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공가 시집살이 너무 쉬운데요 (125)화 (125/177)
  • #125.

    엘레나의 훈수에 아키드가 그녀를 힐끔 쳐다보았다. 그러자 아키드를 밀치며 그녀가 직접 나설 태세를 취했다.

    엘레나는 상대가 로에나가 아니라는 걸 알자마자 입가에 무시무시한 미소를 머금었다.

    상대를 밟아 줄 때마다 짓는 우아한 미소인데. 당하는 입장에선 공포스러운 일이었다.

    “어, 어, 어머니.”

    공포에 찬 인형이 아래턱을 덜덜덜 떨며 그녀를 불렀다. 그러자 엘레나가 싱긋 미소 지으며 말했다.

    “보자, 어디부터 손봐줄까.”

    엘레나가 슬쩍 품에서 단검을 꺼내었다. 당장이라도 들이밀 것처럼 주저함이 없었다.

    그 와중에도 흰둥이를 한 손으로 품고 있는 모양새가 우아하면서도 참 기괴했다.

    “제가 하겠습니다.”

    아키드는 혹여나 흰둥이가 다쳐 로에나가 슬퍼할까 봐 엘레나에게서 검을 빼앗았다.

    피라도 튀었다간 흰둥이의 하얀 털이 물들 수도 있으니 신중하게 처리해야 했다.

    그때였다. 돌연 엘레나의 품에 있던 흰둥이가 발광을 하며 그르렁거리기 시작했다.

    “어머, 얘가 갑자기 왜 이래?”

    엘레나는 제 품에서 발버둥 치는 흰둥이를 놀란 눈으로 쳐다보았다.

    털을 쓰다듬고 “쉬이” 하고 달래 보아도 소용없었다.

    어느새 동공까지 세로로 쪽 찢어진 흰둥이는 당장이라도 본체로 돌아갈 것 같은 기세를 풍겼다.

    심상치 않음을 느낀 엘레나가 막 흰둥이를 내려놓으려는 때였다.

    “윽!”

    그녀가 얕은 비명을 지르며 흰둥이를 놓쳤다. 흰둥이가 그 시간도 참지 못하고 기어이 손등을 할퀸 탓이었다.

    “흰둥아!”

    엘레나는 손등을 부여잡고 흰둥이를 불렀다. 하지만 흰둥이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창문으로 뛰어들었다.

    쨍그랑!

    유리 깨지는 소리와 함께 흰둥이가 밖으로 몸을 날렸다. 그 모습을 본 아키드가 무언가를 감지하고 뒤따라 뛰어내렸다.

    깜짝 놀란 엘레나가 뒤쫓아 갔을 때는 이미 흰둥이가 땅속으로 사라진 후였다.

    “이게 대체……?”

    엘레나는 아키드가 흰둥이와 함께 땅속으로 꺼진 자리를 넋 놓고 지켜보았다.

    뒤늦게 소란을 들었는지 데미안이 서재로 들이닥쳤다.

    “지금 뭔가 깨지는 소리가……!”

    뒤이어 포박된 로에나를 보고 눈을 홉떴다. 로에나가 울먹이며 대공을 쳐다보았다.

    “아버니이이임.”

    “속지 마세요. 가짜니까.”

    엘레나는 당장 포박을 풀려는 데미안에게 짧게 언질하며 인형의 목덜미를 손으로 짚었다.

    “흑마법이에요. 삿된 자들이 기어이 이딴 더러운 인형을 만들어 새아가를 납치했어요. 방금 아키드랑 흰둥이가 사라진 걸 보면 위치를 파악한 것 같은데…….”

    막 상황을 설명해 주려는 찰나였다. 데미안이 엘레나의 말을 끊고 그녀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이거 뭡니까?”

    그가 아까보다도 더더욱 굳은 얼굴로 손등의 상처를 보며 낮게 되물었다.

    붙들린 손에는 흰둥이에게 할퀴어진 상처로 피가 퐁퐁 솟아나고 있었다.

    원체 약한 피부라서 꽤 깊게 팬 모양이었다. 엘레나가 아무렇지 않게 손을 물리며 말했다.

    “보면 몰라요. 할퀸 자국…….”

    “누가 그걸 물었어?”

    데미안은 지나치게 태연한 엘레나의 대답에 예민하게 반응했다.

    그가 물리려던 그녀의 손목을 꽉 움켜잡는가 싶더니 크라바트를 풀어헤쳤다.

    엘레나는 대뜸 짜증을 내며 크라바트로 상처를 칭칭 감는 데미안을 싸늘하게 쳐다보았다.

    지금 새아가가 납치당했다는데 한가하게 손등 상처나 보고 있단 말인가.

    “이럴 시간 없어요. 얼른 성을 빠져나간 마차를 수소문해서 새아가의 위치를…….”

    엘레나가 차분히 설명하는데도 데미안은 듣는 척도 안 했다. 그가 단단히 동여매 지혈한 손목을 확인하곤 아실을 불렀다.

    “대공 전하, 부르셨……!”

    아실이 포박된 로에나와 다친 엘레나를 보며 말을 잃었다. 그러자 대공이 엘레나를 번쩍 안으며 말했다.

    “저건 새아가가 아니니 일단 지하 감옥에 가두고 배후를 캐. 그리고 제널드를 불러서 성을 빠져나간 마차를 추적하라고 하고.”

    “알겠습니다.”

    아실이 빠르게 명을 받고 기사를 대동해 가짜를 끌고 갔다. 뒤이어 데미안이 대기하던 아리아 백작 부인에게 말했다.

    “자네는 지금 당장 의원을 침실로 대령하고.”

    “네, 전하.”

    아리아 백작 부인이 데미안의 품에 안긴 엘레나를 한 번 힐끗하곤 빠르게 사라졌다.

    데미안이 곧장 침실로 이동하려 하자 엘레나가 낮게 소리치며 발버둥 쳤다.

    “지금 이게 뭐 하는 짓이에요? 내가 손이 다쳤지 발이 다쳤어요?”

    남들 보는 앞에서 번쩍번쩍 안아 드는 행태가 경악스러웠다. 이런 짓은 본인 첩한테나 할 것이지.

    그 잘난 아랫도리를 썩히고 있는지도 꽤 오래였다.

    엘레나는 데미안의 헷갈리는 행동이 짜증스러워 몸을 비틀며 항변을 이었다.

    “내려 줘요. 내려 달라고!”

    그러자 데미안이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엘레나는 드디어 내려 주려나 싶어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그 순간 청회색 눈동자가 잡아먹을 듯이 엘레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웃음기 하나 없는 그 서늘한 눈동자에는 감정이 용솟음치고 있었다. 화가 나는 걸 간신히 참는 표정이었다.

    다친 건 저인데 왜 그가 화를 내는지 몰라 얼굴을 와락 구긴 때였다.

    데미안이 뒤늦게 표정을 풀고 예의 능글맞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자꾸 종알거리면 키스해 달라는 뜻으로 알 겁니다. 그래도 계속 왱왱거릴 텐가, 엘라?”

    당장이라도 입술을 댈 것처럼 고개까지 기울이는 능글맞은 태도에 엘레나가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이, 이, 이 호색한……!”

    “어? 지금 말했는데.”

    “…….”

    데미안의 말에 엘레나가 입을 다무는 동시에 양손으로 입술을 가렸다. 그 모습을 본 데미안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래요. 그렇게 얌전히 갑시다, 좀.”

    * * *

    다행히도 흑마법사들이 나를 데리고 간 곳은 웬 버려진 터였다.

    나는 실눈을 뜨고 주변을 살펴보았다. 부서진 기둥의 모양을 보아하니 예전에 신전으로 이용됐던 것 같았다.

    군데군데 부서진 타일 아래 흙바닥이 보였다.

    제단처럼 보이는 판 위에는 무성한 덩굴이 세를 넓혀 잠식하고 있었다.

    “여기서 마차를 바꾼 후에는 곧장 목적지로 가라고 명령했네.”

    흑마법사 중 하나가 나를 기둥에 묶으며 말했다.

    듣자 하니 오는 내내 마차를 계속 바꿔치기한 모양이었다. 아마도 하델루스의 추적을 피하기 위함인 것 같았다.

    하필 단단히 감시하고 있어 호루라기를 꺼낼 수가 없었다.

    나는 깊이 잠든 척하며 손을 꼼지락거렸다. 손가락 한 마디라도 땅에 닿는다면 흰둥이와 교감할 수 있는 탓이었다.

    슬금슬금 그들의 눈을 피해 땅바닥으로 손을 옮겨 갔다. 그러는 동안에도 귀를 쫑긋해 흑마법사들의 대화를 엿들었다.

    마침 그들은 웬 ‘제물’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낯선 명칭에 절로 주의가 집중되었다.

    “그런데 제물의 얼굴은 대체 언제 보여 주신대?”

    “몰라. 어련히 때가 되면 알려 주시겠지.”

    “난 이젠 조금 지쳐. 벌써 몇 년인가? 가뜩이나 탄압도 심해져서 숨어 지내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다시 돌아오지 않았을 거야.”

    “예끼! 그런 불경한 소리 하지 말게. 그러다 배신자로 몰리면 어떻게 숙청되는지 잊었나?”

    “알다마다. 눈앞에서 죽어 나자빠지는 동료를 한둘 봤어야지. 일가를 산 채로 태워 죽이는데, 어휴!”

    그간 흑마법사들 사이에서도 내부 균열이 있긴 했던 모양이었다.

    화형이라니, 그것도 산 채로. 꽤 잔인한 방식이었다.

    하긴 음지의 조직을 유지하려면 엄격한 규율을 지니고 있을 테지.

    그때 손가락에 포슬포슬한 흙이 닿았다. 나는 쾌재를 부르며 손끝에 힘을 주었다.

    부디 구속구가 신수와의 계약에는 제약을 걸지 못하기를 바라면서.

    다행히 구속구로 인해 힘이 빠져나가는 일은 없었다. 손끝으로 타고 흐른 힘이 빠르게 땅에 흡수되었다.

    “그나저나 그분을 보좌하는 그 흉터 있는 사내 말이야. 어쩐지 낯이 좀 익어. 안 그런가?”

    “자네도 느꼈나? 실은 나도 엠버 일가가 생각이 나서 조금 꺼림칙하네.”

    “쉿, 누가 듣겠어. 전 수장의 일가에 관해 입 밖으로 꺼내선 안 된다는 걸 잊었나?”

    “자네가 먼저 시작했으면서 호들갑은. 어차피 우리 말곤 아무도 없지 않은가? 설마 날 고발이라도 할 셈인가? 만약 내가 숙청된다면 자네부터 의심할 거야.”

    그들은 내가 도망갈 궁리를 하는지도 모르고 그저 대화 삼매경이었다.

    ‘그래요. 실컷들 씨불이세요. 그 틈에 나는 도망칠 거니까.’

    흰둥이와의 교감에 성공한 나는 여유롭게 기다렸다.

    근처에 델루스 꽃이 언뜻 있는 걸 보면 아직 하델루스령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것 같았다.

    적어도 그 인근이겠거니 하며 자는 척을 유지했다. 잠시 후.

    우르릉―

    건물 무너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땅이 크게 진동했다. 갑작스러운 지진에 수다를 떨던 흑마법사들이 움찔했다.

    “무, 뭐야? 지진인가?”

    “저, 저길 봐! 갑자기 땅이 푹 꺼지고 있어!”

    “젠장! 일단 인질을 데리고 여기서 도망치자고!”

    그 말과 함께 두 사람이 황급히 내게 다가왔다. 나를 들쳐 메고 피할 생각인 것 같았다.

    그들이 밧줄을 풀려고 꺼진 땅에서 등을 돌린 찰나였다.

    “어어어, 이거 왜 이래?”

    그들이 돌연 이상한 방향으로 움직이는가 싶더니 서로에게 부딪쳐 넘어졌다.

    나는 그 기현상을 벌인 존재가 누구인지 단박에 알아챘다. 감각이 마비된 자는 저렇듯 방향을 잃어버리니까.

    게다가 그들 주변으로 죽음의 색과도 같은 검은 오러가 일렁거리고 있었다.

    뒤이어 내 예상대로 백표범이 된 흰둥이를 탄 아키드가 훌쩍 뛰어내려 나를 감쌌다.

    이를 본 흑마법사들은 저승사자를 본 것처럼 얼굴이 희게 질렸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