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공가 시집살이 너무 쉬운데요 (102)화 (102/177)

#102.

아키드는 멀어지는 메이벨을 가만히 응시했다. 반응을 보아하니 황태자와 그의 약혼녀가 이곳에 있는 건 전혀 알지 못하는 눈치였다.

하긴 그 일은 파블로도 알지 못했다. 여기 올 때 혹시 몰라 위장을 한 덕이었다.

‘로에나를 만난 직후에 그런 표정을 지었단 말이지.’

아키드는 메이벨이 한 말을 곱씹으며 표정을 굳혔다.

로에나를 만나고 온 길이라던 그녀의 표정이 몹시 사나웠던 탓이었다.

그는 그녀가 저를 못 보고 걷는 걸 알면서도 일부러 부딪쳤다. 그녀의 표정을 더욱 가까이에서 보기 위함이었다.

사납게 일그러진 얼굴은 직전에 만난 사람을 향한 불쾌감이 섞여 있었다.

그리고 그게 로에나라는 사실에 아키드는 떨떠름해졌다.

“역시 곁에 두기엔 불안하단 말이지.”

성녀라서 어쩔 수 없이 곁에 두기는 했지만 어쩐지 꺼림칙한 여자였다.

로에나가 대공의 뜻대로 그녀를 시녀로 두겠다고 했을 때는 말리고 싶었다.

혹시라도 무슨 안 좋은 일이 생길까 봐 불안한 탓이었다. 로에나가 아직 각성하기 전이라서 더 그런지도 몰랐다.

아키드는 각성기를 겪어 봐서 잘 알았다. 그 시기가 얼마나 위험하고 또 중요한지를. 물론 아키드만 로에나의 걱정을 하는 건 아니었다.

사실 그녀가 깨질까 불안해 그녀 주변을 빙빙 도는 사람은 그 말고도 둘이나 더 있었다.

‘무슨 일 생기면 바로 연락하거라. 마침 마수 토벌을 빌미로 사람 몇몇은 쓱싹해도 모를 테니 네가 처리해도 좋고.’

살벌한 말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던 대공도.

‘역시 내가 함께 갈까? 아니, 뭐, 딱히 걱정이 된다기보다는…… 그냥 흰둥이가 로에나를 보고 싶어 할지도 모르니까.’

흰둥이를 핑계 삼아 어디 갈 때마다 따라오려는 대공비도, 모두 로에나를 걱정했다.

저만 독차지하고 싶은데 방해하는 게 하필 부모님이라서 몹시 불만스러웠다.

아키드가 로에나의 숙소 앞에서 가볍게 노크했다.

“접니다.”

“들어오세요.”

로에나의 허락에 막 그녀의 침실에 들어간 아키드는 얼굴을 찌푸렸다.

“안녕하십니까, 대공자님.”

방 안에 웬 남정네가 있는 탓이었다. 그것도 익숙한 얼굴이었다.

지난 행사 때 로에나가 솔선수범하며 돌봐 주려던 시종이었다.

로에나는 성숙해지면 성숙해질수록 만개하는 꽃처럼 아름다움을 더해 갔다.

아키드도 그녀를 볼 때면 자꾸만 심장이 멎는 것 같은 착각이 일 정도로.

해서 그녀를 보고 얼굴을 붉히는 사내가 많아도 너무 많았다. 그런 자들을 볼 때면 기분이 몹시 나빠졌다.

그리고 엄연히 남편이 앞에 있음에도 대놓고 얼굴을 붉힌 사내가 바로 눈앞의 시종이었다.

아키드는 로에나가 그에게 손수건도 주고 손수 지혈해 준 것까지 생각나자 표정이 서늘해졌다.

그녀의 손수건은 저에게만 허락되어야 하는데.

병간호도 역시 저에게만 해 주기를 원하는데.

아키드는 차라리 로에나가 예전처럼 남들에게 막돼먹게 굴었을 때가 더 좋았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우습게도 말이다.

“그때 그 시종이로군.”

“아, 기억하시는군요. 그때는 정말 감사했습니다, 대공자님. 저는 티미라고 합니다.”

티미라고 자기소개를 한 사내가 빙그레 미소 지었다.

그것조차도 마음에 들지 않아서 속이 꼬였다. 아키드가 로에나의 옆에 다가가 다정히 속삭였다.

“보고 싶어서 왔습니다.”

“네?”

로에나는 보고 싶었다는 말에 볼을 붉히며 눈을 댕그랗게 떴다. 뒤이어 티미가 얼굴을 붉히며 눈을 도르륵 굴렸다.

아키드가 로에나의 손을 붙든 채 티미를 보고 말했다.

“티미, 언제까지 여기 있을 건가?”

“예?”

“지금 무척 중요한 일을 앞두고 있어서.”

아키드가 로에나의 손등을 가만히 쓸며 은근하게 속삭였다. 마치 입이라도 맞출 것처럼 그윽한 눈빛까지 하면서.

이에 티미의 얼굴이 홍당무처럼 새빨개지는가 싶더니 황급히 인사했다.

“시, 실례가 많았습니다!”

“엇! 잠시만, 티미!”

로에나가 손을 뻗어 불렀으나 티미는 이미 문을 닫고 나간 뒤였다. 아키드는 그녀의 입에서 티미라는 말이 나온 게 어쩐지 불만스러웠다.

제 이름은 아주아주 뒤늦게 불러 놓고 다른 남자 이름은 참 쉽게도 부른다.

아키드는 그녀가 제게 일정 거리 이상을 허락하지 않는 게 불만이었다.

굿나잇 뽀뽀는 잘만 해 주면서 더 다가가려 하면 황급히 도망치기 바빴다.

말로는 자신이 그에게 위험해서 그런다는데, 오히려 반대였다.

그가 그녀에게 위험하면 위험했지 그녀가 제게 위험할 일은 없었다.

솔직히 말하면 위험해도 좋으니 곁에 쭉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요즘이었다.

빌어먹을 합방 조건만 없었더라면 이미 그러고도 남았을 텐데.

아키드는 그간 있었던 에이프릴 후작과 쌍둥이의 방해 공작을 떠올리며 눈살을 찌푸렸다.

‘제국에는 이혼 제도가 아주 잘 되어 있지. 이혼당하고 싶지 않다면 내 딸에게 잘하길 바라네. 뭐, 이혼당하는 것도 나쁘진 않지만.’

은근히 이혼을 바라는 후작이나.

‘결혼 서약서를 잊지 않았기를 바라. 내 동생 털끝 하나라도 건드렸다간 가만두지 않을 거야.’

저를 가만두지 않을 생각뿐인 카일이나.

‘소중히! 보물 다루듯이 하라고! 명심해, 너!’

구호를 외치듯 저를 세뇌시키기 바쁜 일라이저를 떠올리면 절로 피곤해졌다.

만날 때마다 돌아 가며 저렇게 경고를 해 대는 통에 오히려 반항하고 싶어지는 요즘이었다.

‘가만 안 두면 어쩔 건데. 로에나는 이미 내 부인인데.’

과거에 분명 이혼할 기회는 한 번뿐이라고 못 박은 상태였다.

로에나가 이혼하고 싶다 해도 절대 해 줄 생각이 없는 그로서는 에이프릴 후작가의 협박이 그리 무섭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가 이렇듯 얌전히 데뷔탕트를 치르길 기다리는 건 그녀가 그 서약서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탓이었다.

그녀만 허락한다면 자신은 그깟 서약서쯤은 아예 없던 것처럼 얼마든지 뻔뻔하게 굴 수도 있건만.

솔직히 둘이 무얼 하든 비밀로 한다면 후작가에서 어떻게 안단 말인가.

물론 이런 생각이 든 건 최근 들어 로에나가 너무너무 사랑스러운 탓이었다.

자꾸만 마음에 가득 들어차 버려서. 더는 찰 곳이 없다고 생각하기가 무섭게 부피를 점점 더 키워 나가기만 해서.

아키드는 타는 듯한 속을 애써 잠재운 채 그녀의 손등에 가만히 입을 맞추었다.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미소를 지은 채로.

이미 그녀가 자신의 얼굴을 좋아한다는 걸 알고 한 수작질이었다.

“로네, 지금 제 앞에서 다른 남자 이름 부른 겁니까?”

그리고 언제나 통하는 미인계이기도 했다. 로에나가 화끈거리는 뺨을 매만지며 다정히 속삭였다.

“그럴 리가요.”

그 목소리가 좋아서, 아키드는 로에나의 손을 꼭 쥔 채 말했다.

“산책할까요?”

계속 방에 있다가는 제가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르니까.

차라리 이 방을 피하기로 했다. 탁 트인 정원이라면 로에나도 도망칠 구석쯤은 생길 테니까.

로에나는 아키드의 이런 검은 속내도 모른 채 배시시 미소 지었다.

“언제든 아키랑 함께라면야.”

그것마저도 사랑스러워서 아키드는 잡은 손에 힘을 줄 수밖에 없었다.

* * *

나는 제로니스와 캐서린을 데리고 프로디움에 있는 인공 호수에 도착했다.

아키드는 프로디움에 온 김에 신전과 오염에 관해 의논할 게 있어 함께하지 않았다.

혹시 몰라 아무도 출입하지 못하게 한 터라 호숫가 근처는 한적했다. 제로니스가 다소 긴장된 얼굴로 호수 앞에 섰다.

“설마 내가 여기서 다이빙을 할 줄은 몰랐는데. 일라이저가 알면 폭소하겠군.”

“불안하면 나도 같이 들어갈까? 나 수영 잘해.”

“됐어. 몸도 안 좋은 애가 그러다 감기 들면 어쩌려고.”

제로니스는 함께 들어가려는 캐서린을 만류한 채 심호흡을 했다.

잠시 후, 스트레칭을 마친 제로니스가 발돋움을 하여 호수에 다이빙했다.

풍덩, 소리와 함께 그가 빠진 주변으로 흰 포말이 일었다.

뒤이어 흠뻑 젖은 제로니스가 수면 위로 고개를 내밀었다. 내가 물가에 쭈그려 앉은 채 물었다.

“좀 어떠세요?”

“시원하긴 한데 물이 차서 오래 있으면 추울 것 같군.”

제로니스가 나가고 싶은지 물가로 다가왔다. 나는 손바닥을 쭉 내밀어 그가 더는 나오지 못하게 막아섰다.

“잠시만요, 전하. 그렇게 빨리 나오면 효과가 없을지도 모르잖아요.”

아무리 물놀이를 싫어한다고 하지만 그래도 그렇지, 너무 짧게 있으려고 하는 거 아냐?

나는 제로니스가 금세 뭍으로 나오려는 것에 헛웃음을 삼켰다. 원작을 본 터라 제로니스가 물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건 익히 알았다.

하여 그가 질색하는 걸 이해 못 할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제 목숨이 달린 일인데 참 까탈스럽게 군다.

이대로 두면 정말 나올 것 같아 캐서린을 바라보았다. 제로니스가 그녀에게 약한 걸 알고 하는 눈짓이었다.

캐서린이 내 신호를 받고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는가 싶더니 제로니스에게 반대편을 손가락질하며 말했다.

“제로, 저기까지 헤엄치고 돌아와.”

아니, 그건 너무 먼데?

눈대중으로만 봐도 상당한 거리였다. 왔다 갔다 하는 데만도 체력 소모가 심할 터.

내가 당황해 만류하려는데 제로니스가 군말 없이 “알겠어” 하며 헤엄치기 시작했다.

막을 새도 없었다. 황당함에 제로니스와 캐서린을 번갈아 쳐다보자 그녀가 뿌듯한 얼굴로 물었다.

“나 잘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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