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공가 시집살이 너무 쉬운데요 (112)화 (112/177)
  • #112.

    “이렇게 일찍 오실 줄 알았으면 파티를 미룰 걸 그랬어요. 분명 오후 일정이 있으시다고 하지 않았나요?”

    내 물음에 애프론 백작 부인이 손을 마주 잡은 채 대답했다.

    “미안합니다, 대공자비. 도무지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아서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올 수밖에 없었어요.”

    눈가가 퉁퉁 부은 걸 보니 밤새 운 모양이었다. 나는 가볍게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에요. 충분히 그러실 만해요. 그리고 안젤리카라면 걱정하지 마세요. 지금 파티에 참석해 손님들을 맞이하고 있거든요.”

    “아.”

    “시녀에게 안젤리카를 데려오라 했으니 곧 올 거예요.”

    나는 백작 부인이 은근히 주변을 힐끔거리는 걸 보고 눈치껏 대답했다. 그러자 그녀가 내 손을 덥석 붙들며 말했다.

    “고맙습니다. 대공 전하께 말씀 전해 들었어요. 우리 안젤리카를 제일 먼저 알아봐 주셨다고요. 정말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우연히 안젤리카를 찾는 전단지를 봐서요. 게다가 그 목걸이 뒤에 있던 인장은 애프론 가문의 것이기도 해서 혹시나 했을 뿐이에요.”

    “정말 감사합니다, 감사해요.”

    애프론 백작 부인이 눈물을 글썽이며 거듭 감사를 전할 때였다. 안젤리카를 데리러 갔던 한나가 혼자 들어왔다.

    “작은 마님.”

    “왜 혼자 와? 안젤리카는?”

    “그게…… 파티장에 가 보셔야 할 것 같아요.”

    한나가 백작 부인의 눈치를 살피다 귓속말했다.

    “브라운 영애가 소란을 피우고 있어요.”

    그 말을 듣자마자 무슨 상황이 벌어진 건지 짐작이 되었다.

    ‘내 이럴 줄 알았지.’

    어쩐지 늦게 올 때부터 불안불안하다 했는데 기어이 안젤리카를 괴롭힌 모양이었다.

    “부인, 잠시만 여기 계셔 주시겠어요? 파티에 문제가 생겨서요.”

    내가 그렇게 백작 부인에게 양해를 구하고 파티장으로 향했을 때는 리사가 막 안젤리카의 어깨를 툭툭, 건드리는 중이었다.

    “이제 보니 이것도 네 애인이 줬던 건가 봐. 잘난 애인이 있어서 그렇게 당당히 사표를 던진 거야? 누군지 퍽 궁금한데?”

    저급한 조롱과 함께 안젤리카의 목걸이를 빼앗은 리사를 본 나는 참지 못하고 성큼성큼 다가갔다.

    뒤이어 내게 목걸이를 빼앗긴 리사가 성질을 내다 나를 알아보고 멈칫했다.

    “대, 대공자비님.”

    “내 파티에서 이런 식의 행패는 좀 곤란한데. 그리고 난 남편만으로도 충분해서 다른 애인도 필요 없고.”

    “죄송합니다. 제 하녀가 허락도 없이 파티에 들어와서 혼을 내준다는 게.”

    “누가 그쪽 하녀라는 거야?”

    “네? 아, 여기 있는…….”

    리사가 막 안젤리카의 팔을 붙들어 앞세운 때였다. 내가 안젤리카에게 목걸이를 돌려주며 정중히 말했다.

    “애프론 영애, 자당께서 응접실에서 기다리고 있어요.”

    그 말을 들은 리사의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얘지는 건 꽤 볼만했다.

    “지, 지금 무어라고…….”

    리사가 혼란스러운 얼굴로 말을 채 잇지 못하고 나를 쳐다보았다. 안젤리카를 두고 애프론 영애라고 한 것에 몹시 놀란 표정이었다.

    “애, 애프론 영애는 실종된 지 오래라고 들었어요. 얼마 전엔 사망 신고도 했다고…….”

    “아, 사망 신고라면 어제 바로 취소 신청 넣었다고 하니 그쪽이 걱정할 일은 아니지.”

    내 반박에 리사가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눈빛이 흔들리는 게 이 모든 상황이 믿기지 않는 모양이었다.

    나는 그런 그녀를 무시한 채 안젤리카의 목에 목걸이를 걸어 주었다. 그러곤 그녀의 휑한 가슴께를 힐끗하며 질문했다.

    “안젤리카, 코르사주는 어디다 빼놓은 거야?”

    “모, 모, 모르겠어요. 아, 아까까진 이, 있었는데.”

    “불량이었나 보네. 미안, 내가 너무 늦었지?”

    내 사과에 안젤리카가 고개를 도리질하며 강하게 부정했다. 눈빛이 초롱초롱한 게 내가 도와주어 무척 감동한 모양이었다.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도닥인 후 리사에게 시선을 주었다.

    “대공자비님.”

    “그런데 못 보던 얼굴이군. 말을 하기 전에 본인이 누구인지부터 소개해야 하지 않나?”

    내 핀잔에 리사가 드레스 자락을 움켜쥐며 예를 갖추었다.

    “아. 저, 저는 브라운 가문의 리사 브라운이라고 합니다.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공자비님.”

    “아아, 그쪽이 브라운 영애로군.”

    내가 그제야 알아본 것처럼 알은체하자 리사의 얼굴에 화색이 돋았다.

    저를 알고 있었다는 것에 기분이 좋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어지는 내 말에 금세 빛을 잃었다.

    “안 그래도 안젤리카 양의 부탁을 받고 그쪽을 초대했던 건데…….”

    “네? 안젤리카가요?”

    리사는 그럴 리 없다는 듯이 안젤리카를 쳐다보았다. 본인도 그녀에게 못되게 군 걸 알기는 아는 모양이었다. 내가 리사를 위아래로 훑으며 말을 이었다.

    “이제 보니 안젤리카가 사람을 잘못 본 모양이야. 이렇게 무례한 사람도 친구인 줄 알고 초대했으니.”

    “…….”

    “영애는 크게 실수했어. 내 곁붙이로 온 사람에게 무례를 저질렀으니까.”

    “말더듬, 아, 아니, 안젤리카가 정말 대공자비님의 곁붙이라고요?”

    내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자 리사가 반박했다.

    “하, 하지만 그동안 해링턴 영애를 곁붙이로 두셨었잖아요.”

    “그 애가 요즘 바빠서 안젤리카에게 대신 부탁했을 뿐이네. 안젤리카는 내 소중한 친구이거든.”

    내가 안젤리카를 향해 찡긋 미소 짓자 그녀가 볼을 붉히며 고개를 수그렸다.

    어쩐지 위기에 빠진 공주님을 구한 멋진 기사님이 된 기분이었다.

    리사가 우물쭈물해하며 머리를 굴리는 게 눈에 훤했다. 내가 안젤리카에게 팔짱을 낀 채 말했다.

    “그나저나 안젤리카, 언제부터 우리가 애인 사이가 된 거야?”

    “저도 잘…….”

    “곤란하네. 내가 애인을 두었다는 소식을 들으면 아키가 무척 충격받을 텐데.”

    내가 눈썹까지 늘어뜨리며 중얼거리자 리사가 사색이 되어 입을 열었다.

    “대공자비님! 제 말 좀…….”

    “내 남편은 질투가 많아서 내게 애인이 있다는 소문만 나도 주모자를 찾아 죽이려 들걸?”

    내가 서글서글한 음성으로 중얼거리는 말에 리사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물론 아키드는 신사이기 때문에 절대 그럴 일이 없겠지만 리사는 그를 잘 모르지 않는가?

    나는 좀 더 겁을 줄 생각으로 말을 이었다.

    “원래 사람은 입으로 흥하고 입으로 망한다고 하지. 안타깝게 됐어, 브라운 영애.”

    “제, 제가 오해를 했어요!”

    나는 부채로 안젤리카의 드레스와 구두 등을 가리키며 말했다.

    “엄밀히 따지면 반은 맞고 반은 틀렸어. 네 말대로 이 옷도, 구두도, 목걸이를 빼고는 다 내가 친구인 안젤리카에게 선물한 거거든.”

    “그, 그러셨군요.”

    “한데 왜 있지도 않은 염문을 퍼트려서 내 심기를 건드리는 거야? 그것도 내 파티에서?”

    “아, 아아.”

    리사가 파르르 떨리는 손으로 입가를 가린 채 신음만 터트렸다. 본인이 생각하기에도 모든 상황이 저에게 불리하게 돌아감을 눈치챈 모양이었다.

    내가 리사에게 바짝 다가가 귓속말했다.

    “원래라면 파티에서 안젤리카의 신분을 밝히고 조용히 경고할 생각이었는데, 왜 스스로 망하는 길을 자초하는 건지.”

    그러고는 충격에 파르르 떠는 리사에게 눈웃음치며 말을 이었다. 다른 사람이 볼 때는 다정한 말이라도 속삭이는 것처럼 보이게끔.

    “난 내 사람을 건드리면 맨입으론 절대 용서 안 하는데.”

    “대, 대공자비님.”

    “브라운 영애는 뭘 내놓으실 수 있으려나. 내가 볼 땐 브라운 가문을 털면 먼지가 참 많이 나올 것 같은데 말이야.”

    히죽 웃으며 겁을 주니 리사가 왈칵 울음을 터트리며 대번에 무릎을 꿇었다.

    “죄, 죄송합니다! 대공자비님.”

    “맨입은 곤란하다고 분명히 말했는데 일부러 눈에 띄게 행동해서 날 더 곤란하게 할 셈이구나. 이러면 잘못만 더 추가되는데.”

    내가 너스레를 떨며 부채를 손바닥에 탁탁, 두드리자 리사가 흠칫 떨었다.

    도저히 나를 설득할 자신이 없는지 리사는 뒤늦게 안젤리카를 쳐다보았다.

    “안젤리카, 미안해. 나는 네가 애프론 가문의 딸인 줄도 모르고…….”

    안젤리카는 리사의 말을 다 듣지도 않고 고개를 돌렸다.

    표정이 이상해 혹시라도 용서해 주려는가 싶어 그러지 말라며 고개를 도리질하는데 안젤리카가 말했다.

    “애, 애, 애프론 영애라고 하, 하셔야죠.”

    하지만 괜한 걱정이었다. 안젤리카는 내가 시킨 대로 훌륭히 대처하고 있었다.

    물론 존댓말을 했다는 점에서 다소간의 아쉬움은 있었지만 안젤리카 나름대로 큰 용기를 낸 발언이었다.

    나는 흐뭇해진 얼굴로 안젤리카의 말을 냉큼 받았다.

    “좋아요. 친구를 봐서 기회를 주죠. 자, 브라운 영애. 애프론 영애께서 친히 교육을 해 주신다는데 왜 그러고 있어요? 어서 말해 봅시다. ‘애프론 영애, 자비를 베풀어 주세요’라고.”

    싱긋 미소로 마무리하니 리사가 울상을 지은 채 입을 열었다.

    “애, 애프론 영애, 자비를 베풀어 주세요.”

    “더 크게.”

    “애, 애프론 영애……!”

    리사가 얼굴이 새빨개진 채 안젤리카에게 용서를 구했다. 내가 곁에서 바람잡이 역할까지 톡톡히 하니 정신이 쏙 빠질 터였다.

    이후 파티가 개재된 뒤에도 리사는 줄곧 혼자였다. 오자마자 소란을 피워 귀족들이 그녀에게 다가가지 않는 탓이었다.

    결국 리사는 1부가 종료되자마자 몸이 아프다며 부리나케 사라졌다. 참으로 그녀다운 결말이었다.

    1부를 마친 후 안젤리카와 애프론 백작 부인의 감동적인 상봉이 이어졌다.

    “오, 안젤리카. 내 아가!”

    애프론 백작 부인은 감격에 겨워 체면도 생각하지 않고 안젤리카를 껴안았다.

    당황한 안젤리카는 우물쭈물해하면서도 그녀를 밀어내지 않았다. 오히려 눈물을 글썽이는 백작 부인에게 손수건을 건네는 용기까지 보였다.

    나는 두 사람만의 시간을 보내라는 의미로 조용히 응접실을 빠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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