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공가 시집살이 너무 쉬운데요 (103)화 (103/177)
  • #103.

    ‘응, 그래. 캐서린은 남친을 참 강하게 키우는구나.’

    나는 무어라 할 말이 없어 엄지를 척, 들며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그녀 덕에 제로니스가 움직이기는 했으니 성공이었다.

    캐서린은 내 엄지 척을 받고 좋다고 빙그레 미소 지었다.

    벌써 멀어진 제로니스를 멀거니 바라보는데 정령들이 호숫가에 몸을 첨벙첨벙 담그며 꺄르륵거렸다.

    ― 엄청 시원해! 원기 회복이 되는 거 같기도 하고.

    ― 자파르시아가 놀던 곳이라 그런가 봐. 로에나도 들어오면 좋을 텐데.

    ― 이리 와서 같이 놀자. 응, 로에나야?

    ‘응. 사양하겠어.’

    나는 정령들을 향해 손으로 엑스 자를 만들었다. 일단 이 추위에 호수에 들어가는 무모한 짓은 하고 싶지 않았다.

    북부는 봄이라 해도 날이 제법 쌀쌀해 물놀이를 하기 적합한 지역도 아니었다.

    게다가 나는 호수에 빠져 죽을 뻔했다고 거짓말한 전적도 있어서 태연하게 물놀이를 할 수 있는 몸도 아니었다.

    내가 거듭 도리질하며 강하게 거부하자 정령들이 툴툴거리며 저들끼리 놀기 시작했다.

    “저쪽에 물고기가 많나 봐. 물수제비 던진 것처럼 물결치네.”

    그때 캐서린이 정령들이 노는 곳을 가리키며 신기해했다.

    그녀의 눈에는 저들이 보이지 않으니 물고기가 지나가며 만들어진 파동인 줄 착각한 모양이다.

    잠시 그쪽에 흥미를 두는가 싶던 캐서린이 이내 내 쪽으로 완전히 몸을 돌린 채 입을 열었다.

    “수도에는 언제 올 거야?”

    “여름에 있을 데뷔탕트 시기에 맞춰서 갈 것 같은데.”

    “그럼 또 한동안 못 보겠네.”

    캐서린이 울적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나와 노는 게 제일 재밌다고 했다.

    수도에 있는 영애들의 화법은 정신을 집중하지 않으면 알아듣기 힘들다나.

    왠지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아서 공감되는 한편, 에셀가에서 나고 자란 전형적인 귀족 영애인 캐서린이 그들의 화법을 어려워하는 게 신기했다.

    그때 캐서린이 지나가듯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때까진 살아 있으려나.”

    “그게 무슨 말이야, 캐시?”

    내가 놀라 쳐다보자 캐서린이 방긋방긋 웃으며 귓속말했다.

    “잊었어? 난 각성을 못 하잖아. 그러니 남들보단 일찍 죽을 거야.”

    나는 말문이 막혀 입술만 달싹였다. 캐서린이 무릎에 턱을 괸 채 중얼거렸다.

    “그래서 제로와 약혼할 때 고민이 많았거든. 그의 옆자리는 엄청 중요한 자리잖아. 나보단 좀 더 적합한 사람이 서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어.”

    어울리지 않게 우울 모드였다. 제로니스라면 캐서린의 몸이 약하든 말든, 신경 쓰지 않을 텐데.

    나는 일부러 장난기 가득한 어조로 캐서린을 안심시키는 말을 내뱉었다.

    “글쎄. 전하께선 너 말고 다른 사람이랑은 하고 싶어 하지 않을걸?”

    “그런가. 어쩌면 제로는 내가 불쌍해서 곁에 있어 주는 걸지도 몰라.”

    캐서린이 슬픈 눈을 감추려는 듯 고개를 무릎에 묻듯이 숙였다.

    나는 그런 캐서린을 가만히 응시했다. 밝은 것 같다가도 한편으론 우울한 모습이 보였다.

    각성하지 못한다는 건 하인트에선 불구의 몸과도 같았다. 대개 그런 이들은 성인이 되기도 전에 죽으니까.

    산다고 해도 계속 약한 몸을 지닌 채 근근이 이어 가는 삶이었다.

    ‘캐서린이 시한부라는 이야기는 소설에 없었는데.’

    그러고 보면 캐서린은 어릴 때부터 몸이 좋지 않았다고 했다.

    자주 아픈 데다 나와 처음 만나기 전에는 죽을 뻔한 적도 있다지 않은가?

    분명 소설에선 불 속성을 이용해 메이벨을 괴롭히기도 했었는데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나는 쏟아지는 의구심을 애써 떨치며 밝게 말했다.

    “불쌍하다는 이유로 마음에도 없는 이성과 결혼하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어. 왜 그런 생각을 해?”

    “그냥. 내가 데뷔탕트를 무사히 치를 수 있을지 잘 모르겠어서.”

    역시나 다가오는 데뷔탕트 때문에 불안했던 모양이다. 보통은 그 시기를 겪지 못하고 요절한다고 했으니까.

    사실 캐서린의 몸 상태 때문에 에셀 공작도 고민이 많다고 들었다. 좋다는 영약은 다 먹이는데도 나날이 몸이 안 좋아지는 탓이었다.

    나는 무엇으로 캐서린의 걱정을 덜어 줄까 고민하다가 이전에 시험 삼아 만들었던 물건을 떠올렸다.

    오염 발생 지역에 자주 가게 된 주변 사람들을 위해서 만든 부적 팔찌였다.

    예전에 캐서린에게 선물 받은 실 팔찌에서 영감을 받아 실로 엮어 만든 행운의 팔찌였다.

    그 속에 내 정령의 힘을 소량 넣어 두어 오염에 노출되면 몸을 보호해 주는 기능이 있었다.

    물론 이걸 알고 끼는 사람은 시부모님과 헨리, 아키드뿐이었다. 나머지는 그저 내가 주니까 성의에 감동해 끼는 눈치였다.

    대공 성 사람들은 이제 내가 주는 거면 다 좋아라 했다. 각고의 노력 끝에 얻어 낸 신뢰라고 할까.

    나는 안쪽 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실 팔찌를 꺼내 그녀에게 내밀었다.

    “이거 받아.”

    “응? 이게 뭐야?”

    “행운의 팔찌. 지니고 있으면 액운을 막아 줄 거야.”

    “예전에 내가 너한테 준 거랑 비슷한 거네.”

    캐서린이 배시시 웃으며 팔목에 실 팔찌를 꼈다. 고급 실로 짠 거라 그리 초라한 모습은 아니었다.

    “응. 네가 준 것처럼 불 마법이 담긴 건 아니지만 거기엔 내 정성이 담겨 있어.”

    “직접 만들었구나. 대단해.”

    캐서린은 그제야 실 팔찌의 짜임이 눈에 들어온 모양이었다. 요모조모 살피는가 싶더니 밝게 말했다.

    “이건 어떻게 묶은 거야? 신기한데.”

    누가 에셀가 사람 아니랄까 봐 매듭 방식부터 관심을 가졌다.

    에셀가는 리본 공예에 일가견이 있고, 가문의 이름을 딴 액세서리 브랜드도 있으니 당연했다.

    나는 그녀의 인정을 받은 게 신이 나서 종알종알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아, 실은 메이벨이 끈을 묶을 때마다 이런 식으로 엮거든. 곁에서 몇 번 보니까 튼튼하게 묶이는 데다 모양도 보기 좋아서 거기에 살짝 변형을 줘 봤어.”

    내가 새로운 실을 꺼내 매듭 시범까지 보이자 캐서린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라, 이 매듭은 우리 가문에서 사용하는 방식인데.”

    “응? 에셀가에서?”

    “응. 이렇게 묶는 건 에셀가의 기본 매듭법 중 하나거든. 예전에 너한테 선물해 준 리본 헤어핀도 그 매듭을 기초로 해서 변형한 방식이었어.”

    “그래?”

    “신기하다. 메이벨은 이걸 어떻게 알았지? 이건 가문 사람들만 아는 방식인데. 어디서 배웠나?”

    캐서린이 대수롭지 않게 중얼거렸다. 나는 손에 있는 실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러고 보니 메이벨은 캐서린에게 선물 받은 리본이 에셀가의 것인 줄 단번에 알아챘었다.

    당시엔 찍었다고 얼버무렸지만 그녀가 주로 사용한 매듭법이 에셀가의 기초 매듭이라는 걸 알고 나니 찍은 게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메이벨, 너 대체 정체가 뭐야?’

    파면 팔수록 의혹만 가득해지는 존재와 맞닥뜨린 기분이었다.

    ‘메이벨과는 노예상의 비밀 기지에서 처음 만났어요. 빵을 준다고 해서 갔다가 납치를 당했는데 거기에 메이벨도 있었거든요.’

    ‘거기서 구출되고 나서 임시 보호소에 잠시 머물다 이스터스로 갈 예정이었어요. 그런데 갑자기 사라져서 저만 갔었고요.’

    나는 메이벨이 도망치듯 나간 후, 티미가 했던 말을 다시금 되새겼다.

    혹시 몰라 메이벨이 사라진 시기가 언제인지 물었는데 스티그 섬의 오염 발생과 딱 맞물렸다.

    이게 우연일까?

    지나친 기우인가 싶다가도 자꾸만 섬뜩해지곤 했다. 메이벨이 오염과 관련이 있는 건 아닐까, 하는.

    하필 오염의 발원지에서 발견된 것부터가 의심을 부추겼다.

    물론 그녀가 루이스의 후예라는 점에서 그 가능성이 희박하기는 했다.

    빛 속성 마법은 신성력과 마찬가지로 흑마법과 상극이라 함께 겸할 수 없다고 들었으니까.

    원작인 《나를 품어 주세요》에서처럼 오염을 순식간에 진압하는 걸 보면 내가 공연히 그녀를 의심하는 걸지도 몰랐다. 그때 캐서린이 내 상념을 깨뜨렸다.

    “이 실 팔찌, 매듭을 변형한 방식이 훌륭해. 에셀가에 스카우트하고 싶을 만큼.”

    “너무 추켜세워 주는 거 아니야? 그 정도 실력은 아니야.”

    “헤헤. 고마워, 로에나. 네 말대로 몸에 꼭 지니고 다닐게. 왠지 이걸 갖고 있으면 아플 일도 없을 거 같아.”

    “응. 부적이다, 생각하고 꼭 지니고 다녀야 해?”

    “너도 내가 준 거 잘 지니고 다녀야 해.”

    “물론이지.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챙기는걸?”

    서로 방실방실 웃으며 주거니 받거니 덕담을 하는 도중 캐서린이 말했다.

    “어, 저기 제로 온다.”

    곧이어 반대편까지 찍고 온 제로니스가 뭍으로 올라왔다. 꽤 힘에 부치는지 얼굴이 해쓱했다.

    캐서린이 챙겨 둔 담요를 그에게 덮어 주며 물었다.

    “어때?”

    “확실히 뭔가 좀 속이 뚫리는 것 같기도 한데. 일단 너무 춥고 찝찝하군.”

    “가서 뜨끈한 물에 담그고 있자. 며칠 기다려 보고 신호 없으면 한 번 더 해야 하니까.”

    “한 번 더 하라고?”

    제로니스의 얼굴이 회색빛으로 물들었다. 캐서린은 그가 달가워하지 않는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할 수 있는 건 다 해 보자고 약속했잖아.”

    “……알겠어. 노력해 볼게.”

    제로니스가 풀 죽은 목소리로 중얼거리자 캐서린이 그의 머리칼을 수건으로 탁탁, 털어 주며 부둥부둥했다.

    그게 또 좋다고 볼을 붉히고 있는 제로니스를 보자니.

    여주인공은 실은 메이벨이 아니라 캐서린이었던 건 아닌가, 하는 시답지 않은 생각이 들었다.

    “부디 한 번에 됐으면 좋겠군.”

    제로니스가 다시는 물에 들어가고 싶지 않다는 듯이 몸을 떨었다.

    그리고 제로니스의 바람대로 그날 저녁, 그의 각성을 알리는 발열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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