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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가 시집살이 너무 쉬운데요 (124)화 (124/177)
  • #124.

    내가 눈을 떴을 때는 사지가 결박되어 어디론가 이동하는 중이었다.

    바퀴 소리와 함께 옅은 여물 냄새가 코끝에 감도는 걸 보니 짐마차 안인 것 같았다.

    나는 침울한 표정을 한 채 바닥에 머리를 콩콩, 찧었다.

    ‘얼굴에 방심해 버렸어.’

    설마 아키드의 얼굴로 나를 유인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나마 곧장 정체를 알아채긴 했는데 그때는 이미 저쪽 술수에 당한 후라는 게 문제였다.

    정체를 알아채고 가짜와 대치하던 중 갑자기 머리가 핑 도는 느낌을 받았다.

    아마도 가짜에게서 나던 향기에 수면 작용을 일으키는 것이 섞여 있던 모양이었다.

    그게 아니었다면 적을 앞에 두고 잠이 온 것부터가 말이 안 되었다. 집 안에 잠자코 있으면 될 줄 알았던 건 크나큰 오산이었다.

    설마 하니 간도 크게 하델루스 성에 잠입하는 미친놈이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더 정확히는 하델루스 성의 보안을 뚫고 자객이 침입했다는 게 충격이었다. 그것도 아키드의 얼굴을 하고서.

    ‘어떻게 그러지?’

    나는 기절하기 전 보았던 아키드를 떠올리며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덕후인 내 눈을 속일 정도로 정교한 얼굴이었다. 느끼한 말투와 낯선 애칭이 아니었다면 알아채지도 못했을 만큼.

    순간이나마 아키드를 구분하지 못했다는 게 덕후로서 수치스러웠다.

    조금만 눈썰미 있게 살펴봤어도 눈치챘을 텐데. 얼굴이 개연성이라 그만 방심하고 말았다.

    물론 마냥 당하지만은 않았다. 쓰러지기 전 나를 납치한 상대가 누군지 알아챘으니까.

    ‘설마 나탈리 후작이 흑마법사였을 줄이야.’

    혼절하던 중 가짜 아키드의 목덜미에 있는 기이한 흔적을 똑똑히 보았었다.

    [아골수14527]

    그건 분명 내 글씨체였다. 그것도 아키드와 관련된 물건에 내 거라고 표시할 때 쓰는 비밀 암호.

    정식 명칭은 ‘아키 쇄골 수심 5미터’. 아키드의 쇄골을 보고 나서 곧장 생각해 낸 암호였다.

    일종의 닉네임인데, 일반인인 로에나와 덕후 로에나를 구분 짓는 또 하나의 이름이기도 했다.

    ‘아키한테도 말하지 않은 암호를 저쪽이 몸에 새기고 있을 리 없잖아.’

    눈으로 본 순간 얼굴이 확 달아오르는 기분이었다.

    줄여서 써 놓아서 다행이었지 풀네임으로 새겼으면…….

    나는 수치스러운 상상을 멈추며 낮게 침음했다. 일전에 아키드에게 암호를 말하지 못했던 것도 풀네임을 말해야 해서였다.

    저 닉네임을 해석할 줄 아는 건 나뿐이니까.

    게다가 닉네임 뒤의 숫자를 보면 잃어버린 나탈리 후작의 인형이 분명했다.

    애장품을 시크릿 존에 들일 때마다 순서대로 새긴 숫자이니 확실했다.

    어째서 발바닥에 새겨 둔 게 목덜미에 있는 건지는 알 수 없지만 의심할 여지 없는 바로 그 인형이다.

    ‘그래. 애초에 안에서 나갔다면 흔적이 없는 게 당연하지.’

    내 시크릿 존은 안으로 들어오는 건 어려워도 밖으로 나가는 건 쉬운 구조였다.

    안에 있던 인형이 제 발로 나가는 건 누워서 떡 먹기보다 쉽다는 뜻.

    나는 그 표식을 보자마자 인형술사가 나탈리 후작이었음을 눈치챘다. 애초에 그 인형은 나탈리 후작이 선물한 거였으니까.

    이미 그녀가 조각을 즐겨 한다는 걸 알기에 빼도 박도 할 수 없는 정황이었다.

    ‘그동안 일부러 엉성한 인형들로 시선을 끌었구나.’

    아키드와 에이프릴 쌍둥이가 없앤 인형들은 나탈리 후작의 조각과 연결 짓기도 힘들 만큼 졸작들이었다.

    너무 엉성한 인형들이라 조각에 조예가 깊은 나탈리 후작과는 연결 짓지 못한 게 실책이었다.

    ‘이제 어떻게 하지?’

    나는 바둥거리며 주변을 살폈다. 아까부터 정령들을 계속 불렀는데 대답이 없었다. 마치 그들과 나 사이에 벽이 생긴 기분이었다.

    ‘설마 이것 때문인가.’

    나는 손목에 찬 구속구를 힐끔거렸다. 왠지 손목과 발목을 타고 힘이 숭숭 빠지는 기분이 드는 탓이었다.

    딱 봐도 예사 물건이 아닌 것 같았다.

    서당 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코비슈타인과 함께 사업을 벌인 후로는 웬만한 아티팩트는 구분할 수 있었다.

    이건 분명 그냥 족쇄가 아니리라.

    ‘정령의 힘을 차단하는 구속구가 분명해.’

    애초에 신수를 가두는 아티팩트도 서슴없이 만드는 집단이었다.

    정령의 힘을 구속하는 것쯤은 일도 아니겠지. 그렇다는 건 이미 내 정체가 저쪽에 발각되었다는 증거.

    어떻게 알아낸 건지는 모르지만 낭패였다. 죽이지 않은 걸 보면 나를 가지고 생체실험이라도 할 생각인 것 같은데…….

    ‘합방도 못 해 보고 죽어야 한다니. 너무하잖아.’

    한창 침울해져 몸을 꿈틀거릴 때였다. 마차가 멈추는가 싶더니 곧이어 마차의 문이 열렸다. 깜짝 놀란 나는 냉큼 자는 척을 했다.

    “아직 자네.”

    “꽤 독한 약이었으니까. 일단 꾸물거리지 말고 빨리 옮기자고.”

    여럿이 수군거리는 소리와 함께 내 몸이 번쩍 들리는 게 느껴졌다. 몰래 실눈을 뜨니 검은 로브를 입은 자들이었다.

    이번에는 문신이 눈에 띄질 않는 걸 보면 인형이 아닌 것 같았다. 아키드 말로는 인형은 문신을 숨길 줄 모른다고 했으니까.

    내가 막 들것에 실려 갈 때였다. 몸이 흔들리면서 옷 안이 묵직한 걸 느끼고 뒤늦게 쾌재를 불렀다.

    그건 내 비상용 주머니였다.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 가슴골 사이에 넣어 둔 비상용 주머니에는 호신용품과 잡다한 것들이 들어 있었다.

    키나 호출용 호루라기는 물론이고 키나만이 듣고 반응하는 비상용 호루라기 아티팩트와 안젤리카가 준 구슬 등이 들어 있었다.

    남들은 내가 너무 예민하고 불안도가 높다고 하지만 보아라, 이런 때에 얼마나 도움이 되는가.

    바짝 긴장했던 몸이 안도감에 조금 축 늘어지는 기분이었다. 일단 혼자가 되면 비상용 호루라기로 키나를 부를 생각이었다.

    ‘만약 그것마저 통하지 않는다면 그다음에는…….’

    나는 최악의 최악을 떠올리며 마음을 굳게 다잡았다.

    호랑이 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바짝 차리면 살 수 있다고 했다.

    나는 부디 날 데리고 가는 곳에 흙바닥이 있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적에게 몸을 맡기었다.

    * * *

    한편 외출을 마치고 돌아온 아키드는 습관처럼 로에나의 서재로 향했다.

    내내 성에만 있어서 답답할 그녀를 위해 정원을 산책하러 가자 권유할 생각이었다.

    막 서재에 들어가려는데 맞은편에서 엘레나가 다가왔다.

    그녀의 품에 흰둥이가 들려 있는 걸 보니 훈련을 하고 온 모양이었다.

    “로에나를 보러 오셨습니까?”

    “그래. 훈련할 때 늘 와서 견학하던 애가 오늘따라 보이질 않아서.”

    “예? 로에나가 안 왔다고요?”

    그것참, 이상한 일이었다. 로에나는 흰둥이의 훈련 시간에 결석하는 법이 없었다.

    계약자로서 흰둥이의 기술을 모두 눈에 새기겠다며 열의를 불태우지 않았던가.

    아키드는 엄습하는 불안감에 서재 문고리를 당겼다. 그러자 마침 책을 보던 로에나가 눈을 깜빡였다.

    “오셨어요?”

    그녀의 환대에 아키드가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아무래도 지나치게 예민해진 게 분명했다.

    물론 꿈 때문이었지만 이것도 중증이었다.

    로에나는 저가 이토록 집착이 심한 줄 알면 깜짝 놀라겠지.

    아키드는 일부러 태연한 표정을 지었다. 그때 엘레나가 로에나에게 말을 걸었다.

    “오늘은 훈련에 오질 않더구나.”

    은근하게 섭섭한 티를 내자 로에나가 눈을 둥그렇게 뜨며 동문서답을 했다.

    “네? 훈련이라뇨? 누구요?”

    “누구긴 흰둥이지.”

    엘레나가 덧붙이는 말에 로에나가 해맑게 말했다.

    “아아, 흰둥이와 산책이라도 다녀오신 모양이네요. 그런데 고양이도 산책을 해야 하나요? 그런 소리는 못 들었는데.”

    “……뭐?”

    “죄송해요, 어머님. 저는 산책은 별로 안 좋아해서요.”

    엘레나는 어딘가 대화가 어긋나는 듯한 느낌을 받고 눈을 찌푸렸다.

    고양이인 척하는 백표범 신수를 너무도 평범한 고양이 대하듯이 말하는 탓이었다.

    게다가 산책이 별로라니.

    아키드와 주야장천 산책만 해 대는 아이치고는 퍽 말도 안 되는 주장이었다.

    혹여 뭔가 섭섭한 게 있어서 시위하는 건가.

    엘레나가 아키드를 힐끔 쳐다보았다. 아키드도 이상함을 느꼈는지 로에나에게 바짝 다가갔다. 그러자 로에나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아키드 님, 오늘 밤엔 제 침실에 와 주실 수 있을까요?”

    “침실 말입니까?”

    “네에. 오늘은 혼자 자기 싫어서요.”

    로에나가 볼까지 붉히며 하는 말에 아키드와 엘레나의 얼굴이 동시에 굳었다.

    특히 아키드가 무언가를 발견하고 드물게 매서운 빛을 띠었다.

    뒤이어 아키드의 검은 오러가 로에나를 칭칭 감쌌다.

    갑작스러운 포박에 로에나가 눈을 홉뜨며 항변했다.

    “이, 이게 무슨 짓이에요, 아키드 님! 이런 장난은 너무 무서…… 윽!”

    하지만 끝까지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아키드가 살벌한 눈으로 그녀를 옥죈 채 나직이 물었다.

    “로에나 어딨어.”

    몸을 칭칭 감은 검은 오러보다도 그의 눈빛이 더욱 예리한 살이 되어 폐부를 찌르는 듯했다.

    동시에 서슬 퍼런 목소리는 온몸을 얼릴 듯 날카로운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로에나가 사색이 된 채 말했다.

    “무, 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아키드 님, 저 여기 있잖…… 꺄악!”

    순간적으로 오감이 차단되자 로에나가 비명을 질렀다.

    턱을 치켜드니 로에나의 목덜미에 인형들에게서 봤던 서툰 문신이 선명히 보였다.

    그제야 문신을 발견한 엘레나가 눈을 홉떴다. 아키드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로네는 날 아키드 님이라고 부르지 않아.”

    “…….”

    “침실로 오라고 유혹하는 일은 더더욱 하지 않고.”

    그랬다면 진즉 서약서를 깨고 드나들었을 그였다.

    애초에 자꾸 침실에 드나드는 건 그이지 그녀가 아니었다. 아키드가 인형을 부술 듯이 위협했다.

    “마지막 경고야. 로에나 어디 있어?”

    아키드가 윽박을 지르자 로에나의 얼굴을 한 인형이 돌연 엉엉 울음을 터트렸다.

    “흑, 흐윽. 무서워요.”

    로에나의 얼굴로 울기까지 하니 기분이 엿 같았다. 이래선 꼭 저가 그녀를 괴롭히는 것 같아서였다.

    감히 로에나의 얼굴로 이런 짓을 한 흑마법사를 당장에라도 찾아내 찢어 죽이고 싶어 온몸이 부들거렸다.

    그때였다. 엘레나가 덤덤한 음성으로 살벌히 중얼거렸다.

    “이래선 오늘 안에 알아내겠니? 팔이라도 자르면서 물어봐야 냉큼 실토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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