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공가 시집살이 너무 쉬운데요 (120)화 (120/177)

#120.

메이벨의 송별회를 며칠 앞두고 신전에서 급하게 사제들이 찾아왔다.

예정된 것보다 오염이 빠른 속도로 퍼져 더는 지체할 수 없으니 그녀에게 급히 귀환하라는 전갈과 함께였다.

이미 수도로도 퍼지기 시작했던 오염인지라 더더욱 급한 모양새였다.

메이벨은 급변한 상황에 다소 당황스러웠다. 송별회 때 로에나를 암살하려던 계획이 허투루 돌아간 탓이었다.

그리고 그 원흉이 지금 로에나와 함께 저를 배웅하고 있었다. 메이벨이 나탈리 후작을 은근슬쩍 노려보았다.

그들에게 오염을 제공한 게 이런 식으로 방해가 될 줄 알았으면 허용하지 않았을 터다.

하지만 더는 축적하고 있을 수도 없던 오염인지라 메이벨은 다음을 기약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애써 표정을 갈무리하며 말했다.

“이렇게 급하게 돌아가게 돼서 죄송해요.”

“아냐. 상황이 급해졌으니 어쩔 수 없지. 메이벨, 잘 지내야 해.”

“데뷔탕트는 꼭 보러 갈게요.”

“그래. 그때가 되면 네가 더 대단한 사람이 되어 있을 수도 있겠다.”

로에나가 빙긋 웃으며 덕담을 했다. 저를 죽이려고 한 줄도 모르고 속없이 구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메이벨이 옅은 미소를 머금다 곁에 선 나탈리 후작에게 말했다.

“후작님께는 작별 인사를 먼저 하게 되었네요. 이렇게 급히 돌아가지 않았다면 좋았을 텐데요.”

“기회가 된다면 또 마주치겠죠.”

“네…….”

은근한 힐난에도 나탈리 후작은 태연하게 반응했다.

메이벨은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마차의 창문을 닫았다.

작전상 후퇴하지만 언젠가는 저 태연한 낯짝에 금이 가도록 하겠다고 다짐하면서.

한편 나탈리 후작은 멀어지는 마차를 보며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

메이벨이 대공자비를 죽이고 싶어 한다는 건 제이드에게 이미 전해 들었다.

하지만 대공자비는 벌써 죽게 두어서는 안 되는 미끼였다. 그녀만 한 약점이 하델루스에 없는 한 더더욱 죽어서는 안 되었다.

하여 메이벨이 원치 않는 걸 알면서도 오염을 퍼트려 그녀를 멀리 보내 버린 것이었다.

제물에게 밉보일지언정 조직의 계획에 차질이 빚어지면 안 되니까.

오염이 퍼진 이상 후작 자신과 제이드가 이곳에 머무는 시간도 길어지게 되었다.

이번 주에는 돌아갔어야 했으나 상황이 어려워진 것이다.

다소 위험한 처신이기는 했다. 원래라면 의심을 사지 않도록 몸을 피해야 했으니까.

하지만 북부에서 수상한 움직임이 확인된 이상 좀 더 오래 머물러야 해서 내린 결정이었다.

어차피 그녀에겐 안전장치가 있으니 계획이 틀어질 시 탈출하면 그만이었다.

나탈리 후작이 로에나를 힐끔거리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벌써부터 성의 경계가 강화되고 있는 것을 보면 제 예상대로인 것 같았다.

이곳에서 미각성자는 로에나 하델루스밖에 없으니까.

‘조만간 각성기가 시작될 테지.’

본성에 거처하던 제 짐까지 별장으로 옮긴 것을 보면 외부인을 최대한 차단하려는 심산이었다.

하지만 이미 성 내부에 심복을 숨겨 둔 터라 거처를 별장으로 옮겨도 별 상관이 없었다.

물론 하델루스 대공은 그리 호락호락한 인물이 아니라 조심 또 조심해야겠지만.

애초에 이번 목적은 대공자비가 아니라 오염의 양상을 확인하기 위함이었으니 몸을 사릴 필요가 있었다.

‘기다림이 길수록 수확물이 더욱 달콤한 법이니까.’

나탈리 후작은 이미 보이지 않을 만큼 멀어진 마차를 등지고 별장으로 돌아갔다.

* * *

내 각성기가 가까워지자 하델루스 성은 흡사 요새와도 같아졌다.

그 와중에 북부에 퍼진 오염이 하델루스령에 집중된 터라 상황이 좋지 않았다.

데미안과 엘레나는 일부러 그것을 감추는 눈치였으나 내게는 헨리라는 우수한 정보통이 있었다.

이대로 두다간 하델루스령이 원작처럼 초토화될지도 몰라 암행을 감행할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내 목숨을 지키려면 하델루스령도 지켜야 했다.

게다가 이제 이곳은 내게 너무도 소중해져서 마냥 내버려 둘 수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흰둥이가 내 곁에 있다는 점이었다.

애초에 흰둥이가 없었다면 감시망을 피해 몰래 다녀오기도 어려울 뻔했다.

성체로 거듭난 흰둥이는 훌륭한 이동 수단이자 방패막이였다.

하델루스 성의 감시를 뚫고 다녀올 수 있을 정도로 노련한 신수이기도 했다.

이전에 몰래 드론의 마석을 훔쳐 먹던 재주는 요행이 아니었던 것이다.

“오늘도 훌륭한 작전이었다.”

내가 흰둥이에게 손바닥을 내밀자 백표범 상태의 흰둥이가 앞발을 들어 마주쳤다.

우린 제법 괜찮은 파트너로 거듭나 있었다. 내 델피나를 먹고 무럭무럭 자란 흰둥이는 최강의 신수였으니까.

“별일 없어서 다행이긴 한데, 생각보다 김빠지는데.”

나는 주변을 살피며 어깨를 으쓱였다. 몰래 나와서 벌이는 일치고는 무척 순조로웠다.

이렇게 쉽게 끝날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기에 더더욱 수상쩍었다.

최근 들어 하델루스령을 중심으로 오염이 짙어지고 있었다.

흑마법사 조직이 의도를 가지고 퍼트리는 게 확실한데 그 의도를 전혀 짐작할 수 없었다.

내 딴에는 정화하는 자가 누구인지 알아내려 함정을 판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 판단이 무색하게 개미 새끼 한 마리도 보이질 않았다.

마수조차 보이질 않는 걸 보면 내가 괜히 겁을 먹고 정화를 하고 다니는 건가 싶기도 했다.

그렇게 오늘도 찝찝한 암행을 마치고 돌아가려던 차였다.

돌연 인기척이 들리는가 싶더니 웬 검은 물체가 나를 덮치려 했다.

“으악!”

너무 놀라 무엇인지 확인도 못 하고 팔로 얼굴을 감쌌다.

그 순간 둔탁한 소음과 함께 흰둥이가 상대를 낚아채 바닥에 꽂았다. 마치 먹이를 낚아채듯 재빠른 동작이었다.

무방비하게 있던 순간에 벌어진 일이라 심장이 미친 듯이 콩닥거렸다.

‘흰둥이 나이스!’

역시 내 최고의 파트너답게 날쌘 동작이었다.

내가 감았던 눈을 천천히 떴을 때였다. 검은 후드를 눌러쓴 자가 흰둥이에게 깔아뭉개진 채 신음을 터트렸다.

“사, 살려 주시오!”

“사람……?”

그것도 행색이 몹시 수상한 사내였다.

이 밤에 왜 저런 복장으로 돌아다닌 걸까.

사내는 흰둥이에게 물린 팔을 붙든 채 애처로운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수상한 등장과 달리 퍽 애절한 모습이었다.

그때 흰둥이가 나를 빤히 바라보며 어떻게 할지를 묻는 표정을 지었다.

죽일까, 풀어 줄까.

만약 흰둥이가 말을 할 줄 안다면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게 아닐까.

‘그래도 일단 붙잡아 두고 심문이라도 해 볼까.’

딱 봐도 흑마법사와 연루가 된 자 같았다. 뺨에 대놓고 낮은음자리표가 그려져 있었으니까.

저런 자가 용케 수배망을 피해 여태 활보하고 다니는 게 신기할 따름이었다.

“정체가 뭐야.”

“크윽, 우리는 위대한 사명을 받고 우리의 원수를 찾아…….”

내 물음에 사내가 막 자신의 거창한 포부를 밝히려던 때였다. 돌연 내 주변으로 사내의 일행으로 보이는 이들이 달려들었다.

“꼼짝 마! 이번에는 놓치지 않겠다! 하얀 가면!”

잔뜩 기합이 들어간 사내가 내게 검을 휘두르려 했다. 하나같이 잘 보이는 곳에 문신이 있는 자들이었다.

이상하게도 나는 저들을 처음 보는데 저들은 내가 처음이 아닌 것처럼 굴었다.

부지불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멀찍이 있는 흰둥이가 나를 돕기는 역부족한 거리였다.

― 로에나!

― 빨강아!

뒤늦게 정령들이 나를 보호하려 몰려들 때였다.

크릉!

흰둥이가 나를 구하려 급하게 앞발을 땅에 내리치자 땅이 크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하필 내가 있는 땅까지 쪼개질 듯이 흔들려 그만 중심을 잃고 뒤로 나자빠질 위기였다.

‘흰둥아, 우리 아까까진 좋았잖아!’

최고의 파트너라고 추켜세우기가 무섭게 팀킬을 당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그래도 정령이 있으니 가벼운 골절상만 입겠구나, 하고 눈을 질끈 감았을 때였다.

누군가 나를 번쩍 안아 드는가 싶더니 발이 땅에서 멀어졌다. 공이 땅을 딛고 튀어 오르듯이 가벼운 동작이었다.

나는 상대를 확인하고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내가 쓴 가면에서 색깔만 다른 탓이었다.

“검은 가면?”

저건 분명 코비슈타인의 아티팩트였다. 내가 웃돈을 주고 독점한 상품이 왜 남의 손에 있는 걸까.

상대는 나를 빤히 쳐다보는가 싶더니 한바탕 지진이 나 난리가 난 땅에서 멀찍이 떨어졌다.

“위험하니 여기 있어요. 저쪽은 제가 해결할 테니까.”

목소리까지 변조시킨 걸 보니 영락없는 코비슈타인의 작품이었다.

내가 얼이 빠져 상대를 쳐다볼 때였다. 그가 검은 후드를 쓴 자들을 처리하려는지 걸음을 옮기려기에 소매를 붙들었다.

“누구세요?”

누구신데 제 물건을 도용하고 계신 거죠?

이 와중에 설계도를 도난당한 게 아닌가, 걱정하는 나도 정말 대단한 장사꾼이었다.

상대는 내 질문에 한참 입술을 달싹이는가 싶더니 품에서 무언갈 꺼내 내밀었다.

“당신한테 이걸 허락받은 사람이요.”

“……!”

그가 내민 건 델루스 꽃이었다. 그리고 내가 델루스 꽃을 주어도 좋다고 허락한 사람은 이 세상에 단 한 사람뿐이었다.

“아키드?”

내가 긴가민가한 얼굴로 그를 부르자 그가 부정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헉!”

나는 확인 사살을 받고 양손으로 입을 가렸다. 아키드가 이곳에 있는 상황에 당황스러웠다.

분명 흰둥이를 통해 완벽히 빠져나왔다고 생각했는데 그새 꼬리를 밟혔던 건가.

“잠시만 있어요. 설명은 나중에.”

아키드가 한차례 나를 다독인 후 저쪽으로 가려던 때였다.

“야, 이 새끼야. 네가 뭔데 우리 귀염둥이한테 큰 소리를 내고 지랄이야!”

누군가 검은 후드의 사내를 짓밟으며 발광을 했다.

굉장히 살벌하면서도 익숙한 욕지거리가 귀에 쩌렁쩌렁 울리자 나는 아키드가 이곳에 있는 이유를 어렴풋이 짐작하고야 말았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