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
메이벨은 마차가 완전히 멀어지는 걸 확인하고 나서 곧장 자리를 떴다.
혼자가 되자마자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짓씹으며 중얼거렸다.
“어떻게 살아 있지?”
분명 티미에게 직접 오염을 옮겼었다. 알리바이가 겹치지 않도록 시간을 두고 퍼지도록 조작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치사량을 주입했으니 반나절도 못 가 죽으리라 확신하고 암막용으로 퍼트린 오염을 수습하는 데에 집중했었다.
어차피 그만한 오염을 없앨 수 있는 사제도 없다는 계산속에서 나온 계획이었다.
한데 티미가 살아 있는 것으로도 모자라 대공 성에서 일하게 되었다니!
메이벨은 자초지종을 알아봐야 할 것 같아 티미와 잘 어울리던 사제를 찾아갔다.
“응? 아아, 쓰러진 티미를 대공자비님께서 발견해 의사에게 데려갔다네요. 과로라고 했나.”
“대공자비님이 의사에게 데려갔다고요?”
“네, 확실해요. 티미가 대공자비님 칭찬을 얼마나 늘어놓던지. 그러고 보면 그 아인 운도 좋아요. 대공자비님의 눈에 들고 말이에요. 부러운 자식.”
사제는 부러움이 가득한 얼굴로 대답한 후 할 일이 있다며 가 버렸다. 메이벨은 그의 말을 듣고 더더욱 혼란스러웠다.
분명 만지기만 해도 치명적이었을 텐데, 방금 본 로에나는 멀쩡하지 않았던가.
메이벨은 어차피 죽을 날이 정해진 로에나가 자꾸 제 일을 방해하는 게 몹시 불만이었다.
게다가 무슨 조화를 부려 티미를 살려낸 건지도 몰라 애가 탔다.
“말이 안 되잖아.”
사사건건 로에나 때문에 일이 틀어지는 기분이었다. 대공과의 관계도, 티미를 죽이는 것도 전부 다.
부글부글 끓는 속을 감당하지 못한 메이벨은 검은 새를 소환했다.
흑마법으로 계약한 사역마는 그녀의 피를 매개로 움직이는 전령새이자 사냥매였다.
오래전 나탈리 후작에게 뜻을 전한 것도 바로 이 마수였다.
“가서 전해. 그때 말한 그 일, 하겠다고.”
메이벨의 명령에 검은 새가 까악, 울며 빠른 속도로 사라졌다.
메이벨은 이 지긋지긋한 북부가 점점 더 싫어졌다.
* * *
제로니스와 캐서린이 수도로 돌아간 후 꽃축제 시즌이 돌아왔다.
나는 이맘때 열리는 꽃축제를 가장 좋아했다. 그 이유는 씨앗 풍등의 수요가 급증해 주머니가 두둑해지는 탓이었다.
“후후후, 이제부터 시작이다.”
나는 금고에 쌓인 금괴를 보며 히죽 웃었다. 올해는 드디어 빚 없이 시작하는 첫해였다.
내가 빙의하기 전 로에나의 씀씀이가 너무도 커 이제야 빚을 모두 청산한 것이다.
물론 엘레나가 내 품위 유지를 생각해 적은 이자와 분할 원금 환수를 해 주어 그간의 생활이 궁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 덕에 여윳돈이 생겨 코비슈타인과 다양한 덕질 아티팩트를 만들 수 있었다.
그렇게 만든 아티팩트가 돈을 불러오니 돈이 모이지 않으려야 않을 수가 없었다.
나는 곧장 서재로 향했다. 서재에는 이미 비비안과 슈리, 한나가 보고서를 들고 대기 중이었다.
“또 금고에 다녀오셨어요?”
한나가 못 말린다는 표정으로 말을 걸자 비비안이 말했다.
“하긴 저라도 매일 금고를 보며 웃을 거 같아요. 쓰는 것보다 버는 게 더 빠른 삶은 어떤 기분이신가요?”
비아냥처럼 들리지만 실은 자랑스러워하는 투였다. 내가 입술을 샐쭉이자 슈리가 소파로 안내했다.
“안 그래도 기쁜 소식이 또 있어요. 여기 앉으세요, 작은 마님.”
세 사람의 극진한 보살핌은 시간이 지나도 여전했다.
이젠 저 셋이 없으면 어떻게 지냈을까, 싶을 정도로 내게도 익숙한 일이었다.
내가 자리에 앉자 한나가 보고서를 내밀었다.
“벌써 완판되었대요. 오픈 전부터도 줄이 엄청나게 길었다고.”
“그야 한정 수량으로 제공한 거니까.”
나는 예상한 일이라 절로 입꼬리가 올라갔다.
실은 꽃축제를 좋아하는 이유는 씨앗 풍등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 밖에도 내가 시작한 사업이 하나 더 있었다.
‘장난 삼아 시작한 페트라가 하나의 사업 아이템이 될 줄은 몰랐지.’
나는 처음 페트라를 보석으로 만들었던 적을 떠올리며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페트라 때의 성공을 기반으로 돈을 벌 만한 기발한 컬렉션을 시도했다.
아예 시즌별로 놀이를 선정해 놀이 도구를 판매하는 게 어떨까, 하고.
가볍게 시작한 사업의 결과가 내 예상보다 훨씬 뛰어넘었을 때, 내가 실은 금손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어떻게 하는 것마다 이렇게 잘되지? 행운의 손가락이라도 되는 걸까?
여하튼 페트라로 명명한 공기를 시작으로 땅따먹기, 팽이 돌리기, 딱지치기 등등이 줄줄이 히트 치며 아예 하델루스의 대표 브랜드로 자리 잡았다.
몸으로 할 수 있는 놀이를 기반으로 한 기념품은 매해 인기 상품이었다. 애초에 전략을 잘 짠 덕이었다.
놀거리가 부족한 귀족 영애, 영식들에게 재밋거리를 주면서도 소장 욕구를 불러일으키는 사업이었으니까.
내가 주관하는 모임에 초대된 사람에게 선물로 제공하면 뒤이어 유행을 타 불티나게 팔렸다.
시너지를 얻기 위한 고도의 홍보 전략이었다. 거저 주는 척하며 못 가진 것에 대해 아쉬움을 남기는.
받지 못한 이들은 그것을 갖고 있는 부류에 끼고 싶어 앞다투어 구매하게 만드는 전략이랄까.
특히나 귀족들은 상징물을 좋아했다. 각 놀이 기구에 필요한 돌과 막대기, 팽이, 딱지 등은 소장 욕구를 불러일으켰다.
아예 컬렉션처럼 시작하게 되자 내 티 파티에 오고 싶어 하는 이들이 매해 늘어 추첨제로 운영될 정도였다.
게다가 이번엔 꽃축제를 기점으로 얼리어답터들을 위한 사전 예약을 받기 시작했는데 결과는 역시 엄청났다. 내가 보고서를 훑으며 말했다.
“정말 반나절도 안 돼서 완판됐어?”
“네. 그것도 줄이 길고 넘어지거나 새치기하는 일이 생겨서 교통정리 하느라 늦어진 거지 원래라면 더 빨리 완판됐을 거예요.”
비비안이 신나서 조잘거리자 한나가 말을 이었다.
“오픈하자마자 난리도 아니었대요. 사람들이 막 달리기 시합하는 것처럼 뛰고…….”
완전 오픈런이었구나.
하긴 전생에서도 유명한 브랜드에서 사전 예약을 받거나 물량이 들어왔다는 소식이 들리면 새벽부터 줄을 서서 기다리는 사람이 많았다.
그 심리를 자극하고자 진행한 사전 예약이었는데 이것조차 대박이라니.
게다가 이번엔 성인들도 함께 즐길 수 있는 보드게임으로 선정했었다.
일명 블X마블이라 불리는 부동산 게임.
매매와 통행료, 은행 시스템까지 접목된 게임은 간단한 규칙이지만 인생의 쓴맛까지 알려 주는 파산 엔딩으로 유명한 놀이였다.
한국에선 서울이 제일 비쌌던 것처럼 이 블X마블은 이곳의 수도 인트라비아가 제일 비쌌다.
황금 열쇠로 다양한 반전 요소까지 있는 게임인 데다 각 국가의 랜드마크와 수도를 외울 수 있는 게임이니 어린이 교육에도 도움이 되리라 자부했다.
“이 게임은 다른 게임보다 조금 복잡하긴 하지만 여럿이서 즐길 수 있어서 더 좋은 거 같아요.”
“맞아요. 시범 삼아 했을 때 시간이 훌쩍 지나서 놀랐다니까요?”
“게임 시간이 길어서 시간 때우기도 좋고요.”
세 시녀의 칭찬 일색에 절로 어깨가 우쭐해졌다. 그때 노크와 함께 누군가 들어왔다.
“로, 로, 로에나 님, 말씀하신 물건 가져왔어요.”
쭈뼛쭈뼛하며 방 안으로 들어온 사람은 잔뜩 움츠러든 어깨를 한 소녀였다.
하도 고개를 숙이고 다녀 사람들이 그녀의 얼굴을 똑바로 본 적이 없을 지경이었다.
“어서 와, 안젤리카.”
나는 안젤리카를 한눈에 알아보며 그녀를 안으로 이끌었다. 한나와 비비안, 슈리가 눈치껏 나가자 그녀에게 마카롱을 내밀며 말했다.
“전에 이거 맛있다고 했지?”
“가, 감사합니다.”
안젤리카가 마카롱을 받아 조금씩 베어 먹으며 수줍게 미소 지었다. 낯을 많이 가린다더니 정말이었다.
어릴 때 괴롭힘을 당해서 말을 더듬게 되었다던데 눈으로 확인하니 조금 안타까웠다. 원래라면 좋은 집안에서 호강하며 살았을 아이라 더더욱.
“이따가 좀 싸 줄 테니까 티미랑 나눠 먹어.”
“로, 로에나 님은 처, 천사 같아요.”
“응?”
“이, 이렇게 올 적마다 마, 맛있는 음식도 주, 주시고 거, 거처도 마련해 주셨잖아요.”
안젤리카가 입에 꼬끄를 묻힌 채 말을 이었다.
“오, 왜 이렇게 제게 자, 잘 해 주시는 건지, 저, 저는 잘…….”
점점 목소리가 수그러들었다. 말이 길어지면 으레 목소리가 작아져 뒷말은 거의 안 들리는 수준이었다.
“그야 안젤리카는 귀여우니까.”
“네, 네?”
“그리고 나 그렇게 착한 사람은 아닌데.”
안젤리카가 애프론 백작의 잃어버린 딸인 걸 알고 들인 거니 대가 없이 호의를 베푸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안젤리카의 눈에는 내가 마냥 천사처럼 보이는 모양이었다. 안젤리카가 말을 이었다.
“차, 착한 사람 마, 맞아요. 제가 말을 더, 더듬어도 때리지도 않고…….”
“뭐? 전에 지내던 곳에선 널 그런 이유로 때렸어?”
아니, 남의 집 귀한 딸을 말 좀 더듬는다고 때려?
분노의 되물음에 안젤리카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그, 그야 제가 다, 답답하게 마, 말을 자꾸 더, 더듬어서.”
“그게 무슨 소리야. 안젤리카만큼 자기 몫을 잘 해내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오히려 급여를 더 주고 싶은데.”
“로, 로에나 님…….”
“말 좀 더듬으면 어때, 알아들을 수만 있으면 된 거지.”
안젤리카는 감동받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저렇듯 순진하게 쳐다보면 괜히 착한 짓을 하고 싶어지게 만들곤 했다.
그래. 이왕 천사로 보인 김에 착한 일을 하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마음이 약해진 나는 결심했다는 듯이 말했다.
“안 되겠다. 내가 그 집안 좀 손봐 줘야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