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공가 시집살이 너무 쉬운데요 (109)화 (109/177)
  • #109.

    “아, 아니에요! 괘, 괜찮은데……!”

    “걱정하지 마. 널 걸고 들어갈 생각은 아니니까.”

    어차피 곧 꽃축제 겸 손님을 초대할 참이었다. 추첨 인원 중에 한 명을 더 추가하는 건 내게 일도 아니었다.

    게다가 애프론 백작이 조금 나중에 온다고 했으니, 그전에 안젤리카를 괴롭힌 가문을 북부에서 얼굴 못 들고 다니게 손을 봐 주는 편이 좋았다.

    괜히 다 같은 북부로 싸잡혀 욕을 먹고 싶지 않았다. 애초에 하델루스 가문은 약자를 힘으로 눌러 괴롭히는 자를 혐오했다.

    물론 함부로 건들면 무는 데 주저하진 않지만.

    그 건드는 기준이 남들보다 역치가 낮기는 했지만 어쨌든 먼저 때리는 집안은 아니었다.

    ‘솔직히 그렇게 구박데기로 자랄 만큼 일이 서툴지도 않은데.’

    솔직히 말하면 메이벨보다도 더 적성에 맞는 것 같았다. 메이벨은 간혹 시녀가 아니라 아가씨처럼 굴 때가 많으니까.

    내가 안젤리카의 입가에 묻은 꼬끄를 닦아 주며 배시시 웃었다.

    “언니 믿지?”

    “네, 네?”

    “이번 파티 때 내 임시 시녀로 있으렴.”

    “하, 하지만 저는 시녀가 아니라 하녀인데…….”

    “안 그래도 메이벨이 조금 늦을 거 같다고 연락이 와서 말이야.”

    축제 전에는 성에 온다더니 갑자기 못 오겠다는 연락을 어제 받았다.

    원래라면 슈리나 비비안에게 부탁하려 했지만 안젤리카의 기를 세워 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일단 어울리는 드레스부터 골라야겠다. 지금 그 옷으로는 조금 곤란하니까.”

    * * *

    브라운 남작가의 외동딸인 리사는 초대장을 받고 잔뜩 들떠 있었다.

    [귀하를 델루스 정원에 초대합니다.]

    아름다운 필체는 평소 선망하던 하델루스 대공자비를 닮아 화려했다.

    리사가 초대장을 거듭 읽으며 황홀에 찬 표정을 지었다.

    “내가 대공자비님이 주최하는 티 파티에 초대되다니!”

    리사는 다시 읽어도 꿈만 같아 몸을 부르르 떨었다.

    매년 그 파티에 한번 가 보려고 그렇게 노력했지만 초대장의 끄트머리도 볼 수 없었다.

    초대되는 조건이 너무 까다로울뿐더러 추첨제로 바뀐 뒤로는 번번이 실패한 탓이었다.

    아쉬운 대로 멀찌감치서나마 바라보며 대공자비를 따라 하던 게 여러 해였다.

    “올해는 포기하고 추첨 카드를 하나만 샀는데 당첨되다니!”

    리사는 자신의 운발이 믿기지 않았다. 아무래도 그 불길하고 재수 없는 안젤리카를 내친 게 복을 불러오는 것 같았다.

    그녀는 말더듬이 안젤리카를 떠올리며 입술을 비뚜름히 올렸다.

    “제까짓 게 추천장도 없이 어디 가서 밥이나 빌어먹겠냐고.”

    그간 끈질기게 괴롭혀도 진드기처럼 붙어 있더니 며칠 전 돌연 사표를 던졌다. 그것도 막말과 함께.

    ‘예, 예전부터 리사 님의 그 머리 스타일은 벼, 별로라고 생각했어요!’

    ‘무, 뭐?’

    ‘그, 그, 그런다고 아, 아가씨께서 대공자비님이 되, 되시는 건 아, 아니자나욧!’

    ‘야! 너 지금 말 다 했어?!’

    평소엔 땅만 보고 살던 겁쟁이가 갑자기 들이받았을 때는 열이 뻗쳐서 잠도 안 왔다.

    해서 그날 바로 내쫓아 버렸다. 갈 곳도 없을 게 뻔한 줄 알면서도. 리사가 콧노래를 불렀다.

    “지금쯤이면 아무 곳에도 이직하지 못해 울고 있겠지. 한 일주일 예상한다.”

    아니. 일주일도 안 돼서 울며불며 다시 받아 달라고 사정할 게 뻔했다.

    자기 주제도 모르고 입을 놀린 대가로 굶어 죽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절대 안 받아 줘야지. 감히 내게 훈수를 두다니. 두드려 패서 내보내지 않은 걸 감사하라고.”

    리사가 콧방귀를 뀌며 제 머리카락을 빗질했다. 오늘따라 적갈색 머리의 붉은빛이 더더욱 탐스럽게 보였다.

    그게 꼭 선망해 마지않는 로에나 하델루스 같아서 리사는 빙긋 미소 지었다.

    * * *

    파티를 앞두고 안젤리카는 로에나가 선물한 드레스를 입어 보며 연신 볼을 붉혔다.

    “너, 너무 예뻐요.”

    짙고 푸른 빛깔의 드레스는 깊은 바다색을 닮아 우아하고 고풍스러운 느낌을 풍겼다. 안젤리카의 푸른 눈에 무척이나 잘 어울리는 색이었다.

    “너무 잘 어울린다, 안젤리카.”

    한나가 거울 속 그녀를 보며 씨익 웃었다. 안젤리카는 이 모든 게 꿈만 같았다.

    그냥 하녀로서 참석하는 게 아니라 대공자비의 임시 곁붙이로서 참석하게 되다니.

    그렇다는 건 대공자비에 준하는 대우를 받으며 파티에 참석한다는 뜻이었다.

    출신 모를 고아인 저를 이렇게 사람대접해 주는 주인이 생겼다는 게 감격스러웠다. 해서 더더욱 잘 해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때 한나가 요리조리 살피며 말했다.

    “흐음, 그런데 목이 좀 허전하네. 잠시만 기다릴래? 로에나 님의 장신구 중에서 드레스에 어울릴 만한 걸 가져올게.”

    “아, 아뇨! 자, 잠시만요!”

    안젤리카가 나가려는 한나의 소매를 붙들었다. 그녀가 먼저 누군가를 붙든 적은 처음이라 한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잠시 후 안젤리카가 고개를 푹 숙인 채 말했다.

    “저, 저한테도 모, 목걸이가 있어서요.”

    “그러니?”

    “네, 네. 어릴 때부터 가, 가지고 있던 거예요. 배고파도 저, 절대 안 파, 팔았어요.”

    안젤리카가 가까스로 말을 마치며 서랍으로 갔다. 낡은 보석함을 꺼내 오니 한나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안젤리카, 사연 있는 목걸이라는 건 알겠지만 이 드레스에 가짜 보석은…….”

    하지만 보석함의 뚜껑이 열리는 순간, 한나는 그 목걸이가 가짜가 아니라는 걸 단번에 알아챘다.

    특히 가운데 박힌 토파즈는 바다의 색을 닮아 푸른빛을 띠고 있었다.

    세공법이 다소 투박하지만 보석이 화려해 그런 것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한나가 목걸이를 꺼내 살피다 뒤에 작게 그려진 문양을 보고 놀라 되물었다.

    “안젤리카, 이게 정말 네 거라고?”

    목걸이 후면에는 닻 형상의 인장이 그려져 있었다. ‘Dear. Angelica’라는 문장과 함께.

    * * *

    나는 한나에게 안젤리카의 목걸이에 관해 듣고는 곧장 대공을 찾아갔다.

    안 그래도 안젤리카가 애프론 가문의 여식인 걸 어떻게 밝힐까 고민하던 중에 적절한 증표인 탓이었다.

    닻 모양의 인장은 바다를 수호하는 애프론 가문의 상징이었다.

    “이게 그 음침하게 돌아다니던 하녀의 물건이라고?”

    데미안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목걸이를 응시했다. 내가 목걸이 후면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닻 모양, 애프론 가문이 약식으로 사용하는 인장 아닌가요? 게다가 안젤리카의 이름까지 적혀 있어요.”

    “흐음.”

    데미안은 목걸이 후면을 돋보기로 살피며 뜸을 들였다. 나는 그 옆에서 바람잡이 역할을 톡톡히 했다.

    “듣자 하니 애프론 백작님은 오래전 딸을 잃어버렸다고 들었어요.”

    “정확히는 죽었지. 정적의 싸움에 휘말려서.”

    “하지만 시체가 나온 것도 아니잖아요.”

    “그래. 그것 때문에 애프론 백작이 미친 사람처럼 몇 년을 떠돌며 제 딸을 찾아다녔지만 찾지 못했지.”

    대공이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그의 곁에 바짝 붙어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안젤리카가 그 잃어버린 딸이 분명해요.”

    “그 목걸이가 그 애의 물건이라고 어떻게 확신하지? 훔친 것일 수도 있잖나.”

    “어릴 때부터 지닌 거라고 했어요. 엄청 소중하게요.”

    “도둑이 제 거 아니라고 하는 경우도 있느냐?”

    나는 방어적으로 나오는 데미안을 뚱하게 바라보았다. 물론 그의 태도를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정확하지 않은 일로 애프론 백작에게 딸을 찾았다고 말할 수는 없을 테니까.

    이미 오랜 시간 딸이라며 찾아온 이들이 숱하게 많았겠지. 그때마다 설렜다가 실망하고 좌절하기를 반복했을 거고.

    며칠 전 애프론 백작은 딸의 실종 신고를 사망 신고로 바꾸었다고 했다.

    그건 더는 딸의 생사를 수소문하지 않겠다는 말과도 같았다.

    마음으로 딸의 죽음을 인정한 상태인 그를 목걸이 하나로 설득하는 건 쉽지 않으리라.

    “네 촉을 믿지 않는 건 아니다만, 다른 증거가 더 있는 게 아니라면 이것만으로 애프론 백작에게 알리기엔 부족하군.”

    결국 그럴듯한 증거를 더 가져오라는 말이었다. 나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종이 한 장을 꺼내 테이블에 올려 두었다.

    “제가 설마 목걸이 하나만 가지고 그랬을까요?”

    오래전 애프론 백작이 실종된 딸을 찾는다며 뿌렸던 애프론 영애에 대한 인적 사항이 적힌 전단지였다.

    대공이 종이의 내용을 살피며 물었다.

    “이건 어디서 찾아낸 거냐.”

    “아키드 님께 부탁했어요.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이것 보세요. 마침 이름이 같아요. 안젤리카 애프론.”

    “안젤리카라는 이름이 좀 흔해야지. 설마 이걸 증거라고 가져온 건 아니겠지?”

    데미안이 다른 증거를 대라는 듯이 등받이에 몸을 누이며 시큰둥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하나하나 인적 사항을 체크했다.

    “그리고 지난번에 한나가 안젤리카의 드레스를 입혀 주면서 옆구리에 하트 모양의 몽고점이 있는 걸 발견했다고 했어요. 여기 반점이 있다는 말이 있고요.”

    “흐음.”

    그제야 데미안이 관심을 보이며 상체를 들어 종이를 살피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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