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
“푸른 눈동자에 뺨엔 주근깨가 있다고 쓰여 있는데, 안젤리카도 마침 눈이 푸른색이에요. 주근깨야 얼굴이 타서 잘 보이지 않을 뿐 자세히 보면 남아 있어요.”
어차피 상대를 알고 끼워 맞추는 건 일도 아니었다.
이미 안젤리카가 애프론 백작의 잃어버린 딸인 걸 알기에 내 설명엔 거침이 없었다. 데미안이 놀랍다는 듯이 되물었다.
“그 하녀가 푸른 눈이었나? 하도 숙이고 다녀서 눈 색은 본 적도 없군.”
“푸른색 맞아요. 제 앞에선 고개 안 숙이거든요.”
“그렇군.”
데미안이 흥미를 보이며 내 이야기를 들었다. 성장한 것을 감안하더라도 얼추 맞는 게 다섯 개는 족히 되었다.
미리 만반의 준비를 했던 나로서는 목걸이의 존재가 고마울 따름이었다.
잠시 후 대공이 기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정도라면 애프론 백작가를 움직이게 할 수도 있겠어.”
당장에라도 애프론 가문에 연락을 취할 듯이 구는 대공을 보며 내가 그의 손목을 붙들었다.
“아버님, 사업 한두 번 해 보시나요?”
“딸 찾기와 사업이 무슨 관련이 있다는 거지?”
데미안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반문했다.
하, 정말 뭘 모르시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친히 대공에게 한 수 알려 주기로 했다.
“아래 보상에 관해 읽어 보세요.”
데미안이 내가 가리킨 하단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걸 읽던 중 그가 아랫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새아가, 넌 정말…….”
뒤이어 손으로 입을 틀어막는가 싶더니 눈빛이 마구 흔들렸다.
감동을 한 건지, 소름이 돋은 건지 모를 표정이었다. 나는 히죽 웃으며 아래 하단을 천천히 읽었다.
“안젤리카 애프론을 찾아내는 사람에게는 장차 애프론 가문의 부군이 될 기회를 준다. 단, 기혼자일 경우…….”
나는 슬쩍 대공의 눈치를 살피다 말을 마쳤다.
“애프론 가문의 비법 하나를 전수해 준다.”
“…….”
“그 비법이란 거에 해상 마법도 있다는 건 아버님께서 저보다 더 잘 아시리라 믿어요.”
그리고 이번에 데미안이 무지막지한 수수료 인상으로 골머리를 썩인 것도 해상 마법 중 하나였다.
내 의도를 알아챈 데미안이 헛웃음을 내뱉었다.
잠시 후 그가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손뼉을 치기 시작했다.
“하하하. 이걸 타고났다고 해야 할지, 운이 좋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군. 딱 하나 확실한 건 네가 대공가에 무척이나 도움이 된다는 거다.”
“치, 언제는 골칫거리 취급하셨으면서.”
“정말 언제 적 고리타분한 이야기를 하는지 모르겠구나. 장난으로라도 그딴 소리는 하지 말아라.”
데미안이 짐짓 엄한 표정을 짓다 도로 표정을 녹이며 종이를 움켜쥐었다.
거듭 보상 내용을 읽는 그의 입꼬리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아 있었다.
“그간 마물 토벌하느라 고생하셨는데 저라도 도움이 되어 기뻐요.”
겸손하게 말하자 데미안이 고개를 내저었다.
“고생이랄 것도 없다. 그나저나 이거라면 그 노망난 애프론 백작도 꼼짝없이 승복하겠어.”
데미안은 벌써부터 해상 마법권을 얻은 것처럼 자신만만해했다. 그가 내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이번 협상이 만족스럽게 체결되면 네게 수수료를 지불하도록 하지.”
“그것보다 지난번 아키드 님이 전투에서 활약한 영상을 주세요. 보여 주시기만 하고 주진 않으셨잖아요.”
나는 대공이 내내 품에 넣고 주지 않던 영상을 달라 슬쩍 운을 떼었다. 솔직히 돈보다 그게 더 내겐 가치 있는 것이었다. 그러자 그가 호탕하게 말했다.
“수수료보다 아키드 영상에 더 목숨 거는 사람은 너뿐일 거다.”
“돈이야 또 벌면 되지만 영상은 하나뿐이잖아요.”
“명언이군.”
대공이 흡족해하며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영상석을 꺼내 내밀었다. 나는 소중하게 레티큘에 영상석을 넣었다.
“만족스러운 거래였습니다, 아버님.”
“이젠 마주 앉아 사업을 논해도 될 정도로구나. 언제 이렇게 컸지?”
그는 아련한 표정으로 내 머리까지 쓰다듬었다. 나는 어쩐지 우쭐해져 호기롭게 말했다.
“에이, 아버님이 제 사업에 꼽사리를 끼시려는 게 아니고요?”
“투자라고 해 다오. 그나저나 이런 기특한 일을 해 주니 맘 같아선 뽀뽀라도 해 주고 싶은 심정이군.”
“아뇨. 그건 별로 좋은 생각은 아닌 거 같아요.”
내가 얼굴을 뒤로 빼며 질색하자 데미안이 입술을 비뚜름히 하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하지 말라면 더 하고 싶어지는데.”
그러곤 당장에 뽀뽀할 기세로 다가왔다. 장난인 줄 알면서도 기겁하며 물러나려는 때였다.
나와 데미안 사이로 큼직한 손이 끼어들었다. 졸지에 그 손바닥에 입을 맞춘 데미안이 불쾌한 표정으로 불청객을 쳐다보았다.
“네 아내라고 손도 못 대게 하는 거냐.”
뒤를 도니 아키드가 무표정한 얼굴로 대공을 보고 있었다. 아키드가 나를 데미안과 멀찍이 떨어뜨리며 말했다.
“로에나가 싫어하는 짓 하지 마시죠.”
“어차피 시늉만 할 생각이었다. 네가 괜히 끼어드는 바람에 입술만 버렸구나.”
데미안이 입술을 벅벅 문지르며 한 소리 하자 아키드가 반박했다.
“애먼 일을 당한 건 제 손바닥입니다. 어서 제 손바닥에게 사과하십시오.”
“허어?”
데미안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아키드는 진심이라는 듯이 손바닥을 내밀었다.
“서러워서 살 수가 없군. 독수공방하는 아비에게 매정하구나.”
“스스로 자초하신 일입니다. 어머니께서 또 화가 잔뜩 나셨던데요.”
“…….”
“이번에도 에셀 공작의 편지를 불태우셨다고.”
“실수라니까.”
대공이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며 고개를 돌려 버렸다.
‘실수는 무슨…….’
나는 대공이 엘레나와 에셀 공작 사이를 질투한다는 걸 알고 있기에 콧방귀가 절로 나왔다.
“그래도 애인을 들이시지 않은 건 다행입니다. 그랬다간 어머니께서 아버지께 무슨 짓을 저질렀을지 모르니.”
“그냥 귀찮아서 그런 거다. 이제 연애에는 이골이 났어.”
“외롭다고 하신 것과는 상반된 말씀입니다만.”
아키드의 꼬집는 말에 데미안은 도끼눈을 하면서도 반박하지 않았다.
아키드의 말대로 대공은 로르크 영애와 헤어진 이후론 제대로 된 애인을 들이지 않고 있었다.
모두 그가 변덕을 부린다고 여겼지만 나는 그게 엘레나 때문이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특히 후계자가 생겼으니 더는 애인이 필요 없다는 것도, 질투 많은 로르크 영애를 그간 방패막이로 사용해 왔다는 것도 전부 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아키드에게 양해를 구하곤 대공에게 말했다.
“아버님, 귀 좀.”
다가오란 손짓에 대공이 내 입가에 귀를 대었다. 나는 작은 목소리로 종알거렸다.
“언제까지 어머님께 어리광을 부리실 생각이세요? 그러다 정말로 미움받으실지도 몰라요.”
“네가 상관할 바가…….”
“후계자가 생겼으니 이제 더는 거짓 애인 놀이도 하실 필요 없으시면서. 자꾸 삐뚤게 굴지 마세요.”
“……!”
데미안이 화들짝 놀라며 나를 쳐다보았다. 네가 그걸 어떻게 아느냐는 표정이었다.
‘어떻게 알긴요. 아버님 얼굴에 어머님이 좋아 죽겠다고 다 쓰여 있어요.’
그가 에셀 공작과 엘레나 사이를 방해하는 것만 봐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본인과 엘레나만 인정하지 않는 연애였다.
요 몇 년간 두 사람의 분위기가 놀랍도록 부드러워진 건 사실이니까.
늘 티격태격하며 서로를 물어뜯기를 주저하지 않지만 남이 상대를 공격하면 불처럼 화내며 나서는 이상한 관계.
물론 그동안 내가 둘 사이를 중재하지 않았다면 원작처럼 파탄이 났을지도 몰랐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어쨌든 두 사람의 사이가 처음처럼 냉랭하지 않다는 건 대공가 사람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
내 노력의 산물이 빛을 발하기 직전이니 이쯤에서 내가 좀 나서 주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나는 넋이 빠진 데미안을 뒤로하며 아키드에게 갔다. 그러곤 꾸벅 고개를 숙였다.
“제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환영해요. 물론 대가는 영상석 하나로는 곤란한 거 아시죠?”
내가 배시시 웃으며 농담을 건네자 대공이 허탈한 웃음을 머금으며 말했다.
“어쩌다 알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네 도움은 필요 없다.”
“단정하시면 안 되는데요.”
“내가 알아서 해. 그러니 넌 비밀이나 지키거라.”
대공은 절대 말하지 말라는 듯이 조개처럼 입을 다무는 시늉을 했다. 나는 그런 대공에게 농담조로 말했다.
“저도 아버님을 닮았는지 하지 말라면 더 하고 싶어지는데요.”
사실은 말할 생각이 없다는 걸 표정에 드러낸 채로.
“어쨌든 백작님께 얼른 오시라고 해 주세요.”
“그러지.”
* * *
파티 당일 아침. 나는 곁붙이로 참석한 안젤리카의 옷매무새를 살피며 말했다.
“이 코르사주가 네가 오늘 내 곁붙이라는 걸 증명하는 거니 빼먹지 말고 잘 챙겨야 해.”
“네, 네. 꼬, 꽃이 너무 예뻐요.”
안젤리카가 코르사주를 만지작거리며 배시시 미소 지었다.
나는 그녀의 목에 걸린 토파즈 목걸이를 가만히 응시했다.
목걸이를 보자 어제 도착한 애프론 백작의 서신이 자연히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