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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가 시집살이 너무 쉬운데요 (106)화 (106/177)
  • #106.

    “식료품 창고에 간 적이 없다고?”

    “네. 애초에 저는 두 분이 여기 계시는 동안 이곳을 담당하기로 한걸요.”

    티미가 의원의 진찰을 받으며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이렇게 되면 원인이 그쪽이 아니라는 이야기인데.

    “그럼 언제부터 아프기 시작했는데?”

    “그게…….”

    티미가 주저하더니 나직이 말했다.

    “너무 많은 사람과 마주쳐서 잘 모르겠어요. 마지막으로 만난 게 메이벨이긴 한데…….”

    “메이벨?”

    갑자기 거론되는 그녀의 이름에 나와 아키드의 시선이 티미에게로 향했다. 티미가 말했다.

    “파블로 예하께서 메이벨을 불러오라고 하셨거든요. 사안이 시급했어서.”

    “그렇구나.”

    “처음엔 보균자랑 접촉이라도 한 건가 하고 무서웠는데, 이렇게 멀쩡한 걸 보면 단순한 과로였나 봐요.”

    티미는 자신이 오염 때문에 죽을 뻔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하긴 이렇게 감쪽같이 오염이 정화되었으니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마지막으로 만난 게 메이벨이라는 게 조금 걸리기는 했지만 무턱대고 의심하는 건 좋지 않은 방식이었다.

    “우선 쉬는 김에 여기서 좀 더 쉬도록 해. 바깥이 정리되려면 시간이 좀 걸릴 거 같으니까.”

    “감사합니다. 대공자비님을 만나면 늘 좋은 일만 생기는 거 같아요.”

    티미가 볼을 붉히며 말을 이었다.

    “헤어졌던 메이벨도 덕분에 만나서 기쁘고요. 어떻게 보답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어요. 언제든지 기회가 생기면 물심양면으로 돕겠습니다.”

    격하게 감동하는 건 그의 착한 성품 탓인 것 같았다. 그때 아키드가 말했다.

    “메이벨과 아는 사이라더니 진짜인가?”

    “예. 진짜 기억을 잃은 것 같더라고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해서 제가 열심히 설명해 줬어요.”

    티미가 씩씩하게 메이벨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거리에서 만났다는 대목이 나오자 아키드가 공감하는 듯했다.

    거리의 아이들은 대개 의지할 대상이 서로밖에 없어서 끈끈해질 수밖에 없으니까.

    “메이벨에게 그런 과거가 있을 줄은 몰랐군.”

    나는 아키드를 힐끗 쳐다보았다. 원작에서도 메이벨의 과거가 아키드의 마음을 여는 계기가 되었었다.

    그러니 그가 저런 유순한 반응을 보이는 건 당연했다. 하지만 왠지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괜히 기분이 저조해져 티미의 이야기를 듣는 둥 마는 둥 할 때였다.

    “안 그래도 안젤리카한테도 메이벨을 만났다고 소식 전했더니 어찌나 기뻐하던지. 하던 일만 마치면 곧장 프로디움으로 오겠다지 않겠어요?”

    “뭐? 안젤리카?”

    익숙한 이름을 듣고 대화에 끼어들자 티미가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어라, 안젤리카를 아세요?”

    ‘알다마다. 세상에, 그 애가 여기에 있을 줄이야!’

    나는 원작 속 인물의 등장에 조금 흥분한 상태였다.

    안젤리카는 메이벨이 거리를 떠돌 때부터 만나 함께 이스터스 고아원에서 자랐다.

    사실 그녀에겐 출생의 비밀이 있었는데, 그녀는 국경을 수호하는 애프론 변경백의 잃어버린 딸이었다.

    변경백이 국지전을 치르러 간 사이 정적이 백작 성을 공격했고 그때 딸이 죽은 줄로만 알았다. 시녀가 목숨을 걸고 지킨 줄도 모르고 말이다.

    ‘잠깐만. 이거 잘만 하면 하델루스가에도 도움이 될 것 같은데.’

    때마침 대공이 애프론 백작가와의 협상으로 골머리를 썩이던 게 떠올랐고, 나는 열심히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현재 애프론 백작가와 하델루스 대공가는 조약을 체결하기 직전이었다.

    애프론 백작령과 하델루스 대공령은 커다란 산맥과 바다를 끼고 있는데, 그 바다에 크라켄이 자주 출몰했다.

    하델루스는 주로 육지전에 강했고, 애프론은 수상전에 강했다. 특히 애프론은 수상 마물을 퇴치하는 마법 개발에 적극적이었다.

    뛰어난 위력을 자랑해 하델루스가에서도 일정 수수료를 지불하는 대가로 마법 사용권을 빌리고 있었다.

    한데 최근 애프론 백작이 그 사용권에 대한 수수료를 터무니없이 올려 대공이 머리를 싸매던 게 생각이 났다.

    ‘하, 이 크라켄보다 더한 놈. 수수료를 그따위로 책정해서 보내다니. 이건 대놓고 불만을 표시하는 거지. 젠장, 오염만 없었어도 애프론 백작가를 뒤집어엎어 버리는 건데. 시간이 없어서 통탄할 일이로군!’

    ‘왜요? 대체 백작가에서 얼마나 올렸길래요?’

    ‘작년 대비 30%를 인상하라고 하더군. 이건 그냥 협상하기 싫다는 거지.’

    ‘헉! 그거 완전 날강도 아니에요? 갑자기 왜 그렇게 수수료를 올리려 하는 거예요? 하델루스 가문과 거래가 끊어져 봤자 백작가도 좋을 게 없을 텐데.’

    ‘뻔하지. 분명 나탈리 후작을 물 먹인 일로 이러는 거야. 그 녀석 나탈리 후작이랑 친구거든.’

    지난번 흑마법사의 유산으로 알려진 유물 사건 때문이라면 내게도 어느 정도 책임이 있었다.

    게다가 하델루스 가문의 금고는 곧 아키드의 금고.

    아키드의 금고가 줄줄 새 나가는 걸 눈 뜨고 볼 수는 없었다.

    아쉬운 대로 나탈리 후작과 이야기해 보겠다며 한숨을 쉬던 아버님의 모습이 여전히 생생했다.

    ‘어째 이번에도 내가 나설 차례 같은데.’

    그래. 이건 인류애적 차원의 일이다. 아버지가 딸을 잃고 오랜 시간 얼마나 슬펐겠는가.

    나는 그저 불쌍한 부녀 상봉을 도우려는 것뿐이다.

    이번 일이 마법 사용권에 대한 무기한 수수료 동결로 이어진다면 백작도 좋고 우리도 좋고, 누이 좋고 매부 좋고, 꿩 먹고 알 먹고, 도랑 치고 가재 잡는 경우가 아니던가.

    나는 줄줄이 소시지처럼 나오는 기분 좋은 상상에 히죽 웃었다.

    그 모습을 아키드가 빤히 쳐다보기에 애써 표정을 갈무리하며 대답했다.

    “아니, 이름이 예쁘길래. 그 아이도 이스터스 동문이니?”

    “이스터스 동문이긴 한데, 메이벨과는 저보다 더 오래된 친구예요.”

    “그랬구나. 그럼 안젤리카는 요즘 어떻게 지내니? 아, 별 뜻은 없고 메이벨이랑 친구라니까 궁금해서.”

    내가 은근하게 안젤리카의 근황을 묻자 티미가 신나서 입을 열기 시작했다.

    “말도 마세요. 안젤리카의 주인댁은 정말 악덕이에요. 애를 얼음물에 빨래시키고 밤늦게까지 바느질을 시키는 등 어찌나 괴롭히던지.”

    “저런, 그런 슬픈 소식이.”

    “하필 추천장도 써 주지 않아서 어디로 옮기지도 못한대요. 다른 곳에도 못 가게 하는 건 정말 너무해요!”

    귀족가에서 일하는 사용인들은 일을 관둘 때 추천장을 받는데, 이 추천장이 없으면 다른 가문으로 이직하기가 무척 어려웠다.

    특히 이직하기 전 몸담았던 가문이 옮기려는 가문보다 높은 작위를 지니고 있으면 눈치가 보여 추천장 없이는 고용하지 않는 게 관례였다.

    물론 반대의 경우에도 뭔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 채용을 꺼렸다.

    내가 살던 전생에서도 이런 일은 비일비재했다.

    퇴사하겠다는 말에 ‘너 이 업계에 발 못 들이게 할 줄 알아!’ 하며 인근 동종 업계의 사무실에 전화를 돌리던 미친 사장들을 얼마나 많이 보았던가.

    그 일로 다른 지역으로 이직해야 했던 적도 있어 절로 치 떨리는 상황이었다.

    ‘생각보다 일이 잘 풀리겠네.’

    내게는 안젤리카의 불행이 호재였다. 어떻게 그녀를 데려올까 고민할 것도 없이 티미가 손수 건수를 내밀어 준 덕이었다.

    나는 잠시 생각하는 척하며 슬쩍 미끼를 던져 보았다.

    “마침 축제 준비로 일손이 부족했는데, 안젤리카가 괜찮다면 하델루스 성으로 이직하는 게 어때?”

    “네? 그게 정말인가요?!”

    티미가 갑작스러운 스카우트 제안에 반색하는가 싶더니 돌연 움찔하며 말을 바꾸었다.

    “하지만 추천장이 없어서…….”

    “괜찮아, 추천장 같은 건 필요 없어. 내가 추천하면 되니까.”

    나는 최대한 순수한 호의인 척 상냥한 표정으로 말했다.

    엘레나가 뭔가 얻어 내려 할 때 보이는 미소를 닮은 듯한 건 내가 그녀의 며느리인 덕이겠지.

    그가 계속 망설이는 듯해 말을 덧붙였다.

    “티미, 안젤리카의 주인댁이 하델루스가보다 대단한 곳이니?”

    “아, 아뇨. 한참 못 미치죠!”

    티미가 그럴 일이 있겠냐며 손사래를 쳤다.

    하긴 북부에서 하델루스 가문보다 높은 작위를 지닌 곳이 있을 리가. 나는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그렇다면 잘 알겠네. 내가 추천하는 게 그쪽이 주는 추천장보다 더 의미 있다는 걸. 안젤리카에게도 좋은 일이니 긍정적으로 생각해 줬으면 해.”

    “하지만 이런 호의를 계속 받는 것도 죄송하고, 안젤리카가 낯도 많이 가려서 새 직장에 적응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고…….”

    티미가 횡설수설하며 망설이자 내가 한껏 인자한 표정을 지은 채 티미의 손을 가만히 잡았다.

    “뭘 고민해. 그럼 티미도 함께 오면 되지.”

    “네? 저, 저도요?”

    “응. 마침 안젤리카는 티미와도 친하다니까 그 아이가 적응할 때까지 함께 도와주면 기쁠 것 같아. 물론 계속 남아 있어 준다면 더더욱 좋고.”

    어차피 안젤리카가 변경백의 딸이라는 게 밝혀지면 끝날 하녀 일이었다.

    사실 티미도 데리고 갈 궁리를 하던 차라 적당한 핑계이기도 했다.

    그때 티미가 슬그머니 손을 빼며 말했다.

    “갑자기 제안해 주셔서 고민할 시간이…….”

    “두 배.”

    거절할까 다급해진 내가 검지와 중지를 번쩍 들며 말했다.

    “지금 받는 봉급의 두 배의 월급을 줄게. 하델루스 가문의 복지가 좋다는 건 티미도 잘 알 테니, 이 기회를 놓치지 말렴.”

    하델루스 가문의 복지가 좋아진 건 모두 내 덕이었다.

    하마터면 블랙 기업이 될 뻔한 가문을 일으킨 게 나라는 걸 아버님과 어머님이 알아주면 좋으련만!

    티미는 월급을 두 배로 인상해 주겠다는 말에 동공에 지진이 일었다.

    찰나의 침묵이 흐르고 티미가 결의에 찬 표정으로 말했다.

    “성심을 다해 일하겠습니다! 작은 마님!”

    야무지게 호칭까지 변경하는 모습이 믿음직해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그래. 훌륭한 자세야. 이참에 같이 하델루스가로 돌아가자.”

    “네! 그럼 예하께 작별 인사드리고 올게요!”

    티미가 90도로 인사를 한 채 방을 나섰다.

    내가 흐뭇한 얼굴로 손을 흔들어 배웅하고 뒤를 돈 직후였다.

    아키드가 몹시 마음에 안 든다는 얼굴로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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