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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가 시집살이 너무 쉬운데요 (101)화 (101/177)
  • #101.

    티미가 메이벨을 보자마자 반가움에 못 이겨 손을 붙잡고 수선을 떨었다.

    “갑자기 사라져서 많이 걱정했었어. 대체 그동안 어떻게 지낸 거야?”

    “…….”

    “너 없어지고 나서 곧장 이스터스로 배정된 탓에 찾아보지도 못했었어. 원래라면 같이 들어갔어야 했는데…….”

    티미가 눈물까지 글썽이며 말을 이었다.

    “다행이야. 이렇게 살아서 잘 지내고 있었구나, 메이벨.”

    한눈에도 아는 사람 같은 태도였다. 그것도 아주 친밀한 사이처럼 보였다.

    반면 메이벨은 그를 전혀 알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기억을 잃은 척 연기하느라 그런 건지, 정말 초면인지는 알 수 없었다.

    내가 두 사람을 빤히 쳐다보자 메이벨이 붙잡힌 손을 쌀쌀맞게 떼 놓으며 말했다.

    “죄송하지만 사람 잘못 보셨어요.”

    “메이벨?”

    “그 이름은 제가 맞지만 전 그쪽을 오늘 처음 봐요.”

    “나야, 나. 티미! 노예상에게 함께 붙잡혔다 구출됐었잖아. 그때 너 없었으면 난 죽었을 거야. 정말 기억 안 나?”

    “모르겠어요. 저 아니에요.”

    티미는 거듭 부정하는 메이벨의 말에 허망한 표정을 지었다.

    툭 치면 울 것 같은 얼굴을 한 티미와 달리 메이벨의 얼굴은 점점 썩어 들어가고 있었다.

    모르는 사람에 대한 당황스러움보다는 불쾌감이 앞서는 얼굴이었다.

    ‘진짜 모르나 본데?’

    나는 메이벨이 진심으로 티미를 알지 못한다고 확신했다.

    기억을 잃은 척 거짓말을 하는 것과는 별개로 그녀가 그를 전혀 알아보지 못하는 모양새였으니까.

    나는 좀 더 알아볼 생각으로 입을 열었다.

    “너무 그러지 마, 티미. 메이벨은 사고로 어릴 적 기억이 없거든.”

    “예? 그게 정말인가요? 무슨 사고를 당했는데요?”

    티미가 놀란 눈을 하며 나와 메이벨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가 사고를 당했다니 놀란 것 같았다.

    아무래도 말단이다 보니 메이벨이 성녀가 된 줄도 잘 모르는 모양이었다.

    하긴 대놓고 성녀라고 하지 않고 워낙 조심스럽게 움직였으니 모를 만도 했다.

    아마 메이벨이란 이름도 흔하니까 동명이인이겠거니 생각했겠지.

    그때 메이벨이 곤란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로에나 님, 뭘 그런 이야기를 하세요.”

    메이벨의 표정에 불안이 깃들었다. 나와 티미가 대화하기를 원치 않는 눈치였다. 나는 메이벨을 살피며 티미에게 말했다.

    “메이벨의 지인은 처음 봐서 그렇지.”

    “지인 아니…….”

    나는 메이벨이 부정하기 전에 티미에게 냉큼 이야기했다.

    “실은 대공께서 스티그 섬에 고립된 메이벨을 구출했거든.”

    “네? 스티그 섬이요?”

    “당시 오염이 퍼지던 때라 대공께서 발견하지 못했다면 메이벨은 죽었을 거야.”

    “말도 안 돼! 메이벨, 너 대체 거긴 왜 간 거야? 혹시 또 나쁜 놈들에게 붙잡혔던 거야? 거긴 우리가 있던 곳이랑도 멀리 떨어진 곳이잖아.”

    티미의 요란한 질문 폭격에 메이벨이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이윽고 자리를 피하기로 마음먹었는지 서둘러 말했다.

    “저는 이만 가 봐야겠어요. 요 며칠 바쁘게 움직였더니 피곤이 몰려오는 것 같아요.”

    “응. 그렇게 해. 앞으로 성녀로서 할 일도 많을 텐데 쉴 때 쉬어야지.”

    “성녀요?”

    티미가 눈을 댕그랗게 뜬 채 되물었다. 역시나 요즘 난리인 성녀가 자신이 알던 메이벨일 줄은 꿈에도 모른 눈치였다.

    동시에 메이벨의 표정이 제법 험악해졌다. 내가 쓸데없이 저가 성녀라는 걸 언급한 게 못마땅한 것 같았다.

    물론 찰나에 지어진 표정이라 티미는 눈치채지 못했지만 내내 그녀만 쳐다보던 나는 바로 알아보았다.

    메이벨은 지금 무척이나 당황하고 있었다. 갑작스럽게 등장한 티미의 존재 때문에.

    ‘너 없어지고 나서 곧장 이스터스로 배정된 탓에 찾아보지도 못했었어. 원래라면 같이 들어갔어야 했는데…….’

    티미가 이 말을 했을 때 나는 깜짝 놀랐다. 그 장소가 내게 무척이나 익숙했으니까.

    원작상 메이벨이 본래 있었어야 할 곳은 스티그 섬이 아니라 이스터스였다.

    게다가 티미가 이스터스에 가기 전부터 메이벨을 알고 있었다니.

    이게 과연 우연일까?

    어쩌면 메이벨이 향했어야 할 곳은 스티그 섬이 아니라 원작대로 이스터스였을지도 몰랐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녀가 제 자리를 이탈하고 스티그 섬으로 향한 것 같았다.

    메이벨이 거짓말을 했다는 걸 몰랐다면 그냥 넘어갔겠지만 나는 아니었다.

    ‘구린내가 나는데.’

    티미는 그녀를 알지만 그녀는 티미를 모른다.

    기억을 잃어서라기엔 그녀는 기억을 잃은 적이 없다. 잃은 척만 했을 뿐.

    이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빙의해 본 나로서는 확실했다.

    그녀도 나처럼 누군가의 몸에 빙의를 한 게 분명하다고. 그런 게 아니라면 과거에 만난 티미를 전혀 기억 못 할 리가 없었다.

    촉이 왔다. 티미를 곁에 두면 메이벨의 꿍꿍이도 알아낼 수 있을 것 같다는 촉이.

    이스터스로 가기 직전 도망쳐 스티그 섬으로 간 이유만 알아낸다면, 메이벨의 진짜 목적도 알 수 있겠지.

    나는 메이벨의 의도를 파악할 수 있는 건수를 찾은 게 기뻐 싱긋 웃으며 티미에게 말했다.

    “몰랐나 보구나. 요 며칠 떠들썩했던 성녀가 바로 메이벨이었는데.”

    * * *

    회랑을 지나는 메이벨의 표정이 사납게 일그러졌다. 갑작스럽게 친한 체하던 티미라는 놈 때문에 머릿속이 심란해진 탓이었다.

    ‘내가 이래서 프로디움엔 오기 싫었는데……!’

    프로디움은 과거 ‘진짜 메이벨’이 주로 활동하던 곳이었다.

    그러니 아는 사람을 마주하게 되는 상황쯤은 그녀도 예상하지 못한 건 아니었다.

    문제는 하필 로에나의 앞에서 마주친 게 화근이었다. 기억을 잃은 척하며 살아온 터라 티미를 떼어 낼 수도 없게 되었으니까.

    거기서 계속 고집을 부렸다면 로에나의 의심을 샀을지도 몰랐다.

    지금도 충분히 곁을 내주지 않는 로에나라서 메이벨은 속이 바짝바짝 탔다.

    ‘별 같잖은 게 어디서 친한 척이야.’

    애초에 몸을 바꾸기 이전의 진짜 메이벨의 기억을 그녀가 갖고 있을 리 없었다.

    목숨을 건 흑마법을 성공시킨 후 곧장 스티그 섬에 있는 옛 신전으로 소환되었으니까.

    아마도 그 이전의 시간선에서 만난 자임이 분명했다. 생각보다 성가셔졌다.

    로에나 앞에서 맞닥뜨리지만 않았어도 소리 소문 없이 죽여 버렸을 텐데.

    하지만 로에나가 알게 된 이상 티미를 죽이는 건 위험 부담이 컸다.

    메이벨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성급하게 복도를 가로질렀다. 그러다 마주 오는 사람을 발견하지 못하고 부딪쳤다.

    “아, 씨…….”

    메이벨이 신경질적으로 고개를 들다 멈칫했다. 부딪친 상대가 아키드인 탓이었다.

    “대공자님.”

    메이벨이 한 걸음 뒤로 물러나 표정을 갈무리했다. 로에나에 이어 아키드까지 마주치니 신경이 예민해질 대로 예민해졌다.

    사실 그녀는 로에나보다도 아키드가 더욱 불편했다. 대공가 사람들 중에서 그를 다루는 게 제일 어려웠으니까.

    처음 봤을 때부터 꺼림칙한 사내였다. 그와 만난 건 메이벨일 때뿐만이 아니었기에 더더욱.

    과거 사사건건 저를 방해하려 들었던 것만 생각해도 가까이하고 싶지 않았다.

    “그럼 저는 이만.”

    “잠깐.”

    아키드는 도망가려는 메이벨을 부른 채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내려다보았다.

    “로에나에게 다녀가는 길인가?”

    “아, 네. 맞아요. 오셨다는 소식을 듣고 안부 인사차 다녀왔답니다.”

    “파블로가 생각보다 입이 가볍군. 이곳에 오는 건 비밀이었는데.”

    “제가 우연히 들은 것뿐이에요. 예하께선 잘못이 없답니다.”

    정확히는 엿들은 거였다. 파블로는 메이벨에게 호의적인 사제였다.

    설마 성녀가 흑마법사일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하는 어리숙한 자이기도 했다.

    얼굴만 험악하지 실은 순해 빠진 자라 속여넘기기도 수월했다.

    메이벨은 두 사람이 이곳에 온 게 비밀씩이나 되는지 의아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굳이 비밀일 것까지 있나요?”

    “편하게 쉬다 가고 싶었거든.”

    아키드가 씨익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미리 말하지만, 난 내 휴식을 방해하는 걸 몹시 싫어해. 여기 있는 동안 로에나와 단둘이 오붓하게 보낼 예정이야.”

    “…….”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했나?”

    그 말은 이곳에 있는 동안 이쪽에는 얼씬도 하지 말라는 경고였다. 그녀가 불편하니까.

    아니, 정확히는 로에나를 혼자서 독차지하고 싶다는 뜻 같았다.

    메이벨은 그의 집착 어린 모습에 눈살이 찌푸려졌다. 이건 조금 예상 밖이었다.

    그가 아내에게 애정을 갖고 있을 줄은 그녀 자신도 예측하지 못한 탓이었다.

    고작 시간 하나 바뀌었을 뿐인데 많은 게 변해 버렸다.

    하긴 이전에도 의뭉스러워 속내를 알기 어려운 사람이었으니 아예 의외인 것도 아니었다. 그 탓에 ‘진짜 메이벨’조차도 이자를 끝까지 믿지 못하지 않았나.

    메이벨은 로에나의 존재가 거슬렸다. 그녀만 없었어도 대공가를 쥐락펴락할 수 있었을 테니까.

    그랬다면 든든한 우방을 얻어 저 꼴 보기 싫은 여자를 치워 버릴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메이벨은 아키드에게서 풍기는 위압감에 몸을 떨며 고개를 수그렸다.

    저야말로 아키드와는 마주치고 싶지 않을뿐더러 이곳에 계속 들락날락하다 티미를 마주치는 것도 사양이었다.

    적당한 핑계까지 주니 오히려 고마울 지경이었다. 그녀가 잔뜩 겁에 질린 척하며 중얼거렸다.

    “네. 잘 이해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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