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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가 시집살이 너무 쉬운데요 (123)화 (123/177)
  • #123.

    네? 벗겨요? 뭐를?

    나는 순간 내가 입 밖으로 아키드를 벗기고 싶다고 말한 건가, 싶어 눈을 휘둥그레하게 떴다.

    그러자 아키드가 피식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아까 한 이야기 말입니다.”

    “아까요?”

    이미 아키드의 가슴께에 온 신경이 집중된 터라 그가 말하는 아까가 정확히 언제인지 헷갈렸다.

    내가 멀뚱멀뚱한 채 볼을 붉히자 아키드가 살포시 웃으며 요지를 알렸다.

    “예. 가면을 벗길 수 없게 하면 아예 벗길 수 없는 건가 해서요. 잠금 모드를 푸는 방법은 없습니까?”

    ‘아아, 그걸 벗긴다는 뜻이었구나…….’

    나는 내 안의 음란 마귀가 순진한 아키드의 언어를 음해한 사실을 깨닫고 헛기침을 했다.

    착한 생각을 늘 머리에 박아 두어야 하는데!

    어쩐지 아키드를 정면으로 보는 게 낯뜨거워진 나는 고개를 수그린 채 대답했다.

    “지정된 사람이 벗기거나 암호를 말하면 돼요.”

    “그럼 평소 따로 정해 둔 암호가 있는 겁니까?”

    “네……니요?!”

    “예?”

    아키드가 내 애매모호한 대답에 고개를 갸우뚱했다. 예인지, 아니오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어, 없다고요, 그런 거!”

    나는 지레 찔려 꽥, 소리를 질렀다. 갑자기 큰 목소리를 내자 아키드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아키드에게 평소 쓰는 암호를 알려 줄 수는 없었다.

    내 주접이 가득 담긴 그 암호를 아키드에게 들켰다간 일코고 뭐고 강제 커밍아웃이었다.

    ‘당장 암호부터 바꿔야겠다.’

    내가 괜히 시선을 요리조리 피하는 사이 아키드가 하얀 가면을 가리키며 말했다.

    “암호가 있다면 아군끼리는 서로 확인이 가능하겠군요. 적에게 가면이 벗겨질 위험이 없다면 그 가면은 제가 쓰는 게 좋겠습니다.”

    “네? 이걸요?”

    “예. 상대가 하얀 가면을 알고 있는 것 같아서요.”

    그 말인즉, 나 대신 그가 미끼가 되겠다는 뜻이었다.

    “로에나는 그저 쌍둥이들과 멀찍이 떨어져 제가 정화하는 것처럼 보이게끔만 해 주면 돼요. 그 뒤는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하지만 그러다 괜히 위험해지면…….”

    나는 불쑥 드는 걱정에 그의 옷깃을 붙들며 눈을 깜박였다. 그러자 그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위험한 건 그들이지 제가 아닐 겁니다. 그리고 위험한 일이라면 더더욱 제가 하는 게 맞고요.”

    언뜻 오만하게 들리는 말은 그저 허풍이 아니었다. 각성 이후 어둠 속성의 최강자라 불리는 아키드였다.

    나는 괜한 걱정을 한 것 같아 슬며시 옷깃을 내려놓았다.

    “좋아요, 그럼 해 보자고요.”

    * * *

    깊은 밤 나탈리 후작이 호갑투를 까닥이며 낮게 중얼거렸다.

    “의외인데.”

    방금 제이드의 보고가 제법 신선한 충격을 준 탓이었다.

    “설마 그런 걸 여태 숨기고 있었을 줄이야.”

    나탈리 후작이 내내 감탄만 하는가 싶더니 한쪽 무릎을 꿇고 대기하던 제이드에게 되물었다.

    “폐광산 안까지 샅샅이 확인해 보았겠지?”

    모자의 관계라기엔 지나치게 고압적인 물음이었다.

    대외적으로 양아들을 무척 사랑하는 것처럼 꾸몄으나 실질은 그가 쓸 만해서 곁에 두는 것이었다.

    제이드에겐 흑마법사의 피가 흐르고 있었으니까.

    거리에서 우연히 그를 마주쳤을 때부터 이미 알고 데려온 것이었다. 그녀의 시선을 느낀 제이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광부의 말대로 정령의 흔적이 짙게 남아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정말로 정령사가 다시 나타난 모양이로구나.”

    정령의 흔적은 계약자 없이는 오래 유지되지 않았다.

    정령의 유산이 내내 발견되지 않던 것도 그 이유였다. 피안의 영역에 있는 정령은 이곳에서 제약이 있는 탓이다.

    “흐음.”

    에비스 광산은 대공비의 소유였다. 정령의 가호로 잠재적 가치가 무궁한 광산을 몇 년씩이나 폐광산으로 놀려 두다니.

    손속이 좋은 엘레나가 이를 몰랐을 리는 없으니 손해를 감수하고라도 광산의 상태를 숨기고 싶었던 것일 터.

    보고서를 살피던 나탈리 후작이 짧게 말했다.

    “광부를 직접 만나 봐야겠어.”

    “직접 말입니까?”

    “그래. 잘하면 뭔가 잡힐 것도 같거든.”

    나탈리 후작이 스산한 미소를 짓자 제이드가 묵례했다.

    * * *

    미끼를 던질 계획을 세우기가 무섭게 하델루스령을 침범하던 오염이 주춤했다.

    마치 우리 계획을 알기라도 하는 것처럼 조용해진 상황.

    그 탓에 본체를 잡는 계획은 잠정적으로 미루게 되었다.

    어쨌든 내가 암행을 감행한 건 의협심이라기보다는 생존 본능이었으니까.

    각성기를 앞두고 전염병이 퍼지는 걸 원치 않던 차에 오히려 잘된 일이었다.

    이대로 내가 각성할 때까지 조용히 있어 주면 더할 나위 없었다.

    어느덧 나의 각성기가 코앞으로 다가온 상황이었다.

    나는 최대한 외출을 삼가고 주로 성에서 머물렀다.

    사업도 한나를 대리인으로 세워 서재에서 간접 승인하는 식이었다.

    원래라면 직접 현장에 가서 검토도 할 테지만 몸을 사려야 할 때이니까.

    그 덕에 시간이 많아진 나는 오랜만에 시크릿 존으로 향했다.

    “흐흥.”

    벌써부터 내 새끼를 때 빼고 광낼 생각에 광대가 승천하던 중이었다.

    문득 무언가 달라졌음을 깨달은 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라라.”

    미묘하게 애장품 간의 사이가 벌어져 있었다.

    빈자리를 보이지 않게 하려는 것처럼 아주 미세한 변화였으나 내 눈을 속일 수는 없었다.

    내가 보통 덕후이던가.

    내 새끼는 물론이고 내 물건에 집착하는 진성 덕후이지 않는가?

    나는 예리한 눈으로 무엇이 바뀌었는지를 곧장 포착해 냈다.

    “피규어! 내 인형이 어디 갔지?”

    사라진 건 나탈리 후작에게서 받은 아키드 인형이었다. 나무 조각에 색까지 입혔던.

    받자마자 환호하며 내 거라는 표식을 해 두고 진열해 둔 게 불과 몇 주 전이었다.

    그런데 그게 대체 어디로 사라진 거지?

    “이상하다. 여긴 아무도 못 들어오는데.”

    내 시크릿 존은 철저한 보안이 이루어진 곳이었다.

    열쇠 없이는 들어올 수 없을뿐더러 외부 침임을 알리는 경보 시스템까지 구비한 장소.

    그런 곳을 소리 소문 없이 들어온 것도 모자라 인형만 가지고 나갔다고?

    혹시 몰라 없어진 게 더 있나 살폈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진짜로 인형만 사라진 상황.

    “공기 중에 산화라도 되는 인형이었나.”

    나는 불가사의한 상황에 조금 어리바리해졌다. 경보 탐지기가 제대로 작동하는 것까지 확인하니 더더욱 오리무중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시크릿 존에 영상석이라도 달아 둘 걸 그랬나.

    하지만 그간 시크릿 존은 아무에게도 허락하지 않는 나만의 성역이었다.

    나만 들어오는 곳이라 구태여 영상을 찍어 둘 필요가 없었다.

    애초에 내가 주접을 부리며 덕질하는 걸 실시간으로 녹화하고 싶지도 않았고.

    “곤란하네.”

    내가 오염에 한눈판 사이에 나만의 영역에 도둑이 들어왔다. 완벽한 밀실에서 사라진 건 오직 인형 하나뿐.

    순간 ‘아버님이 또……’ 하는 생각을 하다 고개를 도리질했다.

    아버님의 침입을 대비해 미리 철통 방어를 해 두었지 않았던가.

    설령 아버님이 진짜로 이곳에 들어왔다 해도 굳이 인형을 훔쳐 내 의심을 사지는 않았을 터였다.

    매복이라도 해야 하나, 하고 고민하며 시크릿 존을 빠져나오던 때였다.

    “로에나.”

    “아키?”

    나는 서재 소파에 앉아 있는 아키드를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분명 아침에 나갔던 거로 아는데 벌써 돌아온 건가?

    의아하게 쳐다보자 그가 벌떡 일어나는가 싶더니 대뜸 나를 덥석 안았다.

    아니, 대낮부터 이렇게 적극적으로 굴면 어떻게 한담?

    설렘을 가득 안고 익숙한 가슴에 뺨을 비비던 때였다.

    ‘음?’

    아키드에게서 평소와는 다른 냄새가 났다. 나무 같기도 하고 잉크 냄새 같기도 한. 그리고 미묘하게 코를 자극하는 냄새도 함께였다.

    어디 인쇄소라도 다녀온 건가 싶어 그를 물끄러미 올려다본 때였다.

    아키드가 나와 눈을 맞추며 간드러지는 음성으로 말했다.

    “자기야.”

    예?

    나는 두 귀를 의심하며 아키드를 바라보았다.

    ‘내가 지금 무슨 말을 들은 거지?’

    사람이 너무 놀라면 사고가 정지한다더니 정말이었다.

    나는 아키드라면 절대 하지 않을 애칭을 듣고는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애초에 저 애칭은 서로 합의된 적 없는 것이었다. 그에게 ‘로네’라고 불리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하는 탓이었다.

    물론 저 호칭이 싫은 건 아니었다. 사실 나는 이미 시크릿 존에서 실컷 그를 자기라고 부르는 중이었으니까.

    혼자 히죽거리며 ‘우리 자기는 뭘 먹어서 이렇게 잘생겼지? 매일매일이 리즈잖아!’ 하며 주접을 부릴 때 주로 쓰던 단어였다.

    그런데 그 단어를 아키드가 말하니 생소했다.

    은연중에 눈빛이 정처 없이 흔들렸다.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아키드가 내 턱을 쳐들며 물었다.

    “왜 그래, 자기야?”

    “…….”

    “아, 알겠군. 오늘도 잘생긴 내 얼굴을 보고 반한 건가?”

    아키드가 태연자약하게 농담하며 히죽 웃었다. 그걸 보는 순간 나는 확신했다.

    이 새끼는 내 새끼가 아니라고.

    진짜 아키드라면 나한테 이런 느끼한 눈으로 자기야를 운운하지도, 젠체하며 시답지 않은 농담조로 반말을 할 리도 없었다.

    그래, 이건 캐붕(캐릭터 붕괴)에 가까웠다.

    나는 가짜 아키드와 거리를 벌리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누구냐, 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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