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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가 시집살이 너무 쉬운데요 (107)화 (107/177)
  • #107.

    아키드의 표정이 굳은 건 로에나가 티미를 보며 미소 지은 직후였다.

    그녀는 갑자기 혼자서 웃는가 싶더니 티미에게 질문을 쏟아 내기 시작했다.

    저렇듯 신나 하는 모습은 오랜만이었다. ‘아사모’인지 하는 모임에 다녀올 때와도 비슷했다.

    그녀는 그 모임만 다녀오면 늘 여운이 남은 듯 저런 표정을 지었다.

    식물에게도 우선순위를 빼앗겼는데 이젠 시종한테까지 그 상냥한 웃음을 빼앗긴 거 같아 기분이 묘했다.

    로에나는 이런 아키드의 마음은 꿈에도 모른 채 티미에게 관심을 보였다.

    아예 호구조사를 하지 그러냐는 삐딱한 생각이 들 정도로 말이다.

    ‘지난번부터 마음에 안 들어.’

    아키드가 티미를 서늘히 응시했다. 저번부터 로에나를 보면 자꾸만 얼굴을 붉히는 게 몹시 불쾌했다.

    아키드는 저런 식으로 의도 없이 추파를 던지는 부류는 질색이었다.

    눈치 없이 로에나와 대화하던 티미가 뒤늦게 아키드의 시선을 느끼고 움츠러들었다.

    횡설수설하며 자리를 피하려는 티미의 손을 로에나가 잡은 건 그 직후였다.

    “뭘 고민해. 그럼 티미도 함께 오면 되지.”

    ‘그 손 안 놔?’

    아키드가 부리부리해진 눈으로 티미를 노려보았다. 티미는 얼굴이 사색이 된 채 눈치껏 손을 떼어 냈다.

    하지만 이어지는 월급 두 배 인상 조건에 그는 영혼을 판 것 같았다.

    “성심을 다해 일하겠습니다! 작은 마님!”

    우렁찬 외침과 함께 당장이라도 짐을 쌀 듯이 나간 걸 보면 확실했다.

    안젤리카인지 젤리인지 모를 녀석을 스카우트하는 것도 모자라 눈엣가시인 티미까지 데려온다니.

    아키드는 혹을 떼려다 혹을 붙인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혀 착잡해졌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저 둘을 스카우트하는 건지 모르겠다.

    물론 곧 있을 축제로 일손이 부족한 건 사실이었다. 그래도 마음에 안 드는 건 어쩔 수 없었지만.

    이렇게 불쾌한 이유가 지극히 사적이라는 걸 알기에 아키드는 속만 탔다.

    때마침 티미를 배웅한 로에나가 빙글 뒤를 돌았다. 하필 미처 표정을 갈무리하지 못한 채였다.

    “아키?”

    로에나가 눈을 끔벅이며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때까지도 아키드는 표정 관리가 되지 않아 시선으로 그녀를 좇았다.

    로에나는 왜 이렇게 눈에 띄어선 매 순간 불안하게 할까.

    아키드는 최근 들어 로에나만 보면 뜻 모를 갈증이 일었다.

    그녀가 그어 놓은 선을 맘대로 침범하고 싶어질 때가 많아 하루에도 몇 번씩 찬물에 세수를 할 정도로.

    “왜 그래요? 무슨 생각을 하길래 그렇게 무서운 표정이에요?”

    로에나가 순진한 얼굴로 팔을 붙들어 왔다. 설마 그가 시종을 상대로 질투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하는 듯했다.

    하긴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좀 우스운 상황이었다.

    이젠 하다 하다 시종까지 질투할 지경이라니.

    아키드가 충동적으로 로에나의 붉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 주며 말했다.

    “그냥. 로에나가 조금만 덜 예뻤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네?”

    “제 눈에만 예쁘면 좋겠는데 모두한테 예쁜 것 같아서 말입니다.”

    “그게 무슨…….”

    로에나가 갑작스러운 칭찬에 눈을 도르륵 굴리며 부끄러워했다.

    이런 식으로 유혹을 보내도 결정적인 순간엔 늘 피하는 로에나였다.

    그녀는 아직도 제가 어린애인 줄로만 알았다.

    밤에 곁에 있겠다는 말에 마치 그녀 자신이 세상에서 제일 위험한 사람인 것처럼 망설이는 걸 보면 확실했다.

    실은 그녀에게 위험한 건 정작 저일 텐데, 왜 반대로 생각하는 건지 의문이었다.

    그게 꼭 저를 애 취급하는 것 같아서 아키드는 자꾸만 반항심이 들곤 했다.

    저를 의식해 달라고 일부러라도 건드리고 싶은 충동이었다.

    “로에나는 좀 더 저를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제가 아키를 조심할 이유가 뭐가 있겠어요.”

    “아뇨. 그래야 합니다.”

    아키드가 로에나의 머리카락에 입을 맞추며 나직이 속삭였다. 청회색 눈동자는 그녀에게 고정된 채였다.

    “저는 로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순진하지도, 아무것도 모르지도 않거든요.”

    “…….”

    “역시 같은 방에서 자는 건 안 되겠습니다. 제가 방 앞에서 보초를 서는 쪽으로 할게요.”

    “네? 하지만…….”

    로에나는 방 밖에서 대기하겠다는 말에 아키드를 붙들었다. 이에 참지 못한 아키드가 로에나의 뺨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평소보다도 진하게 내려앉은 입맞춤에 로에나의 얼굴이 홍당무처럼 새빨개졌다.

    일부러 입술 근처에다 입을 맞추었으니 당연했다. 아키드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태연하게 말했다.

    “굿나잇 뽀뽀는 하고 가야 할 것 같아서.”

    “이, 이, 이번 굿나잇 뽀뽀는 조금 다르네요.”

    로에나가 잔뜩 언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흡사 혼이 빠져나간 것처럼 넋이 빠진 채였다.

    그것조차 귀여워서 아키드는 아예 입술을 훔치고 싶은 충동이 들었지만 그렇게 되면 제어가 안 될 것 같았다.

    그가 타는 듯한 목마름을 애써 내리누르며 다정히 속삭였다.

    “그런가요? 전 모르겠는데.”

    평소와 다를 바 없었던 척 여유롭게 미소까지 짓자 로에나가 눈을 도르륵 굴렸다.

    그녀가 저를 순진한 놈으로 보니 이런 짓도 할 수 있는 거겠지.

    아예 대범하게 뺨을 내밀자 그녀가 이리저리 눈치를 살피는가 싶더니 저를 따라 뽀뽀를 해 왔다.

    “문밖은 말고 차라리 옆방을 쓰세요. 바깥은 춥잖아요.”

    “그러죠.”

    아키드는 그 모습을 보며 왠지 모를 만족감을 느낀 채 씨익 미소 지었다.

    * * *

    아키드가 나간 뒤, 나는 소리 없는 아우성을 치며 발을 동동 굴렀다.

    ‘으아아! 너무 귀여워!’

    방금 질투한 거 맞지? 그렇지?

    뒤늦게 아키드의 질투를 깨달은 나는 내적 축배와 함께 무반주 깨춤을 추고 있었다.

    세상의 모든 귀여움을 합치면 아키드라는 단어로 뭉쳐질 것만 같았다.

    그 정도로 방금의 아키드는 이 세상 귀여움이 아니었다. 게다가…….

    “아아, 아쉬워.”

    실수인 척 고개를 돌렸다면 입에다도 할 수 있었을 텐데.

    순간 판단을 하지 못해 벌어진 일이었다. 나는 그의 입술이 아쉽게 비껴간 자리를 매만지며 볼을 붉혔다. 천연한 플러팅은 여전했다.

    어쩜 불시착을 해도 입술 바로 옆에다가 할 수가 있나. 입술에 닿은 것보다도 더더욱 자극적이었다.

    그다음까지 기대하고 싶어지는 접촉이 아닌가.

    ‘후, 역시 어른이 된 아키드는 정말 한시도 방심할 수 없구나.’

    나는 조금만 경계를 느슨히 하면 훅 치고 들어오는 아키드의 플러팅에 정신이 쏙 빠졌다.

    오늘 밤엔 같이 있자는 위험한 발언까지 서슴지 않으니 수절하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순진하지 않기는. 선 지키며 발을 빼는 건 아키도 마찬가지면서.’

    애초에 그가 정말 불순한 생각을 했다면 이렇게 물러나지도 않았으리라.

    ‘그래. 나였다면 무슨 수를 써서든 옆자리를 차지해 손부터 잡고 시작할 거라고.’

    그러니 오늘도 음란 마귀와 싸워 이겨 아키드의 순결을 지켜 낸 나 자신에게 으뜸상을 주겠노라.

    나는 기도하듯 합장한 채 긴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이 짓을 할 날도 얼마 남지 않았으니 조금만 버텨 보자.

    나는 아쉬움을 달래며 침대에 풀썩 드러누웠다. 오늘 밤은 왠지 아키드 생각으로 잠 못 들 것 같았다.

    * * *

    몇 년간 미뤄졌던 각성을 단번에 끝낸 제로니스가 개운한 얼굴로 말했다.

    “역시 대공자비의 말이 맞았군. 이거 큰 빚을 졌어.”

    “이제 더는 각성한 척할 필요가 없어지셨네요. 완전히 각성하셨으니까.”

    “그래. 그래서 아주 홀가분하군.”

    그간 제로니스는 미각성 발작을 유지한 상태로 각성한 척 연례행사에 참석했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각성하지 않고도 힘을 사용할 수 있어 사람들을 속이기 쉬웠다는 거.

    아마 알게 모르게 늘 불안했을 터였다. 꼭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을 안고 사는 기분이었겠지.

    그가 이제야 커다란 짐을 내려놓은 것 같아 나도 뿌듯했다. 각성을 마쳤으니 이젠 돌아갈 때였다.

    같이 가기로 했던 티미는 안젤리카를 데리고 오겠다며 먼저 떠난 후였다.

    ‘메이벨이 바빠 보여서 인사도 못 하고 그냥 간다고, 저 대신 미안하다고 꼭 좀 전해 주세요.’

    내게 부탁까지 하며 속전속결로 움직이던 걸 보면 티미가 얼마나 이 스카우트에 진심인지 알 것 같았다.

    마차에 올라타자 메이벨이 배웅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로에나 님. 축제 전에는 성에 갈게요.”

    메이벨이 싱긋 미소 지으며 배웅했다. 안에 위장한 제로니스와 캐서린이 있는 줄은 꿈에도 모른 채였다.

    “프로디움 내부 일로도 정신없을 텐데 괜찮아. 아, 그것보다 티미가 말도 없이 떠나서 미안하대.”

    “네?”

    “아마 다음 축제 때 대공 성에서 볼 수 있을 거야. 하델루스 성에서 일하기로 했거든.”

    “그, 그게 무슨…….”

    메이벨은 못 들을 소리라도 들은 것처럼 얼굴이 희게 질렸다. 정확히는 티미가 떠났다는 말을 들은 직후였다.

    “왜 그래? 아직도 티미가 불편하니?”

    “아, 아니에요. 그냥 너무 뜻밖이라.”

    메이벨이 혼란스러운 얼굴을 감추려는 듯 고개를 수그리며 뒤로 물러났다.

    뭔가 뜻대로 되지 않았는지 로브를 쥔 손이 약하게 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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