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
[그 토파즈 목걸이는 태어난 딸아이를 위해 제 아내가 고르고 고른 보석이 확실합니다. 태어나기도 전에 엄선한 것이니까요.]
애프론 백작의 답신에는 잃어버린 딸을 찾았다는 감격이 가득했다.
잉크가 번진 곳이 있는 걸 보면 쓰면서도 눈물이 주체가 되지 않았던 모양이다.
하긴 너무 어릴 때 아이를 잃어버려 제대로 된 초상화조차 없었다고 했다. 그 탓에 아이를 찾는 게 더더욱 어려웠다고.
[마음 같아서는 곧장 달려가고 싶지만 바다 한복판에서 해상 훈련을 하고 있어 시일이 걸릴 듯합니다.
급한 대로 아내를 먼저 보낼 테니 안젤리카를 부디 잘 부탁합니다.]
하필 전령을 받은 곳이 바다 한가운데였던 모양이다.
‘백작이 기쁘긴 한가 보군. 평소엔 답신이 두 줄 이상 넘어간 적이 없었는데.’
데미안의 말까지 곱씹으니 좋은 일을 한 것 같아서 기분이 간질간질했다.
“안젤리카, 어제 내가 했던 말은 생각해 봤어?”
내 물음에 안젤리카가 우물쭈물하는가 싶더니 작게 말했다.
“자, 잘 모르겠어요. 저는 그동안 버, 버려졌다고 생각했는데.”
“어제도 말했지만 백작님과 백작 부인은 널 버린 게 아니라 잃어버리신 거야. 네가 살아 있어서 고맙다고 하셨어.”
“마, 만나면 실망하실지도 모, 몰라요. 이렇게 마, 말도 더듬고, 꾀죄죄하고…….”
“지금 네 모습이 꾀죄죄하다고? 이렇게 예쁜 드레스에 예쁜 목걸이를 하고 있으면서.”
내가 가볍게 핀잔하며 뺨을 간질이자 안젤리카가 아랫입술을 꼬물거리며 수줍어했다.
지금 그녀는 처음 하델루스 성에 왔을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멀끔한 모습이었다.
오늘 백작 부인이 파티에 오신다고 했기에 새벽부터 때 빼고 광낸 결과였다.
“저, 정말 실망 안 하실까요?”
“당연하지. 오히려 감격하셔서 모두가 보는 앞에서 우실지도 몰라.”
“어, 어어. 그, 그러면 안 되는데. 파티에선 우, 울면 안 된다고 했잖아요.”
안젤리카가 허둥지둥하자 내가 그녀에게 손수건 하나를 쥐여 주며 말했다.
“만약 부인께서 눈물을 흘리시려 하면 손수건을 드리면 돼. 잘할 수 있지?”
안젤리카가 고개를 끄덕이며 손수건을 야무지게 챙겼다. 나는 다시 한번 그녀의 어깨를 붙들어 용기를 주었다.
“안젤리카, 넌 충분히 사랑스러워. 말을 더듬는 건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아.”
“대, 대공자비님.”
“백작 부인이 오시면 내가 먼저 모시러 갈 거야. 몇 분 뒤에 내가 부르면 응접실로 오면 돼. 알겠지?”
“네, 네.”
안젤리카가 고개를 끄덕이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혼란스러워하더니 이제는 부모님을 만날 마음이 생긴 듯했다.
나보다 한두 살 어릴 뿐인데 이렇게 귀여울 수가 없었다. 때마침 파티의 손님들이 올 시간이었다.
내가 찾아오는 손님을 몇몇 맞이했을 즈음이었다. 한나가 내게 다가와 귓속말했다.
“작은 마님, 애프론 백작 부인께서 도착하셨답니다.”
나는 예정보다 이른 도착에 두 눈을 둥그렇게 뜨며 되물었다.
“벌써?”
* * *
한편 리사 브라운은 조금 늦게 파티에 참석하게 되었다. 정원에는 초대된 손님들이 서로 무리를 지어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리사는 웰컴티를 손에 쥔 채 파티 분위기를 탐색했다. 그러다 웰컴티로 나온 차 맛이 훌륭해 연신 감탄했다.
“세상에, 어쩜 웰컴티부터 이렇게 좋을 수가.”
자신이 이 모임에 브라운 가문을 대표해 참석했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감격스러웠다.
그녀는 제 검푸른 드레스를 만지작거리다 문득 목에 걸린 수수한 목걸이를 보며 아쉬운 숨을 토했다.
‘왜 하필 드레스 코드가 파란색으로 바뀌어선.’
본래는 붉은색이었는데 갑작스럽게 색이 바뀌었다. 그 탓에 서둘러 드레스를 다시 준비하느라 제대로 된 목걸이를 마련하지 못했다.
다른 가문이야 색깔별로 보석 목걸이가 마련되어 있어 문제가 없었겠지만 브라운 가문은 아니었다.
애초에 이 파티에 참석한 것부터가 행운이지 않았는가.
뱁새가 황새를 따라가면 가랑이가 찢어진다는데 지금의 리사가 딱 그 꼴이었다.
무리해서 새로 장만한 드레스인지라 도무지 보석까지 새로 살 여력이 없었다.
화려한 드레스에 비해 보잘것없는 목걸이가 내내 마음에 걸렸다.
‘그러고 보니 안젤리카 목걸이가 토파즈였지.’
토파즈라면 이 파티에 무척이나 어울렸을 텐데.
리사는 안젤리카의 목걸이가 떠올라 인상을 찌푸렸다. 그녀는 딱 한 번 안젤리카의 목걸이를 본 적이 있었다.
우연히 안젤리카의 방에서 발견한 낡은 보석함에는 난생처음 보는 최상급 토파즈 목걸이가 들어 있었다.
큼지막한 보석을 돋보이게 하려 세공까지 최소화해 수수하면서도 화려함이 돋보이던 아름다운 목걸이.
가난뱅이 안젤리카가 가지고 있기에는 과분한 물건이라 저에게 팔라고 했더니 경기를 일으켰었다.
힘으로 빼앗으려 하자 저를 물기까지 해 지하 감옥에 가두고 혼쭐을 내기도 했다.
그럼에도 절대 주려고 하지 않았고 아예 숨겨 버리기까지 해서 포기했었는데 ‘청색’을 주제로 한 모임이라 그런지 더더욱 아쉬움이 남았다.
이 드레스에 그 목걸이를 착용했다면 정말 잘 어울렸을 텐데, 하고.
‘그러고 보니 이번엔 꽤 오래 버티고 안 돌아오네.’
어차피 추천장 없이는 아무 데도 못 갈 텐데 이상한 일이었다. 당장에 돌아와 무릎 꿇고 빌 줄 알았던 안젤리카에게선 내내 소식이 없었다.
그래도 손이 야무져서 머리 관리를 맡기기에 좋았던 차라 괜히 아쉬워졌다.
‘흠, 원래는 아예 안 받아 주려 했는데 돌아오고 싶다고 하면 목걸이를 달라고 해 볼까. 어차피 안젤리카한테는 안 어울리던 거니까.’
리사가 그런 시답지 않은 생각을 하며 초대된 인원을 빙 둘러보고 있을 때였다.
유독 눈에 띄는 얼굴을 발견하고 두 눈을 홉떴다. 처음엔 잘못 본 줄 알았는데 분명 안젤리카였다.
‘쟤가 왜 여기 있어?’
리사는 안젤리카를 발견하자마자 제 눈을 의심했다. 여기에 있어서는 안 되는 인물이라 더더욱.
‘저거 말리카노 의상실 신상 드레스인데? 대체 무슨 수로?’
리사는 안젤리카의 드레스를 단박에 알아보며 입을 헤벌렸다.
가난뱅이 안젤리카는 절대 살 수 없는 고가의 물건이었다. 혹시 사람을 잘못 본 건가 싶어 눈을 비비던 중 목에 걸린 토파즈 목걸이를 발견했다.
‘안젤리카 맞네!’
그때 리사와 안젤리카의 시선이 마주쳤다. 안젤리카의 눈이 커다래지는가 싶더니 돌연 그녀의 눈길을 피했다.
그제야 제가 알던 말더듬이 안젤리카 같아서 리사가 우쭐한 표정으로 다가갔다.
“이런 곳에서 널 만날 줄은 몰랐는데. 여긴 어쩐 일이야? 그 복장은 뭐고.”
쏟아지는 질문에 안젤리카가 대꾸하지 않고 리사를 응시했다.
‘안젤리카, 우선 백작 부인을 만나 뵙고 올 테니까, 여기서 잠시만 손님맞이 하고 있어. 이따 부르면 응접실로 곧장 오고.’
‘아 참, 혹시 리사 브라운이 도착하면 그냥 무시해. 가급적이면 대화하지 말고.’
안젤리카가 로에나가 당부했던 말을 떠올리며 뒤돌아 자리를 피하려 했다. 하지만 빈정이 상한 리사가 손목을 붙들어 막았다.
“뭐야. 이젠 아는 척도 안 하는 거니? 여긴 어떻게 왔냐고 묻잖아.”
“…….”
“주제에 어울리지도 않는 드레스는 뭔데. 설마 귀족댁 정부로라도 들어간 거니?”
“이, 이거 놓으세요. 저, 저는 대공자비님의 겨, 곁붙이로…….”
“풉!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해? 곁붙이라는 걸 증명하는 코르사주도 없잖아.”
리사가 부채로 안젤리카의 가슴께를 툭, 건들며 비아냥거렸다.
안젤리카가 당황해 코르사주의 행방을 찾아 바닥을 살폈다. 아까부터 아슬아슬하다 싶었는데 돌아다니며 떨어진 모양이었다.
사색이 된 안젤리카와는 달리 리사의 얼굴엔 즐거움이 가득했다.
“응? 말해 봐. 여긴 어떻게 왔냐니까?”
리사의 목소리에 힘이 실리자 시선이 모이기 시작했다.
안젤리카는 사람들의 시선이 모이는 게 무서우면서도 파티의 분위기가 깨지도록 둘 수 없어 제법 목소리에 힘을 주어 리사를 만류했다.
“모, 목소리 나, 낮추세요.”
“지금 나한테 명령하는 거야?”
하지만 그게 오히려 리사를 자극한 꼴이었다. 리사가 얼굴을 와락 구기는가 싶더니 안젤리카의 어깨를 툭툭, 밀쳐 댔다.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라고 했어. 네가 그런 옷을 입는다고 귀족이 된다니? 여긴 대체 어떻게 들어온 건지 모르겠네.”
“하, 함부로 말하지 마세요. 저, 저는 이제 브라운 영애의 하녀도 아, 아니잖아요.”
“너 지금 나보고 브라운 영애라고 한 거야? 정말 머리가 어떻게 됐구나, 너?”
리사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지면서 돌연 안젤리카의 목걸이를 잡아챘다.
“이제 보니 이것도 네 애인이 줬던 건가 봐. 잘난 애인이 있어서 그렇게 당당히 사표를 던진 거야? 누군지 퍽 궁금한데?”
리사가 목걸이를 제 손에 감아 이죽거렸다.
“이, 이리 주세요!”
안젤리카가 리사에게 달려들며 목걸이를 빼앗으려 했지만 손에 닿지 않았다. 제대로 못 먹고 자라 안젤리카의 키가 무척 작은 탓이었다.
반면 잘 먹고 잘 자란 리사는 키가 제법 큰 편이었다.
주변의 쑥덕거림이 거세지자 안젤리카의 얼굴이 화끈화끈해졌다.
대화하지 말고 피하라는 로에나의 말도 제대로 지키지 못하고 이렇게 당하는 제가 한심했다.
이래선 곁붙이로서 제 몫의 반도 못 해낼 것만 같아 막 울음보가 터지기 직전이었다.
“지금 그쪽이 말한 애인이 나인가?”
냉랭한 음성과 함께 리사의 손에 있던 목걸이를 누군가 채 갔다.
“누구야?!”
리사가 얼굴을 와락 구기며 뒤를 돌다 말고 한껏 당황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대, 대공자비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