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
“아키.”
내 부름에 아키드가 표정을 갈무리하며 가까이 다가왔다.
그러자 제이드가 먼저 입을 열었다. 직전에 동요했다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태연한 태도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제이드 나탈리입니다.”
“…….”
“그럼 대공자비님.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제이드는 내게 인사하고 빠르게 퇴장했다.
아키드가 그의 뒷모습을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처음 뵙는다는 말의 의미를 대강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내가 아키드의 팔을 가만히 붙들어 말했다.
“나탈리 후작에게 입양되었던 모양이에요.”
“역시 그때 수도에서 마주친 건 우연이 아니었군요.”
“네. 모른 척해 달라고 하더라고요. 13지구에서의 일.”
“……그렇습니까.”
아키드가 옅은 한숨을 내뱉으며 이마를 만지작거렸다. 예상한 것보다 반응이 미약했다.
좀 더 슬퍼할 줄 알았는데 어딘지 다른 곳에 정신이 팔린 것 같았다. 게다가 안색도 좋지 않기에 염려 섞인 어조로 물었다.
“잠을 못 잤어요? 눈 밑이 거뭇해요.”
가볍게 눈가를 만지작거리니 그가 옅은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아, 요 며칠 꿈자리가 좋지 않아서요.”
“무슨 꿈을 꾸었길래.”
“절대 일어나면 안 되는 끔찍한 꿈이었습니다. 입으로도 꺼내기 싫어요.”
아키드가 인상을 찌푸리는가 싶더니 화제를 돌려 버렸다.
“그나저나 몸은 좀 어떻습니까?”
“좋아요. 요즘 자꾸 제 건강을 염려하는 것 같네요.”
“환절기라 감기에 걸릴지도 모르니까요. 게다가 각성기도 머지않았고.”
아키드가 괜스레 내 뺨을 만져 열을 재기 시작했다. 며칠 전부터 그는 매일 아침저녁으로 나를 찾아와 이렇게 체온을 확인하곤 했다.
꼭 열이 나지 않을까, 걱정하는 사람처럼 강박적인 모습이라 의아했다.
하긴 각성의 전조 증상이 발열이니 아예 이해 못 할 행동은 아니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아키드처럼 각성도 잘 이겨 낼 테니까.”
“로네를 믿지 못해서가 아니라 그냥 제가 초조해서 그래요.”
“알아요. 오히려 얼굴 자주 봐서 저는 좋은걸요?”
씩씩한 대답이 마음에 드는지 그의 얼굴이 전보단 환해졌다. 그가 내 품에 있는 인형을 가리켰다.
“그건 나탈리 후작이 준 겁니까?”
“네, 맞아요. 하나는 아키 주라고 했어요.”
나는 그에게 내 형상을 한 인형을 내밀었다. 그러자 아키드가 인형이 아닌 나를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귀엽네요.”
“네?”
“인형이요.”
“아아.”
난 또 내 얼굴을 보고 있어서 내가 귀엽다는 줄 알았네.
어쩐지 머쓱해져 눈을 도르르 굴리니 그가 웃음을 터트렸다.
왜 웃나, 하고 쳐다보는 순간이었다. 그가 내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추며 눈웃음을 지었다.
늘 바라왔던 입술이 닿는 감촉에 심장이 찌르르 울렸다. 이게 꿈이라면 깨지 않았으면 좋겠고, 현실이라면 더더욱 황홀했다.
넋이 빠진 채 쳐다보니 아키드가 말했다.
“이건 로에나가 귀여운 탓입니다.”
그렇다면 더더욱 귀여워져 보도록 할게요.
나는 이제부터 귀여움을 담당하기로 마음먹었다. 아키드의 뽀뽀를 받기 위해서라는 불순한 의도가 섞인 건 슬며시 모른 척했다.
* * *
로에나의 상태를 확인하고 온 아키드의 얼굴엔 그늘이 가득했다.
로에나가 죽는 꿈을 꾼 그날부터 계속 같은 꿈을 꾸고 있었다. 로에나가 전염병에 걸려 죽는 꿈.
하필 각성기와 맞물려 손도 써 보지 못하고 죽어 버린 장면을 연거푸 보는 건 괴로운 일이었다.
이렇게 매일 상태를 확인하지 않으면 불안할 정도로 아키드는 코너에 몰려 있었다.
아키드가 향한 곳은 델루스 시가지에서 다소 떨어진 골목길이었다.
그가 웬 주점으로 발을 들이자 안에서 에단이 맞았다.
“오셨습니까?”
“안내해.”
아키드의 재촉에 에단이 어깨를 으쓱이며 구석진 방으로 안내했다. 방 안에 들어가니 허름한 행색의 노파가 일어나 그를 맞았다.
“귀하신 분을 뵙습니다.”
딱히 누구라고 밝히지 않았음에도 대강 그의 정체를 눈치챈 기색이었다.
노파는 일전에 제로니스가 소개해 준 해몽가였다. 원래라면 직접 찾아갈 생각이었으나 꿈자리가 사나워 이곳으로 부른 것이었다.
혹여라도 자신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로에나에게 큰일이 생길 수도 있으니까.
“밖에서 대기하겠습니다.”
에단이 문을 닫자 안에는 노파와 아키드만이 남았다. 노파가 히죽 웃으며 말했다.
“저를 찾으셨다고요.”
“자네가 해몽에 능하다고 들었어.”
“비루한 실력이나마 있지요.”
노파가 겸양의 자세를 보이며 자리에 앉기를 권했다. 아키드가 착석하며 바로 본론을 꺼냈다.
“계속 같은 꿈을 꾸고 있어. 낯선 나라와 낯선 복장을 한 처음 보는 여자의 꿈을.”
“흐음.”
“그러다 최근엔 내 아내의 꿈을 꾸고 있어. 그것도…….”
“아내분께서 죽는 꿈이라도 꾼 얼굴이시군요.”
노파는 아키드가 차마 뱉지 못하던 말을 아무렇지 않게 꺼냈다.
그가 굳은 얼굴로 노려보자 노파가 씨익 웃으며 테이블 위에 카드를 올리기 시작했다.
노파가 뒤집은 카드에는 죽음을 뜻하는 해골과 악마의 그림이 새겨져 있었다.
“그리 좋지 않은 수이군요. 꿈을 꾸게 된 지 얼마나 되셨습니까?”
“낯선 여인이 등장한 건 몇 개월 전부터네. 지난겨울 각성한 직후부터 시작됐으니까.”
“그럼 부인께서 죽는 꿈은요?”
민감한 질문에 아키드가 와락 얼굴을 구기며 말했다.
“그건 일주일도 채 되지 않아.”
노파가 고개를 주억이며 카드 하나를 더 뒤집었다.
이번에는 푸릇푸릇한 숲길에서 거울을 보는 여인이 그려져 있었다. 또 한 장을 뒤집으니 후드를 쓴 노파가 사과를 내미는 사진이었다.
“확실히 부인께 죽음의 기운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누군가 그녀에게 좋지 않은 감정을 갖고 있군요. 꽤나 음습한 기운입니다.”
“그게 대체 누구지?”
아키드가 당장에 처리할 것처럼 으르렁거리자 노파가 너털웃음을 내뱉었다.
“글쎄요. 그것까지는 저도 알지 못합니다. 다만 확실한 건…….”
노파가 악마와 사과를 내미는 노파의 카드를 차례로 가리키며 설명하기 시작했다.
“여기 있는 악마는 좋지 못한 금술이 엮여 있음을 뜻하는 겁니다.”
“금술이라고?”
“예. 세계엔 어겨선 안 되는 금기가 여럿 있습니다. 이를 어긴 자들에겐 낙인이 찍히죠.”
노파의 태연한 말에 아키드의 얼굴이 사뭇 딱딱해졌다. 오염의 원인이 흑마법인 걸 아는 이상 흘려들을 수 없는 탓이었다.
이미 이 세계는 금기를 어긴 세계였으니까.
“금기가 행해지면 간혹 애먼 영혼이 피해를 입는 경우가 있지요. 아무래도 부인께서도 그중 하나인 모양입니다.”
“…….”
노파의 말에 아키드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꿈에서 본 장면이 재생되는 듯해 질끈 눈을 감는데 노파가 말했다.
“하지만 이 패는 꽤 괜찮습니다. 숲의 기운이 강해 액운을 피할 수도 있겠어요.”
아키드가 눈을 들어 노파를 보았다. 그러자 노파가 의미심장한 말을 내뱉었다.
“조만간 접근할지도 모르니 심혈을 기울이시기를.”
* * *
한편 나는 오랜만의 휴식을 즐길 겸 시크릿 존으로 향했다.
열쇠로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그간 열심히 만든 굿즈들이 보기 좋게 전시되어 있었다.
깔끔하게 정리해 둔 덕에 진열장엔 먼지 한 톨도 없었다. 나는 나탈리 후작이 준 아키드 피규어를 잘 보이는 곳에 전시하며 히죽 웃었다.
“돈도 얼추 모았으니 덕질 전략을 조각으로 바꿔 볼까.”
이렇게 색까지 입히니 조각도 나쁘지 않은 것 같았다. 보존제를 잘 입히면 오래 보관도 가능할 것 같고.
이 정도 컬렉션이면 전시회도 거뜬할 거 같았다. 아사모가 안다면 두 팔 벌려 환영하겠지.
만약 내가 정체를 숨기지 않고 아사모 회장을 했다면 진즉 분기별로 전시회를 열었을 터였다.
하지만 아직 아키드에게 일코 중이라 불가능했다. 내 소장품의 대부분은 그의 아내가 아니면 절대 구할 수 없는 것들이었으니까.
‘그러고 보니 요즘 아사모 모임에 조금 소홀했네. 고양이 영애가 갑자기 탈퇴해서 분위기도 뒤숭숭한데 미공개된 애장품이라도 공개해야 할까 봐.’
바쁘다 보니 아키드 팬 관리를 너무 소홀히 했던 게 마음에 걸렸다.
이 이상의 탈덕(덕질을 그만두는 일)을 막으려면 미공개된 애장품을 푸는 게 가장 효과적일 터.
내가 히죽 웃으며 들키지 않을 만한 애장품 공개 목록을 추릴 때였다.
문득 아키드의 모습을 떠올리곤 머리를 까닥이며 골똘했다.
‘그런데 누굴 만나러 나간 걸까?’
평소라면 누구를 만난다고 꼭 말하고 가던 아키드였다. 한데 오늘은 외출한다고만 하고 나간 탓에 조금 의아했다.
요즘 들어 유독 이상한 행동을 보여서 더더욱 그랬다.
그때였다. 델루스 꽃밭에 다녀온다던 정령들이 포르르 날아와 말했다.
― 조짐이 이상해.
― 드디어 움직이기 시작했어.
― 그거 봐. 한계가 올 거라고 했지?
정령들이 으스대며 하는 말에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염의 원인이 흑마법이라는 걸 안 직후, 나는 계속 내 죽음을 대비하고 있었다.
금기를 어긴 자는 걸어 다니는 죽은 땅이라고 했다. 한계점에 도달하면 결국 흔적을 남길 수밖에 없다고.
해서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꼭꼭 숨어 버린 상대를 양지로 꺼내 올 때를.
나는 손가락과 목을 풀며 의미심장하게 중얼거렸다.
“슬슬 우리도 움직여야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