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
아키드의 질문에 제이드가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아무래도 후작과도 따로 이야기를 해 본 모양이었다. 제이드가 시선을 피한 채 작게 중얼거렸다.
“그리 좋은 기억도 아니니까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아키드에게만큼은 냉정히 굴기 어려웠다. 13지구에서 지낸 시간은 그에게 지옥과도 같았다.
기억하고 싶지도 않고, 할 수만 있다면 지워 내고 싶은 수치스러운 과거였다.
하지만 하루도 즐겁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었다. 적어도 아키드가 있어서 그 지긋지긋한 생활을 버텨 낼 수 있었으니까.
모두가 저만 바라보며 입을 벌릴 때 그는 함께 있어 주며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었으니까.
제이드는 애써 표정을 갈무리하며 차갑게 말을 이었다.
“그러니 대공자께서도 제게 지나치게 친근하게 굴지 마십시오.”
“그렇게 바짝 경계할 필요 없어. 어차피 후작에게 우리 관계를 말할 생각은 없으니까.”
아키드가 그 말과 함께 제이드의 어깨를 툭, 치며 중얼거렸다.
“거짓말에 서툰 건 여전하네, 제이드.”
“무슨……?”
“너 거짓말 할 때면 눈을 피하잖아.”
“…….”
“무엇 때문에 과거를 외면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변한 건 너뿐이 아니니까.”
아키드가 무감한 눈으로 제이드를 힐끗했다. 제이드는 메이벨과 만나고 온 것이 찔려 바짝 언 채 그를 쳐다보았다.
잠시 후, 아키드가 아무렇지 않게 작별을 고했다.
“잘 가라, 제이드.”
그 이상의 추궁은 없었다. 아키드가 제이드를 스쳐 지나 걸었다.
담백한 인사였으나 이별을 고하는 인사이기도 했다.
자신이 먼저 놓은 관계임에도 아쉬움이 느껴지는 건 아키드의 매정한 태도 탓이리라.
제이드는 저도 모르게 뒤를 돌아 아키드를 바라보았다.
자신이 그의 아내를 암살하는 데 조력하고 오는 길인 걸 알았다면 그는 어떻게 반응했을까?
‘그 마음이 변치 않으시길 바라요.’
문득 제게 맹랑한 경고를 한 대공자비가 떠올랐다.
그녀는 한눈에도 아키드를 무척 아끼는 것 같았다. 저를 알아보자마자 은연중에 친애의 빛을 띠기도 했으니까.
하지만 자신이 13지구를 먼저 버렸음을 내비치자 대공자비의 태도가 돌변했다.
호의는 사라지고 경계심만이 남았었지. 혹시라도 아키드를 물고 늘어질까 봐 경고까지 하면서.
제법 친밀한 사이처럼 보이는 행동이었다. 적어도 대공자비만큼은 아키드를 무척 아끼는 듯했다.
저는 13지구에서 나온 후로도 내내 외줄 타기를 하는 심정으로 살아왔었다.
반면 아키드는 좋은 집안은 물론 믿어 주는 아내까지 생긴 것 같았다.
물론 그가 아내를 어떻게 생각할지는 잘 모르겠다. 정략혼이라고 들었다.
사생아라는 오점을 가리기 위해 일찍부터 해 버린 결혼이라고.
그러니 자신이 아는 아키드라면 아내를 단지 책임져야 할 존재로만 여길 터였다. 과거에 쉐리에게 그랬던 것처럼.
제이드는 또 다른 옛친구를 떠올리다 고개를 내저었다. 아키드와 만나고 나니 자꾸만 그 시절이 떠올랐다. 지겹게.
‘하지만 만에 하나 아키드에게 소중한 존재라면?’
그렇다면 자신은 지금의 선택으로 아키드와 완전히 반목하게 될지도 몰랐다.
아니, 이미 하델루스 가문과 자신이 몸담은 조직은 원수나 다름없었다.
지금이 아니래도 언젠가는 반드시 대립하게 될 사이였다.
“그래. 내 앞가림이나 잘하자.”
제이드는 목구멍까지 치민 말을 삼키고 걸었다. 아키드와는 정반대의 길로.
* * *
메이벨의 송별회를 앞두고 헨리에게서 서신이 당도했다. 그간 하델루스령에서 수상한 낌새가 있을 때마다 헨리가 서신을 보내곤 했다.
하델루스령만큼은 지키기 위해 비밀리에 정화 작업을 착수한 탓이었다.
그에게서 연락이 왔다는 건 하델루스령에 또 일이 터졌다는 뜻이었다.
[북동쪽을 중심으로 열병 증세를 보이는 이들이 있습니다.
감기와 증상이 비슷하지만 일전에 대공자비님께서 말씀하신 증상과 흡사해 연락드립니다.]
우려한 일이 기어코 발생한 모양이었다. 북동쪽이라면 테슬이 있는 곳이기도 했다.
델루스와는 나름 인접한 곳에서 발생한 열병인 탓에 내 죽음과도 충분히 관련이 있어 보였다.
‘하필 북동쪽이라니.’
마침 나탈리 후작과 제이드가 유물 재검토차 테슬을 오가는 터라 조금 찝찝해졌다.
‘설마 내가 전염되는 경로가 손님이었나?’
원작에선 누군가에게 옮았다고만 해서 시녀라고만 여겼다. 내가 마주치는 사람이라곤 시녀와 가족들뿐이었으니까.
게다가 그곳은 메이벨이 주로 활동한 무대이기도 해서 덜 신경 쓰던 곳이기도 했다.
애초에 원작과 달리 메이벨이 오염이 퍼지는 즉시 활동해 전염병이 발생하지 않는다고 여겼기에 조금 의외였다.
메이벨의 힘은 단순한 신성력이 아닌 빛 속성 마법이었다. 그것도 빛의 루이스의 유일한 후예였다.
방계를 후계자로 들인 후 빛 속성의 힘이 약해지면서 가문이 멸문한 건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곳 사람들이 모르는 사실이 하나 있었다.
그렇게 약해진 힘은 사실 사라지는 게 아니라 몇 세대를 건너뛴 후 다시 강한 마법사를 태어나게 한다는 것.
그리고 다시 태어난 직계에 버금가는 힘을 가진 이가 바로 메이벨이었다.
해서 메이벨은 각성기조차 없었다. 태어나자마자 태초의 루이스와 같은 힘을 지닌 채였으니까.
물론 그녀에게 각성기가 없다는 건 이곳 세계 사람들은 알 턱이 없었다. 이미 완성형일 때부터 소설이 시작되었으니까.
그러니 그녀가 오염을 없앤 건 정확히는 신성력이 아니라 빛 속성의 능력이었다.
빛의 루이스는 모든 것을 원상 복귀시키는 힘을 가졌다. 일종의 치유 이상의 회복 능력이었다.
원래 상태로 되돌리는 힘은 정령사가 사라진 때에 아주 필요한 힘이기도 했다.
오염을 없애는 데 급급한 신성력과 달리 빛 속성 마법은 자연의 자생 능력을 회복시키니까.
물론 이미 죽은 땅은 회생시킬 수 없다는 점에서 정령사와 달랐다.
하지만 겉으로 보기엔 신성력으로 착각하기 쉬웠다.
특히 루이스가 사라져 진정한 빛 속성 마법을 보지 못한 지금의 세대라면 충분히 오해하고도 남았다.
‘메이벨이 일찍 활약한 덕에 전염병은 생기지 않을 줄 알았는데.’
의외의 결과였다. 이래선 메이벨의 힘이 땅에 영향을 미치지 못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분명 데미안은 메이벨이 오염을 없앴다고 했었는데 참 이상했다.
“일단 전염병이 맞는지부터 확인해야겠다.”
헨리의 말대로 오염의 후유증이라면 냉큼 땅을 정화하고 오면 전염병이 사라질 터였다.
나는 은신용으로 코비슈타인에게 부탁한 가면을 챙겨 들었다.
아사모에서 쓰던 토끼 가면과 달리 눈에 띄지 않는 달걀처럼 매끈한 흰색 가면이었다.
가면을 쓰면 정체를 알 수 없게 되는 코비슈타인의 걸작이기도 했다.
그의 재능 덕에 정령의 힘을 몰래 사용할 때 유용하게 쓰는 중이었다.
“흰둥아, 일하러 가자.”
내 말에 정령들이 부산스럽게 모여들고, 흰둥이가 본체로 모습을 바꾸었다.
* * *
한편 나탈리 후작과 제이드는 테슬의 유물 매립지를 둘러보는 척 땅의 상태를 살폈다. 제이드가 땅을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렸다.
“역시나 이곳의 땅도 지나치게 상태가 좋습니다.”
“뭔가가 있는 게 분명해.”
나탈리 후작이 호갑투로 제 손등을 톡톡, 두드리며 생각에 잠기었다.
사실 그들이 북부까지 직접 오게 된 건 북부가 지나치게 조용해서였다.
아무리 오염을 퍼트리기가 무섭게 거두었다 해도 땅에 타격이 없을 수는 없었다.
그러니 차츰 오염의 후유증이 발생해야 하는데 북부가 너무도 고요했다.
그게 의아해 유물 재검토를 핑계 삼아 북부로 찾아온 것인데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았다.
“신기하네요. 땅이 눈에 띄게 건강해졌습니다. 엊그제까지만 해도 상태가 그리 좋지 않았던 거 같은데.”
제이드의 말이 맞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테슬 지역은 오염의 후유증이 발생하기 시작하던 곳이었으니까.
한데 하루 사이 이렇게 말끔히 회복한 땅이라니. 누군가 땅을 정화한 게 아니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설마…….”
나탈리 후작은 불현듯 어떤 존재를 떠올리다 고개를 내저었다. 그들의 존재를 역사에서 지워 버린 게 바로 흑마법사였다.
물론 정령들이 사라지면 생길 대재앙을 알았다면 절대 하지 않았을 실수이기도 했다.
‘만에 하나 정말로 정령들이 다시 깨어난 거라면.’
그거야말로 절호의 기회였다. 이번에는 제물도 함께이니 성공할 수 있을 터.
“확인이 필요하겠구나.”
“예?”
“정말 그들이 다시 나타난 건지, 아니면 다른 존재인 건지 말이야.”
이를테면 루이스의 후예일 가능성도 있었다.
루이스의 힘도 땅의 자생 능력을 정령만큼은 아니래도 어느 정도는 회복시킬 수 있으니까.
하지만 루이스 가문 역시 멸문한 지 오래라 양쪽 모두 가능성이 희박하기는 했다.
그래도 어느 쪽이든 찾아내야 했다. 과거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면.
“무슨 확인을 말입니까?”
나탈리 후작이 빙그레 미소 지으며 하는 말에 제이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자 나탈리 후작이 말했다.
“지켜보면 알게 될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