걸 아키드가 알게 해선 안 된다고 판단했다.

    알면 분명 나에 대한 환상이 파삭, 깨질 테니까.

    나는 애써 콧구멍이 벌렁거리는 걸 참으며 어색하게 웃었다.

    한데 그걸 아픈 걸 숨기는 거로 오해했는지 아키드가 말했다.

    “많이 아파요?”

    그가 부러지기라도 할까 봐 걱정되는지 손을 가볍게 쥐어 왔다.

    청회색 눈동자가 물 먹은 별처럼 촉촉한 빛을 띠는 것 같았다.

    깊게 팬 주름이 사라지자 이번에는 별 박은 눈동자가 내 심장을 때리는 기분이었다.

    “전혀요. 아키드가 걱정해 주니까 아픈 게 다 나은 거 같아요.”

    속없이 헤실거리며 웃던 나는 이내 나탈리 후작이 배후라는 걸 떠올리고는 냉큼 표정을 굳혔다.

    “아, 맞다. 저 배후를 알아냈어요. 배후는 나탈…….”

    내가 막 나탈리 후작을 고발하려는 때였다. 돌연 머리가 핑 도는 기분과 함께 시야가 기울었다.

    ‘어라라.’

    몸이 내 것 같지 않은 기분이 들었다. 뒤이어 속에서 칼부림이 나는 것처럼 거센 저항이 이어졌다.

    마치 몸 안의 무언가가 팟, 하고 터졌다 다시 모여드는 기분이었다.

    낯선 감각이었다. 공황이라도 온 것처럼 숨이 턱턱 막혀 캑캑거리자 아키드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로네? 열이……!”

    그가 나를 부축해 흔들다 깜짝 놀랐다. 내 몸에 돌연 열이 펄펄 끓는 탓이었다.

    ‘설마 이대로 나 죽는 거야?’

    열이 난다는 걸 인식하자 덜컥 겁이 났다. 전염병의 증세가 열병을 동반하는 탓이었다.

    ‘아냐. 침착해. 이건 뭔가 느낌이 달라.’

    전염병은 열병을 동반한 몸살 증상이라고 했다.

    전조 증상은 재채기라고 했는데 나는 아직 재채기를 하지 않고 있었다.

    ‘아, 그럼 각성인가?’

    뒤이어 내 각성기가 얼마 남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하필 이런 외진 곳에서 각성을 하게 되다니.

    아늑한 요새를 놔두고 노숙을 할 처지에 놓이자 눈앞이 캄캄해졌다. 나는 아키드의 팔을 붙들며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아키, 저, 아무래도, 각…….”

    그때였다. 나는 아키드의 표정을 보고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꼭 무서운 장면을 본 듯 눈빛이 바람 위의 촛불처럼 거세게 흔들렸다.

    내가 각성해서 놀란 사람치고는 조금 과한 반응이었다.

    “아키?”

    몸까지 떠는 걸 보니 걱정부터 앞섰다. 그 순간 아키드가 벌떡 일어나 나를 업고 달리기 시작했다.

    “의원, 의원에게……!”

    계속 의원이라는 단어만 내뱉으며 무서운 속도로 내달렸다. 흰둥이를 타고 가도 된다는 건 생각도 못 하는 듯했다.

    내가 괜히 힘들이지 말고 흰둥이를 타고 가자고 막 전하려던 때였다.

    “죽으면, 안 돼……. 죽도록 절대 내버려 두지 않아. 그깟 후유증으론 절대로.”

    이어진 아키드의 말에 심장이 철렁했다. 뒤이어 ‘노파’가 어쩌고 ‘꿈’이 어쩌고 하며 당최 알아듣지 못할 소리를 해 댔다.

    아키드는 내가 각성을 해서 열이 난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마치 다른 무언가 때문에 아프다고 여기는 사람처럼 다급함이 느껴졌다.

    그 순간 문득 그가 매일 아침저녁으로 찾아와 열은 없는지 내 체온을 재던 게 떠올랐다.

    그때는 그냥 각성기를 앞두고 걱정이 많아진 거라고 여겼는데. 다른 염려라도 있었던 걸까.

    ‘에이, 설마…….’

    지금의 아키드가 전염병으로 죽는 원작 속 내 미래를 알 리 없었다.

    애초에 그건 말이 안 되잖아?

    ‘말이 안 되는 건 맞는데, 하지만 이건 마치…….’

    나는 슬슬 힘이 빠지는 기분에 축 늘어졌다.

    본격적인 각성이 시작된 터라 더는 정신을 차리고 있기 어려워진 탓이었다.

    결국 나는 아키드에게 해명도, 추궁도 하지 못한 채 까무룩 혼절하고 말았다.

    * * *

    다행히 로에나가 있던 곳은 하델루스령과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

    뒤이어 출발한 하델루스의 기사단과 그들을 앞지르던 에이프릴 쌍둥이가 아키드를 발견한 건 행운이었다.

    ‘의원! 의원에게 보여야 해! 이대로 두면……!’

    ‘진정해! 이건 의원이 본다고 해결되는 게 아니라고!’

    ‘딱 보면 모르겠냐? 각성이잖아. 저리 비켜, 새끼야! 방해되니까!’

    에이프릴 쌍둥이는 로에나의 증상을 보자마자 각성이 시작되었음을 깨닫고 발 빠르게 응급처치를 했다.

    덕분에 용솟음치며 날뛰던 로에나의 힘이 한풀 꺾이자 이동은 순조로웠다.

    하델루스 성으로 돌아온 아키드는 로에나의 침실 문 앞을 지키며 숨을 골랐다.

    자신이 조금만 늦었어도 로에나가 크게 위험할 뻔했다.

    흰둥이만으로는 각성이 시작된 로에나를 섬세하게 지켜 주지 못했을 테니까.

    아키드는 순간 판단으로 로에나를 구해 냈다는 것에 간담이 서늘했다.

    동시에 로에나가 휘청이기 전에 했던 말이 스쳐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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