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
“네. 맞아요. 허락 없이 멋대로 만들었는데 마음에 들지 모르겠네요.”
“마음에 들다마다요!”
안 그래도 여긴 피규어 문화 같은 게 없어서 아쉬웠는데!
아쉬운 대로 초상화나 영상석을 모은 것도 어언 7년.
이렇게 멋진 세공으로 만들어진 아키드의 조각상을 영접할 수 있게 될 줄이야.
다른 그 어떤 선물보다도 마음에 들어 오랜만에 콧김이 뿜뿜 나올 것만 같았다.
나는 애써 다소곳한 미소를 지으며 인형을 품에 소중히 끌어안았다.
“감사합니다, 후작님.”
“마음에 드셨다니 다행이에요.”
“꽃축제 때 오셨으면 여기저기 관광시켜 드렸을 텐데. 아니면 말만 하세요. 델루스엔 둘러볼 곳이 참 많거든요.”
내 안에서 나탈리 후작에 대한 호감도가 대폭 상승했다.
자고로 없어서 못 구한 덕질 상품을 대신 구해 주는 사람은 은인이었다.
그리고 반드시 그에 대한 보답을 해야만 그 물건이 온전한 내 것이 되는 것이다.
내가 소매를 걷어붙이는 시늉까지 하자 그녀가 후후,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게요. 도중에 마차 바퀴가 고장 나지 않았으면 더 일찍 왔을 텐데. 아쉽네요.”
“아, 맞다. 소식 들었어요. 눈길에 바퀴가 빠졌었다고요. 다치신 곳은 없으세요?”
“네. 마침 사고가 나기 전에 아들이 바퀴 문제를 발견했거든요. 그 애 아니었으면 정말 크게 다칠 뻔했죠.”
“아들이 있으셨어요?”
놀란 얼굴로 묻던 나는 순간 아차 싶어 눈을 도르륵 굴렸다. 전에 엘레나에게 그녀가 유산 후 불임 판정을 받았다고 들은 탓이었다.
나탈리 후작이 포근히 미소 지으며 말했다.
“가슴으로 낳은 자식이죠.”
“아.”
“워낙 조용히 입양한 아이라서 북부까지는 아직 소식이 전해지지 않은 모양이네요.”
“죄송합니다. 전혀 몰랐어요.”
“괜찮아요. 대공자비께서 소식이 늦는 건 당연하죠.”
“그럼 아드님은 어디 계세요? 못 뵌 것 같은데.”
내가 두리번거리자 나탈리 후작이 말했다.
“잠깐 심부름을 시켜서 나갔어요. 곧 올 때가 되었는데.”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노크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뒤이어 들리는 음성에 나는 그만 깜짝 놀라고 말았다.
“어머니, 제이드입니다.”
“……!”
“마침 왔네요. 들어오렴.”
나탈리 후작이 나붓이 웃으며 아들이 들어오도록 허락했다.
‘설마 같은 사람은 아니겠지?’
그래. 동명이인은 어딜 가든 존재하는 법이었다.
설마 나탈리 후작이 입양한 아들이 아키드의 친구일 리는 없지 않은가.
그렇게 애써 동요를 숨기며 방으로 들어온 나탈리 소후작을 돌아본 때였다.
“!!”
나는 제이드 나탈리의 뺨에 난 흉터를 보며 눈을 홉떴다. 그의 뺨에 흉터가 짙게 있는 탓이었다.
‘제이드의 뺨엔 곰 발톱에 찢긴 흉터가 있습니다.’
아키드가 했던 말을 떠올린 나는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조금 옅기는 하지만 분명 맹수의 발톱 같은 거에 찢긴 흉터였다.
내가 굳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제이드가 내 곁으로 다가와 손등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대공자비님. 제이드 나탈리라고 합니다.”
“아, 안녕하세요.”
나는 엉거주춤 손을 물리며 어색하게 웃었다. 갑작스럽게 제이드와 마주친 상태라 머릿속이 백지장처럼 하얘졌다.
대체 그가 왜 이곳에, 그것도 나탈리 후작의 양아들이 되어 눈앞에 있는 걸까.
제이드가 씨익 웃으며 나탈리 후작의 곁에 와 앉았다.
“제가 껴도 되는 자리인지 모르겠군요.”
“찻잔을 하나 더 준비하겠습니다.”
내가 넋이 나간 사이 슈리가 눈치껏 새 찻잔을 가지러 자리를 비웠다.
나는 실례인 줄 알면서도 제이드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어떻게 얘가 여기에 있지? 아니, 그때 죽은 게 아니라고 쳐. 대체 무슨 수로 후작가에 입양된 거야?’
혼란 그 자체였다. 아키드 대신 심부름을 나갔다가 실종된 애를 이런 곳에서 마주칠 줄은 몰랐으니까.
그때 제이드가 제 뺨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대공자비님께서 보기에는 흉한 흉터죠?”
아무래도 내가 흉터 때문에 쳐다본다고 여긴 모양이었다. 내가 도리질하며 말했다.
“아뇨. 그런 거 아니에요. 이름이 익숙해서 쳐다봤어요.”
“예?”
“남편 친구 중에도 제이드가 있거든요.”
내 말에 제이드의 눈동자가 짐짓 커다래졌다. 정확히는 남편 친구라는 말에서였다.
‘맞네, 제이드.’
어쩐지 표정 관리가 잘되지 않았다. 제이드는 대답 대신 시선을 피한 채 말을 아꼈다.
물론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대답이 되었다. 내가 가까스로 미소를 유지할 때였다. 나탈리 후작이 제이드의 어깨를 매만지며 말했다.
“간혹 그런 일이 있곤 하죠.”
“아드님과는 어쩌다 만나셨나요?”
내가 관심을 보이자 후작이 말을 이었다.
“제이드를 처음 만난 곳은 13지구였어요. 마침 자선 행사차 들렀다가 제이드를 보고 한눈에 시선을 빼앗겼답니다.”
13지구라면 뒤로 구르고 앞으로 구른 후 봐도 그 제이드가 확실했다.
그런데 모른 척하는 걸 보면 그걸 후작에게 들키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나는 제이드를 넌지시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래서 가슴으로 낳은 자식이라고 하셨군요.”
“네. 신께서 제게 이 아이를 보내 주셨다고 여겼어요. 그 길로 아이를 데리고 성으로 돌아갔답니다.”
대충 내막은 이해가 되었다. 우연히 귀족의 눈에 들어 입양된 모양이다.
제이드에게는 운 좋은 일이었다. 그런 식으로 13지구에서 탈출할 수 있는 경우는 몹시 드물었으니까.
‘그래도 연락 정도는 해 주지.’
나는 괜스레 제이드를 원망스럽게 쳐다보았다. 아키드가 제이드의 일로 가슴앓이했던 걸 곁에서 지켜봤기에 더더욱 마음이 좋지 않았다.
‘이런 기분이었구나.’
문득 쉐리가 아키드에게 느꼈던 배신감의 이유를 조금 알 것도 같았다. 물론 그녀처럼 제이드를 비난할 생각은 없었다.
어쨌든 그에게도 아키드와 같은 사정이 있지 않았을까, 어림짐작할 뿐이었다.
잠시 후, 티타임을 마치자 제이드가 에스코트를 자청했다. 마침 그에게 묻고 싶은 게 있던 차라 선뜻 응했다.
서재로 향하던 중 제이드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가 대공자비님께 제 이야기를 할 줄은 몰랐습니다.”
누구라고 콕 집어 말하진 않았으나 나는 그게 아키드를 지칭하는 것임을 바로 알았다.
‘아키드가 대공자가 된 것도 이미 알고 있었구나.’
하긴 하델루스 대공의 사생아 일로 제국 전역이 떠들썩했다고 들었다. 수도에서 지내던 그라면 분명 건너건너 소식을 들었겠지.
“죽은 줄로만 알았어요. 마침 불법 약물 사건과 연루된 자의 심부름을 받다 사라져서 휘말린 줄로요.”
“아마 어머니를 만나지 않았다면 죽었겠죠.”
제이드가 씨익 미소 지으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듣자 하니 심부름 가던 길에 나탈리 후작과 마주친 모양이었다. 나는 지금은 그럴듯한 암흑 길드의 수장으로 자리 잡은 쉐리를 떠올리며 말문을 열었다.
“아키드 님 소식을 알고 있던 것 같은데 왜 연락하지 않으셨나요?”
제이드가 대답 대신 물끄러미 쳐다만 보자 나는 말을 이었다.
“설령 이곳이 멀어서였다면 수도에 있는 다른 친구들에게는 연락할 수 있었을 텐데.”
쉐리를 염두에 둔 말에 제이드가 피식 웃었다.
“글쎄요. 13지구를 떠나면서 다 버리고 온 인연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가 잠시 창밖을 응시하다 말을 덧붙였다.
“그 시절을 생각나게 하는 것들과는 가급적 멀리하고 싶었거든요.”
“왜요?”
“그런 곳에서 좋은 추억이 있을 리 없으니까요. 저는 지금이 좋습니다.”
나는 제이드의 말에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아무래도 그는 13지구에서의 인연을 모두 끊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의 표정에는 그리움보다는 불쾌감이 서려 있었다.
거리에서 떠돌던 시절로는 절대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듯이 앙다문 입술은 조금 고집스러워 보였다.
‘쉐리가 들으면 발끈하겠네.’
어쩌면 쉐리의 비난이 향했어야 할 존재는 아키드가 아니라 제이드였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내 후원으로 폭풍 성장해 암흑 길드인 ‘실드’의 수장이 된 쉐리가 이 사실을 알면 분노에 떨며 그를 암살하려 들지도 몰랐다.
‘나중에 두 사람이 재회하면 볼만하겠네.’
나는 제이드에 대한 일말의 안타까움마저 거둬 냈다. 그의 선택에 아키드가 없었다는 걸 확인한 탓이었다.
그나마 대공자가 된 아키드에게 빌붙지 않으려는 게 다행이었다. 만약 그랬다면 내 쪽에서 가만두지 않았겠지만.
어느새 서재 앞에 당도했다. 나는 걸음을 멈추어 그를 직시했다.
“그 말뜻은 13지구에서의 일을 후작님 앞에서 모른 척해 달라는 뜻인가요? 아키드 님과의 관계도 모두?”
내 물음에 제이드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부탁을 드리려고 에스코트를 자청했습니다.”
부질없는 인연이었다. 누군가는 인연을 잇고 싶어 비난이라는 화살을 쏘아 대는 반면, 또 누군가는 인연을 끊고 싶어 선을 긋는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서 상처받는 건 애꿎은 아키드였다. 나는 제이드의 팔에서 손을 떼어 내 그와의 거리를 벌리며 묵례했다.
“알겠습니다. 나탈리 소후작의 뜻은 잘 알아들었습니다.”
“…….”
“염려하시는 일은 없을 겁니다. 그에게도 잘 말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 마음이 변치 않으시길 바라요.”
만약 뒤늦게 아키드에게 무언가를 바란다면 내가 막을 테니까.
내가 뒷말을 숨기며 예의 바른 얼굴로 싱긋 미소 짓자 제이드가 고개를 주억거리다 말고 움찔했다. 그게 의아해 그의 시선을 따라 뒤를 돌아본 나도 덩달아 놀라고 말았다.
그곳에 아키드가 있었으니까.
아키드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 정확히는 제이드의 뺨을 물끄러미 응시한 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