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공가 시집살이 너무 쉬운데요 (104)화 (104/177)

#104.

제로니스의 각성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막혀 있던 힘이 터지듯 발산되자 땅이 진동하며 각성이 시작됨을 알렸다.

흡사 지진이 일어난 것처럼 땅이 흔들려 자칫하면 들킬 수도 있는 상황.

아키드가 재빠르게 마법을 이용해 숙소 밖으로 진동이 흘러가지 못하도록 막아 냈다.

어둠이 삼킨 땅과 외부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 되었다.

평화로운 프로디움의 전경이 펼쳐진 밖과 달리 안은 땅이 쪼개질 것처럼 흔들렸다.

그나마 함께 왔던 흰둥이가 진동이 더 거세지지 않도록 지반을 다잡은 덕에 사람이 설 수는 있었다.

갑작스럽게 각성을 맞았다면 건물 하나는 족히 무너졌을 위력이었다.

다행히 대비하고 있던 각성이라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황실에서 보낸 대지 마법사들이 제로니스 주변에 달라붙어 힘을 모았다.

캐서린은 제로니스가 걱정된다며 곁을 지켰다.

아키드가 각성했을 적과 달리 제로니스의 각성은 주변을 해치지 않는 덕이었다.

애초에 공격계의 어둠은 자칫 잘못하면 어둠에 먹히게 되는 반면 방어계인 대지의 힘은 그렇지 않은 덕이었다.

하여 대지 속성 마법사가 곁에 머물며 지원하는 것 정도로도 가능했다.

나는 새삼 아키드가 각성했던 날을 떠올렸다. 닥치는 대로 주변을 삼켜 대던 아키드의 힘은 아찔한 수준이었다.

데미안이 아무도 방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몇 날 며칠을 씨름할 정도로.

그건 그만큼 아키드의 힘이 강한 탓이기도 했고, 속성 탓도 있었다.

공격계인 어둠은 각성기가 무척이나 위험했으니까. 그에 비하면 제로니스의 각성은 나름대로 평화로웠다.

“왜 괜히 제가 긴장이 될까요?”

내가 턱을 괸 채 중얼거리자 아키드가 대답했다.

“각성을 앞두고 있어서인가 봅니다.”

“그런가 봐요.”

선뜻 긍정하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몇 달 사이 두 사람의 각성을 연달아 지켜보게 되니 생각이 많아졌다.

내 각성기는 여름의 데뷔탕트 전에 있을 예정이었다. 그때를 대비해 이미 쌍둥이들이 북부로 오기로 약속했다.

원래라면 바람계 마법사를 대동하면 되는데 쌍둥이들이 극구 오겠다고 극성을 부린 탓이었다.

뭐, 나 역시 그들의 능력이 출중함을 알기에 선뜻 응했다.

이미 각성을 마치고 날아다니는 두 사람이 곁에 있어 준다면야 든든하기는 하니까.

‘에이프릴가 속성은 바람이었지.’

바람은 기척을 숨겨 은신하거나 상대의 기척을 읽어 내는 데 적합한 보조계 마법이었다.

염탐과 암살에 능한 마법이라고 할까. 에이프릴 가문에 딱 어울리는 능력이기도 했다.

그때 내 표정이 좋지 않았는지 아키드가 뺨에 손을 얹었다.

“불안하지 않게 제가 곁에 있겠습니다.”

그러곤 고개를 모로 기울여 나와 시선을 맞추었다. 청회색 눈동자가 반짝이는 듯했다.

사르르 짓는 미소에 눈이 녹을 것 같았다. 결국 그윽한 눈길을 못 이긴 나는 시선을 피했다.

“헤헤, 그럼요. 당연히 곁에 있어 주셔야죠.”

“…….”

“그나저나 캐서린이 걱정이에요. 내내 안에서 전하만 보고 있잖아요. 좀 쉬어야 할 텐데.”

괜스레 민망해진 나는 억지로 화제를 돌렸다.

요즘 들어 아키드의 얼굴을 빤히 보는 게 어려웠다. 뭔가 바라는 눈빛인데 정확히 그게 뭔지 잘 모르겠다.

여전히 얼굴만 봐도 새롭고 짜릿한데, 거기에 신비로움까지 갖춘 기분이었다. 갈수록 아키드에게 빠지기만 해서 퍽 곤란했다.

그의 집요한 시선이 한동안 머무는가 싶더니 그가 더운 숨결을 내뱉으며 말했다.

“정말 시간이 빨리 갔으면 좋겠습니다.”

“네?”

갑자기 시간 이야기를 하는 그를 빤히 쳐다보자 그가 고개를 도리질했다.

“아마 곧 끝날 겁니다. 진동이 잦아들고 있거든요.”

그러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씨익 웃기에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다.

“듣던 중 다행이네요.”

한참 한가롭게 티타임을 즐길 무렵이었다. 돌연 신관들이 바삐 어디론가 향하는 게 보였다.

다급하게 움직이는 모습이 뭔가 문제가 생긴 것 같았다. 그게 의아해 슈리에게 알아 오라 지시하니 그녀가 돌아와 상황을 알렸다.

“작은 마님, 대공자님. 지금 당장 숙소로 돌아가셔야겠어요. 바깥은 위험해요.”

“무슨 일인데?”

“프로디움 신관 몇몇이 갑자기 쓰러졌대요. 듣자 하니 오염에 노출된 것 같다고.”

“뭐?”

“접촉자를 격리하고 노출 경로를 확인 중이래요.”

슈리가 바삐 말하며 나와 아키드를 숙소로 안내했다. 아직 접촉 경로가 확인되지 않아 주변에 비상이 걸린 것 같았다.

그렇게 각자의 숙소로 돌아가 쉬고 있을 때였다.

슈리가 잠시 나간 사이 벌컥 문이 열리는가 싶더니 캐서린의 시녀 하나가 말했다.

“혹시 저희 아가씨 보신 적 있으세요?”

“응? 캐시는 전하와 함께 있지 않아?”

“쉬시러 숙소로 가셨다는데 보이질 않아서요. 지금 바깥에 있으면 위험한데……!”

시녀가 발을 동동 구르다 황망히 사라졌다. 캐서린을 찾으러 갈 모양이었다.

나 역시 불안한 마음에 자리를 지키고 있을 수 없었다.

결국 나는 캐서린을 찾으러 도로 바깥으로 나왔다. 어쩐지 예감이 좋지 않았다.

* * *

“위험한 시기는 모두 지났습니다.”

황실 마법사의 말에 캐서린이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생각보다 지지부진하게 끄는 각성에 내내 마음 졸이던 게 눈 녹듯 사라졌다.

“다행이다.”

하필 안색까지 좋지 않으니 곁을 떠날 수 없던 게 여러 날이었다. 캐서린이 빙그레 미소 짓다 현기증이 일어 휘청이자 알리가 부축했다.

“이제 좀 쉬십시오. 이러다 전하께서 일어나시기도 전에 캐서린 님이 먼저 쓰러지시겠습니다. 몸도 성치 않으신 분이.”

“으응. 그래야겠다. 나중에 전하께 꾸중을 듣지 않으려면 말이야.”

해맑게 대답한 캐서린이 고집부리지 않고 방을 나섰다.

왠지 속이 울렁거리는 기분이었으나 내내 신경이 예민해진 탓이라 여겼다.

숙소에 다다랐을 무렵이었다. 복도에 웬 사람 하나가 쓰러져 있는 게 보였다. 도움이 필요한 것 같아 다가갔다.

“저기 괜찮으세요?”

“큽. 사, 살려…….”

그가 캐서린의 팔을 꽉 붙들며 고통스러운 신음을 내뱉었다.

이제 보니 그의 손끝이 검게 그을려 있었다. 꼭 잉크를 뒤집어쓴 것 같은 모양새였다.

캐서린은 오염에 노출된 사람을 본 적이 없기에 그게 썩기 직전의 모습이란 건 알지 못했다.

우선 눈앞에서 죽어 가는 사람을 도와야 한다는 생각에 남자를 간신히 일으켜서 부축했다.

“일단 의무실로 가야겠어요.”

“고, 고맙습니다.”

그가 가쁜 숨을 내뱉으며 캐서린에게 의지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아무 일도 없을 거예요.”

캐서린이 그를 안심시키며 부지런히 움직였다.

당장 도와줘야 한다는 생각에 그의 몸이 하얗게 반짝이고 있다는 건 미처 눈치채지 못한 채였다.

* * *

나는 캐서린의 시녀가 사라진 반대편으로 뛰었다.

양쪽으로 갈라져서 찾는다면 누구 하나는 캐서린과 마주칠 거라 여긴 탓이었다. 그리고 캐서린과 마주친 건 시녀가 아닌 나였다.

저 멀리 캐서린이 누군가를 부축한 채 힘겹게 움직이는 게 보였다. 햇살을 등지고 있어서인지 그들 주변에 흰빛이 스미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녀가 점점 가까워졌을 때, 나는 그녀에게 안기듯 기댄 자가 오염에 노출된 사람임을 눈치채고 기겁했다.

“캐서린!”

당장 저 둘을 떼어 놓을 생각으로 달려가자 캐서린이 나를 발견하고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아, 로에나! 마침 잘됐다. 같이 좀 부축해 줄래? 복도에 쓰러져 있는 사람이었어.”

“너 지금 이 사람이 왜 쓰러진 줄은 알고 부축한 거야?”

기함한 나는 부리나케 그과 캐서린을 떼어 냈다. 그러곤 캐서린의 손목에 팔찌가 있는 것을 확인하고 안도했다.

저 팔찌가 없었다면 캐서린도 저 사람처럼 오염에 노출됐을 게 뻔한 탓이었다.

“왜 이렇게 조심성이 없어!”

나는 혹시 몰라 캐서린의 손을 잡고 정화를 시도했다. 몸도 약한 애라 더더욱 걱정이 앞선 탓이었다.

― 얘는 우리가 정화할게!

― 이 정도는 실체화하지 않아도 되겠어.

정령들이 눈치껏 바닥에 쓰러진 사람에게로 모여들었다. 캐서린은 제 몸에 퍼지는 맑은 기운에 놀란 눈을 했다.

“로에나, 이건……?”

낯선 힘에 당황하는 것 같았다. 처음 정령술을 접했을 때의 기분을 떠올린 나는 작게 웃었다.

맑은 물에 몸을 푹 담그고, 푸르른 숲길을 걷는 기분이었다. 충만한 자연의 힘이 몸을 휘도는 느낌이라고 할까.

캐서린이 이게 무슨 힘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는 입가에 검지를 대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비밀로 해 줘.”

“…….”

“때가 되면 알려 줄게.”

“응. 말 안 할게.”

캐서린이 배시시 웃으며 나를 따라 검지를 들어 보였다. 무슨 힘인지는 모르겠지만 비밀로 해 주겠다는 뜻이었다.

내가 캐서린에게 별문제가 없는 것에 안도하는 찰나였다. 저 멀리 시녀가 눈물 바람으로 내달려 왔다.

“캐서린 니이이임!”

흡사 무소와 같은 모습이었다. 그 기세에 캐서린이 내 뒤로 숨으려 했으나 내가 슬쩍 몸을 뺐다.

괜히 옆에 있다가 쌍으로 잔소리를 듣고 싶지 않을뿐더러 그녀의 부주의함을 혼내 줄 상대를 방해할 생각이 없었다.

캐서린이 배신감에 찬 얼굴로 나를 보다 시녀의 다그침에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대체 어디에 다녀오신 거예요!”

미안해, 캐서린.

내가 슬쩍 두 사람에게서 시선을 피하던 때였다. 남자를 정화하겠다며 나선 정령들이 의구심이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 어라, 정화할 것도 없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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