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
이제 보니 내가 도망가지 못하도록 일부러 바짝 잡아끈 모양이었다. 목이 마르는 기분에 괜스레 침을 삼키었다.
아키드가 한 팔로 내 허리를 꽉 붙들고 있는 탓에 피할 곳도 마땅치 않았다.
이에 당황하며 시선을 내리깔기가 무섭게 그가 내 뺨을 들어 시선을 맞춰 왔다.
“로네, 날 좀 봐요.”
불가항력의 명령이 떨어지니 시선을 피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나는 코앞에 있는 아키드를 빤히 쳐다보았다. 아키드의 청회색 눈동자가 진중한 빛을 내뿜었다.
거짓을 말하지 말아 달라는 무언의 눈빛.
저런 눈으로 바라보면 어떻게 숨길 수 있을까.
하지만 무엇으로도 설명할 수 없어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내가 온전한 내가 아니라는 사실을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그것도 가짜라는 걸 어떻게 납득시킬 수 있을까.
초조함이 들자 나도 모르게 입술을 깨무는 강도가 강해졌던 모양이다. 입 새로 비릿한 맛이 느껴지는 듯했다.
그 모습을 빤히 지켜보던 아키드가 내 아랫입술을 엄지로 지그시 눌렀다.
“그만 깨물어요.”
“…….”
“상처 나잖아.”
“아.”
그가 눈을 찌푸리며 가볍게 타박했다. 서슴없는 행동에 목이 바짝바짝 타들어 갔다.
입술을 살살 어루만지는 손길에 기분이 이상야릇해지려 했다.
이렇게 딱 붙어선 나를 빤히 바라보니 머리가 핑글핑글 돌 지경이었다.
나는 그를 슬쩍 밀어내며 말했다.
“저는 하델루스니까. 영지민을 지키고 싶었어요.”
“정말 그 이유 때문인가요?”
“네?”
“뭔가 다른 이유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눈치 빠른 아키드는 내가 뭔가 숨기고 있다는 걸 간파한 모양이었다.
“다른 이유는 없어요.”
“그렇습니까?”
전혀 믿지 않는 눈치였지만 이 기세를 몰아 어물쩍 넘어가려 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그럼 이왕 들킨 거 함께 행동하게 해 주세요.”
그가 내 손에 깍지를 낀 채 다정히 속삭였다.
“부인의 말대로면 저도 하델루스니까요.”
내 꾀에 내가 당한 격이었다. 이것만은 절대 양보 못 한다는 완고한 얼굴에 나는 하는 수 없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 * *
로에나와 헤어진 아키드는 깊은 생각에 잠기었다.
그녀가 말해 주지 않으리라고는 대충 짐작하고 있었다.
다만 이번 암행을 통해 확실하게 알게 된 건 로에나가 다가올 제 죽음에 대해 뭔가 알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가 이렇듯 확신하게 된 데는 헨리와의 만남이 한몫했다.
아키드는 헨리와 로에나가 연락을 주고받는다는 사실을 알고 그를 찾아갔었다.
위협하며 추궁하니 헨리가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로에나 님이 제게 그 일을 맡기신 지는 꽤 오래되었습니다.’
‘그 일이라면 오염이 퍼지는 지역을 보고하는 일을 말하는 건가?’
‘아뇨. 정확히는 어떤 지역을 특정해서 맡기셨습니다. 그런데 그게 소용이 없어지니 열병이 퍼지는 지역을 집중적으로 보고하라 했고요.’
열병.
그 단어를 듣자마자 아키드는 철렁했다.
그의 꿈속에서 로에나가 열병에 시달리다 죽은 탓이었다.
이젠 그 장면이 꿈이었는지, 현실이었는지 분간이 되지 않을 정도로 생생했다.
처음 꿈을 꾸었을 때조차 기시감이 들 정도로 강렬한 꿈이었다.
로에나가 무언가 알고 있다. 그것도 저가 꿈을 꾸기 한참 전부터.
애초에 미래를 먼저 아는 게 인간으로서 가능한 범위도 아니었다. 한데 어떻게 안 걸까.
‘금기가 행해지면 간혹 애먼 영혼이 피해를 입는 경우가 있지요. 아무래도 부인께서도 그중 하나인 모양입니다.’
아키드는 불쑥 해몽가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금기가 행해지면서 애먼 로에나의 영혼이 피해를 입었을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말이.
‘영혼이 피해를 입었다는 게 단순히 상해를 입는다는 뜻이 아닐지도 모르겠군.’
처음 들었을 땐 말 그대로 로에나의 목숨이 위험하다고만 생각했다. 해서 다른 영향을 받으리라곤 상상하지도 못했다.
하지만 로에나가 제 죽음을 예견하고 있는 이상, 전제를 다시 세워야 할지도 몰랐다.
일단은 헨리에게 입단속을 해 두어 저와의 만남을 로에나에게 비밀에 부쳤다.
지금 중요한 건 추궁이 아니라 보호이니까.
아키드가 그간 모아 둔 인형들을 가만히 응시했다.
나무판자를 대충 찍어 낸 것처럼 엉성한 것들은 힘이 약했으나 조각이 제법 섬세한 인형은 그럭저럭 버티는 힘이 있었다.
물론 그마저도 문신을 부수면 힘을 잃고 쓰러지는 졸병들이었다.
일순 아키드의 입매가 비뚜름히 올라갔다. 지금까지는 로에나의 안위를 생각해 졸병을 없애는 데만 급급했었다.
하지만 로에나와 손을 잡기로 한 이상 졸병을 유인책으로 해 본체를 찾는 게 시급했다.
아키드가 검은 가면을 지그시 응시했다. 여태까지 지켜본 결과 그들은 로에나를 공격하기보다는 포획하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오염을 정화하는 인간이니 정체가 궁금했던 걸까. 아니면 또 다른 음모가 숨겨져 있는 걸까.
우선 흑마법사는 정령의 힘을 인지할 수 없다고 하니 그들은 로에나가 정령사인지, 아닌지도 확신하지 못하고 있을 게 뻔했다.
하얀 가면만 적에게 노출되었다면 적을 양지로 끌어들이는 방법은 하나였다.
“이번엔 이쪽에서 미끼를 던질 차례인가.”
아키드가 가면을 만지작거리며 피식 미소 지었다. 그는 스스로 미끼가 될 작정이었다.
* * *
다음 날, 내 서재에서는 상도덕을 어긴 코비슈타인을 처벌하는 건에 관한 논의가 이루어졌다.
나와 아키드, 코비슈타인이 삼자대면한 자리. 내가 아키드의 검은 가면을 흔들며 해사하게 물었다.
“자, 설명해 봐, 코비. 어째서 아키에게 이 가면이 있는 거야?”
이 웃음은 나 몰래 아키드에게 가면을 만들어 준 간사한 노예, 가 아니라 충복에게 내비치는 마지막 자비였다.
코비슈타인이 억울한 얼굴로 비지땀을 흘리며 입을 열었다.
“오해이십니다, 대공자비님. 저도 깜빡 속아 넘어갔어요.”
“속다니?”
“제게 분명 로에나 님이 지시한 일이라고 하셨습니다.”
코비슈타인이 울먹거리며 하는 말에 나는 눈을 둥그렇게 떴다.
“아키가?”
에이, 설마. 우리 아키드가 얼마나 착한데.
나 몰래 뒤에서 나쁜 짓 할 사람은 아니…… 라고 하기엔 원작 속 그는 흑막이었다.
나는 혹시나 싶은 마음에 아키드를 힐끔 쳐다보았다.
그리고 아키드의 순진한 눈망울을 보자 역시 코비슈타인이 자신의 죄를 덜기 위해 아키드를 걸고넘어지려는 게 확실하다고 판단했다.
“변명은 사양이야, 코비.”
“크흡. 억울합니다, 대공자비님.”
코비슈타인이 코를 훌쩍이며 눈물로 호소했다.
뒤이어 무어라 말하려다 꾹 참고 삼키는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어찌나 애절한지, 하마터면 깜빡 속을 뻔했다.
“이번 한 번만이야. 다음에도 이러면 그땐 국물도 없어?”
“네네. 명심하겠습니다.”
코비슈타인은 고비를 넘겨 안심이란 듯이 한숨을 쉬곤 도망치듯 다급히 사라졌다.
나름 악명을 떨치고 있는 나치고는 꽤나 가벼운 처벌이었다. 코비슈타인의 공범이 아키드인 탓이었다.
만약 아키드 말고 다른 사람에게 설계도를 판 거라면 큰 문제였지만 그건 아니었으니까.
물론 그냥 넘어가려는 건 아니었다. 나중에 내 덕질 용품의 업그레이드 도안 하나를 추가로 슬쩍 끼워 넣을 테다.
그때 아키드가 말했다.
“어젯밤 일을 좀 생각해 보았는데, 지금처럼 무작정 나가서 정화하는 건 소용이 없을 것 같습니다.”
“저도 같은 생각이에요. 이래선 본체가 모습을 드러낼 리 없으니까요.”
흑마법사인 척 내세우는 존재들이 인형이라는 걸 안 이상 괜한 힘 낭비는 사양이었다.
나는 간밤에 생각한 내용을 이야기했다.
“차라리 제가 미끼가 되어 볼까요? 그들에게 끌려가는 척하는 거죠.”
“가면을 벗기려 하면 위험할지도 모릅니다.”
“그거라면 걱정하지 마세요. 가면이 벗겨질 위험은 없어요. 애초에 타인이 벗기지 못하도록 하는 수가 있거든요.”
구태여 가면을 만든 이유는 덕질과 일코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였다.
일코에 진심인 나였기에 혹여라도 아키드에게 들킬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만든 방식이었다.
일종의 잠금 모드로, 정해진 암호를 읊지 않으면 가면을 벗길 수 없도록 한 것이었다. 원한다면 지정된 인물을 정하는 방법도 있고.
아사모 회원이면서 내 실체를 들키지 않았던 것도 다 그 덕분이었다.
내가 가면을 만지작거리며 설명하자 아키드가 작게 중얼거렸다.
“아아, 이것 때문이었군요.”
“뭐가요?”
“아닙니다.”
아키드가 의미 모를 미소를 짓는가 싶더니 말을 돌렸다. 그게 몹시 미심쩍었으나 달리 의심할 거리도 없었다.
“그런데 이런 기능은 굳이 왜 만들어 둔 겁니까?”
“으음, 혹시 모르니까요. 아무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은 취미가 있을 수도 있고요.”
“로네의 시크릿 존처럼요?”
아키드가 서재 뒤편에 있는 휘황찬란한 문을 눈짓하며 말을 이었다. 괜히 찔끔한 표정으로 쳐다보자 그가 태연하게 물었다.
“전부터 궁금했는데, 저기엔 뭐가 있는 겁니까?”
어쩐지 입가에는 잔잔한 미소가 머금어진 채였다.
“으음, 제 애장품들이 있어요.”
그것도 아키드에 관한 모든 것이요.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일걸요?
내가 슬슬 시선을 피하자 아키드가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애장품이라면 로네가 아끼는 물건들입니까?”
“네, 맞아요. 제가 수집욕이 조금 있거든요.”
당사자를 앞에 두고 고상한 취미가 있는 척 구는 게 몹시 낯뜨거웠다.
아키드는 별다른 의심 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듯했다. 나는 돌연 귀가 붉어지는 아키드를 보며 눈을 끔벅였다.
“더우세요?”
“예, 조금 덥네요.”
아키드가 눈웃음을 사르르 지으며 바짝 조인 크라바트를 풀어헤쳤다.
단추까지 두어 개 풀자 아까와는 다른 느낌이 풍기었다.
정갈하게 단추를 모두 채웠을 때 느껴졌던 절제미가 갑자기 나른하게 녹아내리는 듯한 아슬한 기분이랄까.
습관적으로 영상석을 찾아 고개를 두리번거리던 찰나였다.
아키드가 내 손에 제 손을 가만히 포개며 말했다.
“그럼 벗기고 싶을 땐 어떻게 합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