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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가 시집살이 너무 쉬운데요 (117)화 (117/177)
  • #117.

    “하?”

    아키드가 기가 막혀 헛웃음을 내뱉는 때였다.

    “그래. 그건 말도 안 되지!”

    일라이저가 뒤이어 동의하며 카일을 따라 다리를 꼰 채 뻔뻔하게 대답했다.

    물론 얼마 못 가 쥐가 난다는 듯이 다리를 풀며 종아리를 퉁퉁, 내리치는 게 하찮았다.

    아키드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애초에 따를 생각이 없었다는 거군.”

    어차피 이들이 이럴 것을 대비했던 차라 그리 화가 나지는 않았다.

    어쨌든 로에나를 생각하는 마음만큼은 진심인 이들이니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게 낫겠지.

    “우리를 움직일 수 있는 건 로에나뿐이다.”

    그때 일라이저가 제법 진중한 투로 선전포고하듯 가슴을 치며 히죽 웃었다.

    “오랜만에 나와 생각이 같네.”

    카일이 흡족한 얼굴로 주먹을 뻗자 저들끼리 주먹을 맞대며 낄낄거렸다.

    아키드는 벌써부터 머리가 아파지려 했다. 사실 쌍둥이를 일찍 부른 건 다름 아닌 아키드 자신이었다.

    로에나의 꿈을 꾼 이후, 혹시 모를 위급 상황을 대비해 쌍둥이에게 급히 전령을 보냈다. 조금 일찍부터 와서 대기해 줄 수 있느냐고.

    갑작스러운 부탁이니 일을 처리하고 오려면 시간이 꽤 걸릴 줄 알았는데 괜한 염려였던 모양이다.

    이렇게 좋다고 달려올 줄 알았으면 조금 늦게 전보를 보냈어도 될 뻔했으니까.

    “그나저나 손님이 또 있던데.”

    카일의 물음에 아키드가 뒤늦게 나탈리 후작과 옛 친구인 제이드를 떠올렸다.

    ‘처음 뵙겠습니다. 제이드 나탈리입니다.’

    사실 제이드가 나탈리 후작가에 입적되었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그동안 로에나가 자기 사업에 열중하고 확장에 여념이 없었다면, 아키드는 후계 수업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수도의 정계 변화는 이미 빠삭한 일이었다.

    제이드가 입적하기도 전부터 그가 후작의 후계자로 내정되어 있었다는 건 수도에서 암암리에 퍼진 일이었다.

    그의 출신이 거리의 아이라서 더더욱 사교계에서 입방아에 올랐었다.

    내내 조용하더니 직접 데리고 온 걸 보면 나탈리 후작도 정말 그를 후계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어차피 이젠 나랑은 상관없어.’

    수도에 있으면서 자신이 대공인 데미안 하델루스의 사생아였다는 걸 제이드가 몰랐을 리 없었다.

    사정이 있겠거니, 살아 있으면 됐다고 생각하며 지낸 게 벌써 몇 년이었다.

    그런데 직접 대면하고도 모른 척하니 그건 그것대로 좀 충격이기는 했다.

    ‘쉐리도 모른 척하려나. 그 녀석이 알면 가만두지 않을 텐데.’

    아키드는 오랜만에 떠오른 친구의 이름에 가만히 미소 지었다.

    제이드가 변한 것처럼 쉐리도 많이 변했다. 이젠 예전의 골목대장이 아니라 어엿한 길드의 수장이었다.

    그것도 수도에서 악명 높은 암흑 길드 실드의 수장.

    쉐리네 일행이 폭풍 성장할 수 있었던 건 로에나의 전폭적인 후원 덕이었다. 로에나는 사업 수완만큼 후원에도 통이 꽤 컸으니까.

    해서 지금은 쉐리가 로에나에게 살살 긴다고 들었다.

    대체 무슨 수로 쉐리의 기를 꺾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로에나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곁에만 있어도 사람을 끌어당기는 묘한 매력을 지니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자꾸만 안달 나는 건 아키드 자신이었다.

    하루빨리 빌어먹을 서약서 조건이 끝나기를 바라고만 있었다. 그때라면 로에나도 더는 그을 선이 남아 있지 않을 테지.

    자연히 미소가 지어지던 찰나 카일이 불쾌한 것을 본 듯 앙칼지게 물었다.

    “이봐, 왜 그렇게 웃는 거지?”

    “방금 굉장히 음흉했어.”

    일라이저까지 도끼눈을 뜨며 카일의 말을 거들었다.

    “이젠 웃는 것도 시비인가?”

    아키드는 눈치 하나는 빠른 두 사람의 추궁을 아무렇지 않게 넘기며 말을 이었다.

    “지금 본성엔 나탈리 후작과 그 아들이 머물고 있어. 오며 가며 마주칠 수도 있으니 참고하게.”

    “아들이라면 이번에 정식 후계자가 되었다던 자도 함께 왔나 보군.”

    카일이 심드렁히 대꾸하며 화제를 돌렸다. 애초에 그쪽에는 관심도 없었다는 건 아키드도 잘 알았다.

    “그래서 대체 언제 말해 줄 거지? 우리를 불렀다는 건 로에나의 일일 텐데 말이야.”

    예리한 질문에 아키드가 피식 웃음 지었다. 안 그래도 그 이야기를 할 생각이었다.

    “그래, 맞아. 로에나의 일로 부른 거다.”

    “뭔데. 무슨 일인데. 로에나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겼다면 가만두지 않겠어!”

    일라이저가 발끈하며 아키드가 입을 열기를 재촉했다. 성격 급한 건 여전했다.

    아키드는 잠시 노파와의 만남을 떠올렸다.

    노파는 분명 로에나가 누군가에게 노려지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아키드는 그 누군가가 흑마법사라고 확신했다.

    데미안은 흑마법사들이 오염을 마음대로 퍼트릴 수 있는 상태라고 이야기했었다.

    그들에게 하델루스 가문은 눈엣가시일 터.

    어떻게든 치워버리고 싶은 이때, 하델루스 가문에는 약점이 하나 남아 있었다.

    바로 로에나 하델루스.

    곧 있으면 성년을 맞아 데뷔탕트를 치르는 미각성자의 존재는 정적의 노림을 받기 쉬웠다.

    ‘정령사라는 걸 알게 되면 더더욱 노리려 하겠지. 금기의 가장 큰 부작용인 오염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안이니까.’

    물론 저들이 로에나의 정체를 알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정령의 힘과 흑마법은 서로 인식하지 못한다고 정령들이 말했으니까.

    아키드가 쌍둥이를 빤히 쳐다보았다. 아직 이들은 로에나가 정령사라는 걸 알지 못했다.

    사실 최근 에이프릴 후작을 만난 데미안이 로에나의 정체를 귀띔했다가 낭패를 본 일이 있었다.

    그래도 아버지이니 미리 언질을 해 주자는 의도였는데.

    후작이 듣자마자 역시 내 딸이라며 감동의 눈물을 흘리더니 온 세상에 그 사실을 밝히고 싶어 드릉드릉해서 말리느라 혼났다고.

    나름 천재 소리 듣는 쌍둥이의 활약에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던 후작치고는 꽤나 격한 반응이었다.

    그 모습을 직접 본 데미안은 한동안 징그러운 벌레를 보고 온 것처럼 문득문득 인상을 찌푸리곤 했다. 지나치게 시달린 탓이었다.

    해서 쌍둥이에겐 아주 나중에 말하기로 의논을 마친 상태였다.

    아키드는 데미안의 선택이 탁월했다고 판단했다. 제 생각에도 이들의 반응이 아버지인 후작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 같았으니까.

    아마 정령사라는 걸 알게 되면 ‘어화둥둥, 우리 막둥이’ 하며 플래카드라도 달고 싶어서 드릉드릉할지도 몰랐다.

    그런 모습을 보면 영락없는 로에나의 가족이었다.

    그녀가 직접 만든 피켓을 들고 환영하는 건 이미 하델루스의 전통으로 자리 잡을 정도로 스며들어 있었으니까.

    오히려 안 해 주면 섭섭한 티를 내는 게 대공 부부였다.

    고민을 마친 아키드가 입을 열었다.

    “오염의 원인이 흑마법이라는 건 잘 알고 있겠지.”

    “그래. 알다마다. 최근 북부에 오염이 다시 시작돼서 꽤 곤욕을 치르고 있다지? 안타깝게 생각하네.”

    전혀 안타깝지 않은 얼굴로 유감을 표하는 카일을 보며 아키드가 말했다.

    “북부에만 오염이 일어난 건 우연이 아니야. 그들은 마음만 먹으면 어디든 오염을 퍼트릴 수 있는 상태이니까.”

    “뭐라고? 그럼 일부러 북부를 건드리고 있다는 말이야? 대체 뭘 위해…….”

    카일이 말을 잇다 말고 눈을 홉떴다.

    “설마 저들 목적이 로에나라도 된다는 뜻인가……? 그래서 우릴 급히 부른 거고?”

    역시나 두뇌파인 소후작답게 하델루스의 약점이 로에나라는 걸 어렵지 않게 간파한 모양이었다. 아키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흑마법사들이 호시탐탐 하델루스가를 노린다는 건 공공연한 사실이지. 그렇다면 그 가문을 치기 위한 가장 쉬운 방법이 뭐라고 생각하나?”

    “각성하지 않은 가문의 일원.”

    카일의 눈빛이 서늘해졌다. 하델루스 일가 중 각성하지 않은 이는 로에나뿐이었다.

    그리고 미각성자가 각성하는 순간은 그 어떤 때보다도 무방비해지는 시기였다. 아키드와 카일이 서늘한 시선을 교환하던 찰나.

    “무어?! 그게 사실이라고?! 어떤 상놈이 우리 막둥이를!”

    일라이저가 흥분해 주먹으로 테이블을 내리쳤다. 당장에 죽이러 갈 듯이 형형한 눈빛이었다.

    조금만 건드리면 미쳐 날뛰기 딱 좋은 상태. 카일이 일라이저의 머리를 내리쳐 진정시킨 후 침착하게 말했다.

    “그래서 우리가 뭘 하면 되지?”

    “바람 속성은 기척을 감추는 것은 물론 수상한 자의 기척을 찾아내는 데에 특화되었다고 들었어.”

    “엄밀히 따지자면 암살에 특화된 힘이지. 상대가 기척을 느끼기도 전에 찌르는 게 꽤 재미있거든.”

    참으로 무시무시한 발언을, 그것도 입맛을 다시며 내뱉은 일라이저가 눈을 번뜩였다.

    사람 여럿 찔러 본 눈빛이었으나 아키드는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뒤이어 카일도 입꼬리를 비뚜름히 올리며 말을 보탰다.

    “에이프릴 가문이 괜히 악명 높은 게 아니라는 건 그쪽도 알고 있겠지. 그러니 내가 여동생의 남편을 찌르는 일이 없기를 바라.”

    일종의 ‘내 여동생 눈에 눈물 내면 너부터 암살당할 줄 알아라’라는 경고였다.

    아키드는 말도 안 된다며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자신이 로에나의 눈에 눈물 날 일을 만들 리 없을뿐더러 그런 일이 정말 일어난다면 저부터가 스스로를 죽이고 싶어질 테니 저쪽이 손쓸 틈도 없을 터였다.

    아키드가 익숙한 협박을 웃어넘기며 말을 이었다.

    “각성기가 시작되기 전까지 로에나의 주변 기척을 살펴 줬으면 해. 수상한 기척을 발견하면 에이프릴 식대로 해도 좋아.”

    그 말은 암살해도 좋다는 뜻과도 같았다. 에이프릴 식 해결은 말 그대로 즉결 처분이었으니까.

    카일은 아주 마음에 드는 조건이라는 양 히죽 웃으며 말했다.

    “거참, 쉬운 일이면서 우리만 할 수 있는 일이로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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