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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가 시집살이 너무 쉬운데요 (116)화 (116/177)

#116.

어차피 한 번은 싸워야 할 흑마법사들이었다. 물론 지금 당장 그들과 전면전을 벌일 생각은 없었다.

아직 각성하지 않은 것도 있고 구태여 내 정체를 드러내 표적이 되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그렇다. 그들이 내가 정령사라는 걸 모르는 이때가 기습하기에 최적의 조건이었다.

그러니 가급적 나라는 사람은 숨기고 그들을 칠 생각이었다.

이미 그러기 위해 나름대로 계획을 짜 두기도 했고.

나는 머릿속 계획을 떠올리며 음흉하게 웃었다. 그러자 정령들이 말했다.

― 으으, 또 이상하게 웃어.

― 또 뭔 짓을 하려나 봐.

― 뭔지 모르겠지만 살살 해.

그간 악명을 떨치기 충분한 내 행동들을 곁에서 몸소 체험한 정령들은 나를 말리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나는 가볍게 정령들을 무시하며 시크릿 존을 나갔다. 때마침 서재로 들어온 한나가 나를 반기며 말했다.

“아, 역시 여기 계셨네요. 방해할 수 없어서 기다렸는데.”

내가 시크릿 존에 들어가면 아무도 방해하지 못하게 으름장을 놓았기에 차마 노크하지 못하고 밖에서 대기했던 모양이었다.

“무슨 일 있어?”

“그게…… 도련님들께서 오셨어요.”

“응? 오라버니들이 벌써 왔다고?”

내 각성기에 맞춰 온다고 했던 것치고는 지나치게 이른 방문이었다.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쳐다보자 한나가 말했다.

“네. 그런데 문제가 좀 있어요.”

“문제라니?”

어쩐지 불길한 예감에 눈을 가느스름히 뜨는 찰나였다. 한나가 눈을 도르륵 굴리며 대답했다.

“오자마자 로에나 님의 침실로 바로 향하셨어요. 안 된다고 말씀드렸는데도 워낙 막무가내인 분들이라…….”

“뭐?!”

주인이 없는 방에 들이닥치다니!

딱 봐도 내가 없는 틈을 타 뭔 짓을 벌이려는 게 분명했다. 이미 에이프릴 일가의 극성맞은 과보호는 이골이 난 터라 벌써부터 몸이 떨렸다.

뭔지 모르겠지만 내 아늑한 덕후 생활에 적신호가 켜진 것만은 확실하다. 나는 소매를 걷어붙이며 말했다.

“이 오라버니들을 진짜……!”

* * *

카일과 일라이저는 매의 눈으로 하델루스 성을 샅샅이 살폈다. 하델루스령에 직접 방문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철옹성과 같은 외부와 달리 내부는 제법 단란하게 꾸며져 있었다.

한나가 로에나를 부르러 간 사이 카일과 일라이저는 로에나의 침실로 향했다.

주인의 허락 없이 들어가면 안 되는 줄 알면서도 쌍둥이들의 행보엔 거침이 없었다.

“흠, 완벽한데?”

카일이 침실 로비를 살피며 중얼거렸다. 각방을 쓰기 딱 좋은 구조라 마음에 쏙 들었다. 반면 일라이저는 불평을 쏟아 냈다.

“쳇, 합방이라도 했으면 서약서를 운운해서 도로 데려가려 했더니!”

“그랬다간 평생 막둥이 얼굴 못 볼지도 모를 텐데.”

“으악! 그건 안 되지!”

일라이저가 상상마저도 끔찍하다는 양 발을 굴렀다. 카일이 그 모습을 한심하게 쳐다보며 로에나의 침실 문에 무언가를 착실히 붙였다.

[남자 출입 금지]

굉장히 정직한 경고성 문구가 달린 팻말이었다. 아래 깨알같이 붉은색으로 [남편도 예외 없음]이라는 구절도 적혀 있었다.

카일이 흡족하게 문구를 쓸어내리곤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로에나의 취향대로 꾸며진 방은 흰둥이의 물품과 키나의 물품으로 가득했다.

마침 휴식 중이던 키나가 불청객을 향해 깍깍거리며 꺼지라는 신호를 보냈으나 깔끔히 무시당했다.

“우리 막둥이 침대인가.”

침대를 발견한 일라이저가 매의 눈을 했다.

혹여 검은 머리카락 한 올이라도 나오기만 해 봐라, 두 눈에 불을 켜는데 카일이 그의 뒷덜미를 잡아챘다.

“이봐. 구경이나 하자고 온 게 아니란 걸 알 텐데.”

“아. 맞다, 맞다!”

일라이저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얌전히 주변을 탐색했다.

잠시 후, 카일이 뒤따라 들어온 시종에게 빈 벽을 가리켰다.

“저기가 좋겠군.”

“알겠습니다, 소후작님.”

“서둘러! 막둥이가 오기 전에 다 끝내야 하니까.”

“예에, 갑니다.”

시종이 부리나케 포장을 뜯어 무언가를 벽에 걸기 시작했다. 이윽고 시종들은 쓰레기까지 말끔히 치우고 사라졌다.

카일과 일라이저가 팔짱을 낀 채 흡족하게 벽을 바라보았다.

“진즉 걸어 두었어야 했는데.”

“괜찮아. 아직 데뷔탕트도 안 했으니 지금 걸어도 되지.”

두 사람이 만담하듯 주거니 받거니 할 때였다.

“여기서 뭐 해요?!”

씩씩거리는 새된 음성과 함께 로에나가 들이닥쳤다. 살벌한 표정은 물론 한 손에는 방금 카일이 걸어 둔 팻말이 뭉개진 채였다.

* * *

몇 분 전, 침실 로비에 도착한 나는 어이없는 웃음을 터트렸다.

“이게 다 뭐야?”

[남자 출입 금지], [남편도 예외 없음]이란 문구는 딱 봐도 아키드를 겨냥한 경고였다.

대체 다 큰 여동생의 연애를 왜 이렇게 죽자고 방해하는지 알 수 없었다.

어차피 방해 안 해도 이미 수절한 지 무려 7년 차였다.

나는 씩씩거리며 팻말을 떼어 구겨 버렸다. 아무래도 쌍둥이의 방문 의도가 심히 의심스러웠다.

내 각성기 도와주는 건 핑계고 실은 방해하러 온 거 아니야?

그리고 내 생각이 맞기라도 하듯 방에 들어서자마자 마주친 눈빛에 어이가 없어졌다.

‘저, 저, 저게 뭐야!’

나는 흠칫, 몸을 떨며 뒷걸음질 쳤다. 정확히는 벽에 걸린 흉물스러운 초상화 세 개 때문이었다.

특대 사이즈의 초상화에는 에이프릴 후작과 카일, 일라이저의 두상이 그려져 있었다.

정면을 본 채 부리부리한 눈을 뜬 세 사람은 흡사 ‘아비와 오라비가 지켜보고 있다’라고 말하는 듯했다.

저 초상화만으로도 침실의 분위기가 싹 바뀐 느낌.

의도가 빤했다. 가족의 초상화 앞에선 차마 합방을 못 하리라 판단한 것 같았다.

‘하, 진짜…….’

나는 에이프릴 일가의 극성맞은 조치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어차피 성에 널린 게 방이었다.

‘부부가 어? 꼭 침실에서만 어? 그러라는 법이 어디 있다고, 어?’

나는 안 그래도 짜증 나는 상황에 서러움까지 북받쳐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이 방 하나를 감시한다고 뭐가 될 줄 안다는 게 어이가 없었다.

한두 살 먹은 애도 아닌데 부부간 밤일까지 간섭받아야 하다니!

솔직히 저 초상화들은 자다가 깨서 보면 귀신인 줄 알고 비명을 지를 비주얼이었다.

나는 당장 저 초상화들을 태워 버릴 생각에 씩씩거리며 쌍둥이에게 다가갔다.

“여기서 뭐 해요?!”

“막둥아!”

그러자 일라이저가 화색이 돋은 얼굴로 나를 와락 안아 들어 빙글빙글 돌렸다.

그 덕에 내 머리까지 빙글빙글 도는 기분이었다. 못 본 새 키가 더 커진 일라이저는 나를 무슨 종이 다루듯이 휘휘 돌렸다.

그때 바람이 살랑 부는가 싶더니 어지러움이 덜해졌다. 의아해 쳐다보니 카일이 마법을 사용해 나를 배려해 준 것 같았다.

“그만해. 로에나가 어지러워하잖아.”

“어, 어라. 어릴 땐 이거 굉장히 좋아했는데?”

“이젠 로에나도 숙녀야. 그리고 그 속도에 멀미 안 하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카일의 핀잔에 일라이저가 시무룩한 얼굴로 나를 내려놓았다. 그러곤 나를 위아래로 살피며 감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어느 틈에 이렇게 자라선. 아, 눈에서 땀이.”

일라이저가 눈을 치켜뜨며 촉촉해진 눈가를 땀이라고 우기기 시작했다.

‘누가 보면 일라이저가 나를 업어 키운 줄 알겠네.’

나는 흐린 눈으로 일라이저와 카일을 쳐다보다 벽에 걸린 초상화를 가리켰다.

“저거 치워.”

“안 돼.”

“그래! 절대 안 되지. 어떻게 가져온 물건인데.”

카일과 일라이저는 의외로 강경하게 버텼다. 하긴 저 정도 사이즈를 가지고 오려면 꽤 고생을 했겠지.

하지만 부탁하지도 않은 짓은 왜 하는 건데!

내가 부리부리하게 노려보자 찔끔한 그들이 시선을 피했다.

이미 내 거부 반응을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이 각오가 바짝 선 표정이었다.

그렇게 나온다, 이거지.

나는 한숨을 후, 내뱉으며 비장의 카드를 꺼냈다.

“자꾸 그러면 이번 휴가 때 알랑에 안 갈…….”

“이봐, 당장 저거 치워.”

카일이 막 돌아온 시종에게 명령했다. 이에 질세라 일라이저까지 닦달했다.

“뭘 꾸물거리고 있어! 에잇! 이리 줘!”

시종들의 굼뜬 행동이 못마땅했는지 일라이저가 손수 초상화를 떼어 내며 합세했다.

올해 데뷔탕트를 마치면 알랑에 다 같이 놀러 가기로 한 걸 기필코 사수하겠다는 기세였다.

나는 여전한 두 사람의 모습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 집안 역시 대공가 못지않게 조금 이상하다는 건 이미 익히 아는 일이었다.

* * *

아키드가 성에 돌아왔을 때는 서재에 쌍둥이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당연하다는 듯이 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두 사람을 보며 그가 낮게 뇌까렸다.

“별장에서 기다리라고 했을 텐데. 가급적이면 조용히 움직여 달라던 말은 무시한 건가?”

로에나 몰래 진행하려던 계획은 초장부터 실패였다. 이 극성맞은 개둥이를 믿은 그의 잘못이었다.

그때 카일이 가소롭다는 듯이 턱을 치켜들며 말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군. 어떻게 막둥이를 지척에 두고 모른 척하란 거지? 우리에게도 막둥이를 볼 권리가 있어, 대공자.”

마치 일생일대의 중요한 순간을 목전에 둔 사람처럼 비장하기 짝이 없어서 어이가 없어지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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