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공가 시집살이 너무 쉬운데요 (99)화 (99/177)
  • #99.

    “……아뇨. 사실 그때 우연히 뵙기는 했어요.”

    메이벨이 어물쩍 넘어가며 씨익 웃었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되물었다.

    “그래? 그땐 그런 말 없었잖아.”

    “헤매느라 기진맥진해서 말한다는 걸 깜박했나 보네요.”

    메이벨이 자연스러운 핑계를 대며 엷은 미소를 내비쳤다.

    너무 당당해서 거짓말을 하는 줄은 꿈에도 모를 표정이었다.

    역시 여간내기가 아니었다. 슬쩍 떠보았는데 구렁이가 담 넘듯이 훌렁 넘기는 솜씨가 대단했다.

    그날 이후 왠지 꺼림칙해 정기 회의에는 메이벨을 데려가지 않았다. 수도에 따라가고 싶어 하는 기색을 보여도 무시하기도 했고.

    “아, 맞다. 약혼녀도 함께 왔어.”

    “네? 에셀 영애는 왜…….”

    메이벨은 이해되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마도 먼 북부까지 함께 온 게 의아한 모양이었다.

    지난해 여름, 캐서린과 제로니스가 약혼을 했다.

    원작에서 캐서린이 그와 약혼을 하고 싶어 별의별 계책을 부려도 못했던 것과 달리, 현실에서 두 사람의 약혼식은 순조로웠다.

    무엇 하나 방해하는 것 없이, 두 사람 모두 서로를 배우자로 맞이할 것에 거부감이 없었다. 원작과는 다르게도 말이다.

    분명 메이벨을 만나기 전까지도 제로니스에게 약혼자가 없던 것과 비교하면 이상한 일이었다.

    하지만 직접 그 약혼식에 참석했던 나는 두 사람이 서로를 좋아하고 있다는 걸 믿어 의심치 않았다.

    결국 원작이 시작하기도 전에 남주에게 여자가 생긴 격이었다.

    나는 졸지에 낙동강 오리 알 신세가 된 메이벨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제로니스와 캐서린의 결합은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었다.

    내가 이곳에서 그간 조금 다른 행보를 보였다 해도, 원작이 시작하기도 전에 이어진 두 사람에게 내가 무슨 수로 영향을 줄 수 있을까. 그것도 북부에서 수도까지 말이다.

    결국 나 말고 이 세상에 변수가 더 있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난 그것이 눈앞의 여주일 거라고 생각했다. 내가 의미심장한 웃음을 띤 채 말했다.

    “그야, 서로 떨어지기 싫은가 보지.”

    “…….”

    “아직 연애 초반이잖아.”

    내가 얼른 뒷말을 덧붙이며 무해한 미소를 덧그리자 메이벨이 작게 중얼거렸다.

    “그래도 바깥일 하는 사람을 따라오는 건 조금 아니지 않나 해서요. 놀러 온 것도 아니고, 대륙의 사활이 걸린 시급한 때인데.”

    은근히 캐서린을 책망하는 듯한 어조였으나 누구나 생각할 법한 지적이었다.

    어쨌든 제로니스가 공적인 업무로 온 건 사실이었으니까. 캐서린이 동행한 게 극성맞아 보일 수 있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동행한 건 이유가 있었다. 제로니스가 이곳에 온 목적이 꼭 성녀의 출현 때문만은 아니었으니까.

    구태여 이걸 메이벨에게 설명할 필요는 없었다. 그녀가 내게 무언가를 감추듯 나 역시 그녀에게 감추는 데 익숙하니까.

    “뭐, 그건 두 사람의 사정이니까.”

    “그래도…….”

    “듣자 하니 전하께서 같이 오자고 했다더라고. 원래 좋아하는 사람이 곁에만 있어도 든든한 법이거든.”

    “…….”

    메이벨은 대답하지 않고 손을 만지작거렸다. 언뜻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말에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는 것 같았다.

    한 번 만난 상대에게 드러내는 감정치고는 깊어 보였다.

    나는 어쩌면 메이벨이 이전부터 제로니스를 알고 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이건 그저 내가 예민한 걸 수도 있기에 대놓고 묻지는 않았다.

    “어쨌든 전하와 캐시가 본성에 머물게 되었으니까 그렇게 알고 있으라고.”

    “네, 그럴게요.”

    메이벨이 꾸벅 인사하는가 싶더니 대공을 뵈러 가겠다며 자리를 떠났다.

    * * *

    제로니스가 파견단의 대표로 온 건 사실 그의 늦은 각성 때문이었다.

    그는 이미 성인식이 훌쩍 지났음에도 각성기 증상을 전혀 보이지 않았다.

    발작은 발작대로 하고 각성은 하지 않으니 황가도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원작에서도 이와 비슷했기에 그리 놀라울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당사자들에겐 꽤 심각한 문제였다.

    마침 같은 병을 앓던 아키드가 작년 겨울 각성을 마치자 북부의 일을 핑계 삼아 직접 걸음 한 것이었다. 혹시 단서가 될 만한 게 있을까 하고.

    나와 아키드, 제로니스와 캐서린이 한자리에 모여 그 이야기를 시작했다. 제로니스가 먼저 축하를 건넸다.

    “각성을 무사히 마친 걸 축하하네, 아키드 경.”

    “감사합니다, 전하.”

    아키드가 정중히 대답하자 제로니스가 바로 본론을 꺼내었다.

    “몸은 좀 어떤가? 발작은 더는 안 하는 건가?”

    “예. 각성 이후로 발작 증세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 덕에 프로디움에 가는 주기도 대폭 줄였고요.”

    “그렇군.”

    제로니스가 화색을 보이자 아키드가 말을 이었다.

    “각성 전에는 별다른 증상이 없었습니다. 직전에 어지럼증이 조금 있는가 싶더니 몸 안의 마나가 튕겨 나갈 듯이 부글부글 끓기 시작했습니다.”

    “보통의 각성 증세와 흡사하군. 발작 증세와는 얼마나 달랐나?”

    “발작 증세가 마나가 터질 듯이 부푸는 느낌이라면 각성할 때는 퍼져 나갈 듯이 몸에 스며드는 기분이었습니다.”

    “하아, 정말 영문을 모르겠군. 경은 제때 각성을 했는데 나는 왜 아직도 그대로인지.”

    “제로…….”

    제로니스가 답답한지 연신 한숨을 내뱉자 곁에 있는 캐서린이 울상을 지었다.

    나는 초조해 보이는 두 사람을 보며 그간 생각한 것을 말할까, 말까 고민했다.

    사실 그의 각성이 늦어지는 게 꼭 그의 힘이 너무 강해서만은 아닐지도 몰랐다.

    어쩌면 황가 특유의 속성 때문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건 내가 빙의한 지 꽤 지난 후에야 생각한 가설이었다.

    빙의 초기에는 이 세계의 마법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서 생각조차 못 하다가 최근에야 든 의문이 하나 있었다.

    ‘애초에 자파르시아의 놀이터였던 아칼리무트에서 살고 있는 제로니스의 각성이 왜 늦을까.’

    환경적인 측면에서 아키드보다 월등히 좋은 위치에 있는 제로니스였다.

    한데 아키드보다 늦게 각성하는 건 뭔가 다른 문제가 있다는 것이리라.

    나는 그게 그가 지닌 대지 속성의 특징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여겼다.

    적의 오감을 마비시켜 삼키는 공격계 어둠 속성과 달리 대지 속성은 방어, 즉 막는 데 집중하는 마법이었다.

    뚫을 수 없는 방패 같은 대지 속성이 자파르시아의 기운을 온전히 흡수하지 못하게 막는 거라면 그걸 뚫어 주는 것만으로도 각성을 촉진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내가 이 가설에 무게를 두는 건 원작에서 그 역할을 했을지도 모를 사건이 있어서였다.

    원작에서 제로니스의 각성이 시작된 곳은 프로디움이었다.

    당시 프로디움을 방문한 제로니스는 인공 호수에서 수영하던 메이벨을 보고 물에 빠진 줄 알고 착각해 구했었다.

    그리고 바로 그날 밤 제로니스의 각성이 시작되어 메이벨이 간호를 했었고.

    잘만 수영하던 사람을 갑자기 물 밖으로 끌어낸 것도 모자라 간호까지 할 상황에 메이벨이 황당해하던 바로 그 사건.

    게다가 그녀가 수영하던 곳은 프로디움의 인공 호수이자 자파르시아가 생전에 수영을 즐겼다던 곳이었다.

    유독 마나가 풍부해 주변을 산책하는 것만으로도 아키드가 두 번째 발작을 일으키게 한 바로 그곳.

    어쩌면 대지와 상극인 물의 영역에 빠져서 그간 막힌 게 뻥 뚫리게 된 걸지도 몰랐다.

    만약 내 가설이 맞는다면 제로니스의 각성을 당길 수도 있지 않을까?

    또한 내 덕에 각성하게 되면 황실이 하델루스가에 빚을 지게 되는 것이었다. 황가에 빚을 만들어 둔다면 어느 때든 도움이 될 터.

    나는 머릿속에서 계산을 마치고 불안해하는 두 사람을 향해 빙그레 미소 지었다.

    “전하, 해답은 가까운 곳에 있던 걸지도 몰라요. 제게 좋은 수가 떠올랐는데 한번 들어 보시겠어요?”

    영업용 미소를 짓자 제로니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해 보라 했다. 나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입을 열었다.

    “혹시, 수영 좋아하세요?”

    “여기서 갑자기 수영 이야기는 왜 나오는 거지?”

    제로니스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설명을 요구했다. 나는 예의 영업용 미소를 유지한 채 입을 열었다.

    “일단 이건 제 가설일 뿐이니까 참고만 해 주세요.”

    “좋아.”

    “아칼리무트에 머무시는 전하께선 아키드보다 훨씬 더 좋은 환경이지요. 그런데 왜 각성은 아키드가 먼저 했을까요?”

    “그걸 모르니 불안한 거지.”

    “애초에 조금 이상하지 않아요? 미각성 발작이 각성 전에 힘을 쓸 수 있어 생기는 병인데, 전하께선 오히려 일반인보다 각성이 늦어지고 계시잖아요.”

    “하고 싶은 말이 뭐지?”

    제로니스는 얼른 본론을 꺼내란 듯이 재촉했다. 나는 흰둥이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제가 흰둥이를 키우면서 대지 속성에 대해 공부를 좀 했는데요. 그러다 보니 한 가지 가설이 떠올랐어요. 어쩌면 전하의 속성이 각성을 더디게 만드는 걸지도 몰라요.”

    “내 힘이 각성을 더디게 만들었다고?”

    제로니스가 의외의 말에 두 눈을 둥그렇게 떴다. 캐서린과 아키드도 덩달아 내게 집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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