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공가 시집살이 너무 쉬운데요 (100)화 (100/177)

#100.

“네. 아키드의 어둠 속성은 기본적으로 공격이 특징이죠. 상대를 삼켜 전투 불능의 상태로 만드는 힘이니까요.”

나는 흰둥이의 발을 손으로 와락 움켜잡는 시늉을 하곤 이어 말했다.

“반면에 대지 속성은 방어가 기본 특성이에요. 상대의 공격을 막아 내어 누군가를 지키는 힘이지요.”

그 말과 함께 흰둥이와 하이파이브를 하는 시늉을 했다. 정확히는 서로 튕기는 힘을 표현한 행위였다.

제로니스가 내 말을 한참 곱씹는가 싶더니 되물었다.

“그러니까 대공자비의 말은, 내 힘이 너무 강해서 오히려 각성을 막고 있다는 뜻인가?”

여전히 알쏭달쏭하게 여기는 기색이라 내가 설명을 보태었다.

“정확히는 자파르시아의 마나를 해로운 것으로 여겨 막는 게 아닐까, 추측하고 있어요. 그 탓에 전하께서 아키드보다 발작 주기가 더 잦았던 거고요.”

내가 말을 마치자 내내 듣고 있던 아키드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일종의 거부 반응이군요. 그렇다면 대지 속성이 무력화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게 도움이 될지도 모릅니다.”

“네. 맞아요. 그리고 그럴 수 있는 최적의 환경이 마침 북부에 하나 있죠.”

“대체 거기가 어디지?”

제로니스는 얼른 답해 달란 듯이 나를 재촉했다. 내가 배시시 웃으며 뜸을 들이자 아키드가 말했다.

“프로디움의 인공 호수. 물은 땅과 상극이니 자파르시아의 마나가 풍부한 호수 속에서는 대지 속성도 힘을 쓰기 어렵겠지요.”

“정확해요!”

역시 내 남편!

나는 아키드의 발 빠른 추리력에 엄지를 척, 들어 보였다.

어쩜 이렇게 똑똑할 수가.

정답을 맞혔다는 핑계로 입 안에 넣고 와랄랄라 하고 싶은 걸 꾹 참았다.

“아마 제 가설이 맞는다면 호수에 빠진 즉시 신호가 올 거예요.”

“좋아. 황실의 마법사에게 자문을 구해 보겠어.”

제로니스는 환해진 안색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로부터 얼마 후, 황가에서 답신이 도착했다. 혹시 모를 각성을 대비해 기사단을 보충해 주겠다는 내용이었다.

* * *

“젠장, 더럽게 많네.”

데미안이 마수의 피가 묻은 검을 털어 내며 신경질을 부렸다. 그의 주변엔 마수의 사체가 잔뜩 널브러져 있었다.

오염이 시작된 시기가 하필 마수 발발 시기와 겹쳐 아주 죽을 맛이었다.

흑마법사가 이런 식으로 저를 공격할 줄이야.

데미안은 어쩐지 한 방 먹은 것 같아 어이가 털렸다.

“치졸한 놈들.”

이로써 흑마법사가 오염을 자유자재로 일으킬 수 있다는 게 확인되었다.

내내 떡밥을 던져도 물지를 않더니 이번에는 꽤 열받은 모양이었다.

데미안은 제가 던진 폭탄이 제대로 먹힌 게 기분 좋아 히죽거렸다.

7년간 잠잠하더니 이제 와 오염을, 그것도 하델루스령이 있는 북부에 일으킨 건 명백한 의도가 담긴 것이었다.

일종의 경고였다. 계속 흑마법사를 파고 다니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선전포고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건 데미안도 바라는 바였다. 정체를 숨긴 채 질질 끄는 건 딱 질색이었다.

차라리 선제공격해 상대가 허점을 보이도록 할 속셈이었다.

흑마법사들만 소탕하면 로에나가 정령사임을 밝히지 않아도 되고, 설령 밝혀지더라도 힘들일 필요가 없을 테니까.

이런 제 깊은 속도 모르고 저를 한심하게 바라보던 로에나를 떠올리니 속이 쓰렸다.

이래저래 제 속을 알아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물론 그의 방식이 잘못되었다는 걸 스스로는 모르고 있다는 점이 가장 큰 문제였지만, 그로선 그 사실을 알 턱이 없었다.

“그것보다 뭔가 이상하단 말이지.”

대공이 검집에 검을 넣으며 사색에 잠겼다. 북부에서 재개된 오염은 산발적으로 퍼져 마수 청정 지역에도 마수가 들끓었다.

원래 오염의 진원지를 중심으로 마수가 들끓기 시작하는 패턴과는 사뭇 달랐다.

마치 오염을 핑계 삼아 마수를 소환시킨 것 같은 꺼림칙한 느낌이었다.

‘그러고 보면 마수와 흑마법사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긴 하지.’

애초에 마수가 생긴 이유도 흑마법사 때문이었다.

오염에 노출된 동물이나 열성(劣性)의 신수가 오염을 버티지 못하고 전염되어 만들어진 게 마수였으니까.

소극적이던 이전과 달리 꽤 적극적으로 공격을 하는 터라 대공도 타격을 받고 있었다.

일단 다른 것을 조사할 겨를이 없어졌다는 점이 가장 큰 타격이었다.

오염으로 하델루스 기사단의 절반이 뿔뿔이 흩어져 토벌 중이었다.

매일 나가서 마수를 잡고 돌아오는 것도 체력에 부치긴 하나 문제는 이러한 일이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다는 점이었다.

아마 이를 통해 대공가의 세력을 분산시켜 추격을 늦추려는 의도인 것 같았다.

하지만 헛수고였다. 어차피 흑마법사를 파헤치는 가문은 대공가만이 아닌 데다 그에겐 성녀가 있었으니까.

메이벨의 활약 덕에 한시름 놓은 상황이었다. 물론 정말 한시름만 놓았을 뿐이었다.

대공은 무언가 찜찜한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메이벨이 합류해 편해진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더 나아지는 것도 아니라 그랬다.

“꼭 두더지 게임 같단 말이야.”

두더지가 머리를 내밀었다가 넣었다가 반복하는 것처럼, 오염을 없애면 그것보다 더한 오염이 다른 곳에 넓게 생기기를 반복하는 탓이었다.

휴식과 바쁨이 주기적으로 발생하니 그들에게 농락당하는 기분이었다.

물론 메이벨마저 없었다면 더더욱 곤란했을 터라 대공은 제 할 일을 할 뿐이었다.

본성에 복귀한 대공은 샤워를 마치고 곧장 서재로 향했다. 밀린 업무가 산더미였다.

피로감 가득한 얼굴로 서류를 살피는데 서신 하나가 눈에 띄었다. 로즈 나탈리에게서 온 서신이었다.

지난번부터 최초 고발자와 대화하고 싶다고 자꾸만 서신을 보내는 터라 조금 곤란했다.

아마도 제 잘못된 해석에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지는 때가 있다 해도 충격까지 없어지는 건 아닐 터였다.

대공과 흑마법사의 싸움에 본의 아니게 나탈리 가문이 새우 등 터진 상황이기는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로에나의 신변에 해가 될 정보를 줄 수는 없었다.

여러 번 거절하니 이제는 그녀도 포기했는지 편지는 간결했다.

[고발자의 신상을 보호해야 한다는 대공 전하의 의견은 잘 이해했습니다.

학계의 논란을 잠재우려면 꽤 시간이 걸리겠지만 필요한 일이라 생각합니다.

조만간 수습을 위해 북부에 들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때 뵙지요.]

서신을 보아하니 직접 와서 해결할 모양이었다.

박물관이 북부에 있고, 유물 매립지가 북부에 많으니 직접 와서 다시 살필 요량인 듯했다.

대공은 대수롭지 않게 방문을 허락한다고 답신을 하고 남은 서류 작업에 매진했다.

* * *

나는 곧장 파블로에게 프로디움에 방문하고 싶다는 서신을 보냈다.

가급적이면 인공 호수 근처의 숙소를 모조리 빌렸으면 좋겠다는 말에 파블로는 순순히 허락했다.

그간 하델루스가와 쌓은 인연 덕이기도 하고, 으레 그러려니 하는 것 같았다. 원래부터 건물을 통째로 빌리던 사람들이니까.

이번 계획은 간단했다. 나와 아키드가 프로디움 안에서 제로니스를 보호하고, 바깥에선 황궁에서 보낸 지원병이 혹시 모를 위험을 대비한다.

방문 목적은 단순한 휴양이었다. 프로디움은 외부와 단절된 지형이라 쉬고 가기 좋아 적당한 핑계였다.

물론 제로니스와 캐서린이 프로디움을 방문하는 건 비밀이었다.

도착하고 나서 관광을 하는 척 본격적으로 호수에 드나들 생각이었다. 프로디움에 도착하자 낯익은 얼굴이 우리를 반겼다.

“그때는 정말 감사했습니다, 대공자비님.”

지난 행사에서 성수가 든 잔을 깨 먹고 피를 흘려 가며 유리 조각을 줍던 시종이었다.

다친 곳은 다 나았는지 손이 멀쩡했다. 내가 바로 알아보며 대답했다.

“다친 곳은 다 나았나 보네.”

“네. 처치를 빨리한 덕에 덧나는 걸 막았습니다. 대공자비님과 대공자님의 배려 덕분이에요.”

시종이 볼을 붉히며 제 소개를 이었다.

“저는 티미라고 합니다. 계시는 동안 불편함 없도록 잘 살필게요.”

어쩐지 의욕이 가득한 걸 보니 지난번에 정말 고마웠던 모양이다. 열심히 하려는 모습이 보기 좋아 덩달아 미소 지었다.

“그럼 부탁할게, 티미.”

“맡겨만 주세요.”

티미가 인사를 하고 나가려는 때였다. 노크와 함께 메이벨이 들어왔다.

“로에나 님.”

“메이벨? 네가 여긴 어쩐 일이야?”

나는 메이벨의 등장에 적잖이 당황했다. 그녀는 요즘 대공만큼이나 바쁜 사람이었다. 최근 오염이 시작되면서 출장이 잦았으니까.

한데 웬일로 프로디움에 머무는지 몰랐다. 이런 내 의문을 알기라도 하듯 메이벨이 말을 이었다.

“급한 일이 끝나 마침 쉬는 중이었거든요. 파블로 예하께 로에나 님이 오셨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왔어요.”

휴식이 맞물린 모양이었다. 파블로가 그녀의 후견인이니 우리가 온다는 소식도 들었을 터였다.

그녀는 내 시녀이기도 하니까 숨길 이유가 없었겠지.

“그랬구나. 너도 바쁠 텐데 굳이 이쪽은 신경 안 써도 돼. 쉴 때는 쉬어야지.”

“아니에요. 제가 하던 게 있는데 해야죠. 이젠 이곳은 제가 로에나 님보다 더 잘 알걸요?”

메이벨이 사근사근한 어투로 말하며 이곳에 있는 동안 자주 찾아오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놀러 온 게 아닌 만큼 메이벨의 끈질김이 불편했다.

적당히 끊어 내려는데 아직 가지 않고 있던 티미가 놀란 눈으로 말했다.

“메이벨? 너 정말 메이벨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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