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공가 시집살이 너무 쉬운데요 (98)화 (98/177)
  • #98.

    “네. 만찬장으로 바로 가실 거죠?”

    “응. 그래야지.”

    “햇볕이 따사로우니 챙이 넓은 모자를 쓰고 가세요.”

    메이벨이 익숙하게 시중을 들며 나를 따라나섰다.

    시간 맞춰 만찬장에 가니 아키드가 이미 와 있었다. 이번 행사는 봄을 맞아 꽃차를 함께 나눠 마신다고 했다.

    프로디움에서만 생산되는 성수로 끓인 차는 맛은 물론 영양도 듬뿍이라 많은 손님이 찾아왔다.

    이 행사를 적극 후원한 하델루스가를 대표해 아키드와 내가 행사에 참여한 것이었다.

    정해진 자리에 앉아 북적이는 정원을 가만히 감상할 때였다. 꽃차를 따라 주는 시종 하나가 지나가던 사람과 부딪쳐 넘어졌다.

    쨍그랑, 주전자 깨지는 소리와 함께 시선이 시종에게로 모였다. 아까운 성수를 다 쏟아 버려 주변에서 안타까운 탄성이 내뱉어졌다.

    평소에도 성수는 인당 한 병밖에 제공받지 못해 더욱 그랬다.

    시종이 새빨개진 얼굴로 헐레벌떡 일어나 깨진 조각을 치웠다.

    맨손으로 치워 결국 손이 베였는지 움직임이 굼떠졌다. 다치고도 계속해서 조각을 홀로 치웠다.

    이미 사람들은 시종에게 관심을 끊고 대화하기 바빴다. 군중 속에서 외롭게 주저앉아 있는 시종이 어쩐지 안쓰러웠다.

    나라도 도와줘야겠다 싶어 자리에서 일어나 시종에게 다가갔다.

    “그만 만져. 손으로 하면 다치니까.”

    “아, 아뇨, 제가……!”

    “시녀에게 쓸어 담을 것을 가져오라 했으니 여긴 신경 쓰지 말고 치료부터 받고 오렴.”

    나는 다친 손으로 계속 유리 조각을 주운 탓에 엉망이 된 시종의 손을 턱짓하며 손수건을 건넸다.

    시종이 손수건을 마다하며 횡설수설했다.

    “아, 아뇨. 제가 저지른 실수는 제가 수습하겠습니다. 소란을 일으켜 죄송합니다.”

    “그대로 두면 덧날지도 몰라.”

    “괜찮…….”

    부끄러움에 얼굴이 새빨개진 시종이 고집스럽게 사양하려 하자 아키드가 막았다.

    “이럴 시간에 치료받고 오는 게 나을 것 같은데. 소란은 그쪽이 더 키우는 것 같고.”

    어쩐지 못마땅함이 가득한 눈초리였다. 그가 냉랭한 눈으로 거듭 물었다.

    “아직도 안 가고 뭐 하고 섰지?”

    “흡! 다, 다녀오겠습니다!”

    시종은 아키드의 차가운 눈빛에 화들짝 놀라며 황급히 사라졌다. 여기서 더 거부했다간 아키드에게 화를 당할 것 같았던 모양이다.

    “조심해요. 위험하니까.”

    아키드는 언제 시종을 위협했냐는 양 나를 유리 조각이 있는 곳에서 멀찍이 떨어지게 했다.

    혹여라도 내가 유리 조각에 발을 다칠까 염려하는 것 같았다.

    뒤이어 메이벨이 데려온 다른 시종이 와서 깨진 유리 조각을 치우기 시작했다. 메이벨은 구두가 젖을까 멀찍이 떨어진 채였다.

    참 이상한 일이다. 내가 아는 메이벨이라면 이런 일에 앞장서서 나설 텐데.

    소동이 잠잠해지자 도로 행사가 진행되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계속되지 못했다. 저 멀리 신관 하나가 사색이 된 채 이쪽으로 달려왔다.

    “대, 대공자님!”

    “무슨 일이지?”

    “급히 안으로 가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 말과 함께 신관은 이번 행사는 잠시 중단하겠다며 손님들을 귀가 조치시켰다.

    어리둥절한 채 뒤따라 들어가자 파블로가 대기하고 있었다. 그가 우리를 발견하고 어두운 얼굴로 말했다.

    “오염이 발생했습니다.”

    나는 드디어 시작된 오염에 입술을 꽉 말아 물었다.

    * * *

    북부에서 오염이 발생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스티그 섬에서 발생했던 오염은 뜬금없이 북부에서 재발되었다.

    그것을 시작으로 오염이 퍼지는 속도가 예상보다 빨랐다. 스티그 섬의 오염이 서서히 진행되던 것과 비교하면 굉장한 속도였다.

    북부에 소속된 신전 사제들만으로는 진압이 어려웠다.

    언제고 이런 때가 오리라 예상했던 터라 크게 놀랍지는 않았다.

    그간 축적된 오염을 한 번에 터트린 것이니 파급력이 큰 건 당연하니까.

    원작에서도 산발적으로 오염이 끓다 북부에도 번졌기에 놀라울 일은 아니었다.

    죽음이 눈앞에 다가온 건 조금 두렵지만 정령이 있어 긴장이 덜 되었다.

    오히려 나보다 긴장한 사람은 따로 있었다.

    “이런 날이 오지 않길 바랐는데.”

    하델루스 대공이 손깍지에 이마를 댄 채 심각한 음성을 내뱉었다. 그러자 곁에 있던 엘레나가 호응했다.

    “아직 새아가의 각성기가 되려면 두 달은 더 남았는데 이를 어쩌면 좋을지.”

    적어도 각성기를 거친 후에 내가 정령사임을 공개하고 싶어 했던 두 사람의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했다.

    본의 아니게 수심의 원흉이 된 게 조금 미안했다. 실은 올해 내가 죽을 수도 있다는 걸 알면 더 난리가 날 것 같아 어색하게 웃기만 했다.

    “하아.”

    “에휴.”

    두 사람이 동시에 한숨을 내뱉다 질색하며 서로를 노려보았다.

    왜 따라 하냐는 얼굴에는 노골적인 불쾌감이 섞여 있었다.

    하지만 원작에서 본 두 사람의 모습보다는 조금 부드러운 반응이었다.

    원작 속 그들이었다면 이렇듯 긴급 가족회의를 열 리 없으니까. 아키드가 이번 회의의 본론을 꺼내었다.

    “신관 쪽에서 메이벨을 요구한다고 들었습니다.”

    “그래. 애초에 오염이 다시 시작되면 신전으로 돌려보내는 조건으로 입양을 시켰으니까.”

    대공이 피곤한 낯으로 미간을 매만졌다. 메이벨을 해링턴가에 입적시키기 전, 대공은 프로디움의 파블로와 거래를 했다.

    신전 내부에 쥐새끼가 있으니 오염이 시작되기 전까지는 하델루스가에서 성녀를 보호하겠노라고.

    파블로 역시 지난 오염이 흑마법사의 짓이며, 신전 내부에 흑마법사가 섞여 있음을 인지한 상태라 흔쾌히 거래에 응했다.

    둘 사이에 오간 거래는 두 사람만이 알았다. 그만큼 철저하게 비밀에 부쳐진 거래였다.

    성녀가 성인식을 치를 때까지만이라도 대공이 보호하기로 한 것인데, 그전에 오염이 북부에서 다시 시작되었으니 난감했다. 엘레나가 말했다.

    “어차피 이럴 때를 대비해 거둔 아이이니 뜻대로 하게 하죠.”

    “그거야 그렇지만. 아무래도 대공비께서 수고해 주셔야겠습니다.”

    “황실 때문이라면 걱정하지 마세요. 이미 저도 각오하고 동참했던 일이니.”

    엘레나가 별거 아니란 듯이 새침하게 대답했다. 애초에 이런 최악의 상황을 염두에 둔 일이었다.

    황실에도 알리지 않고 보호한 성녀였다. 황제가 알면 크게 노할 테니, 엘레나는 그의 화를 잠재울 역할을 도맡을 작정이었다.

    내 각성기가 얼마 남지 않았으니 메이벨을 먼저 등판시키는 게 시간을 벌기 좋았다.

    각성 후에 정체를 드러내는 쪽이 훨씬 안전하니까. 어차피 내가 살려면 오염을 정화해야 하니 위험한 상황만 피하면 됐다.

    “그럼 각자의 역할을 하죠.”

    엘레나가 기합이 잔뜩 든 목소리로 말한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황실에 연락하러 갈 요량인 것 같았다. 대공이 덩달아 일어나 악수를 청했다.

    “살아서 만납시다.”

    “그쪽이 죽든 말든 내 알 바는 아닌데요.”

    엘레나가 악수를 무시하고 쌩하니 돌아갔다.

    “까칠하기는.”

    대공이 주먹을 쥐었다가 펴는가 싶더니 태연하게 손을 물렸다. 애초에 기대도 안 한 눈치였다.

    여전히 사이가 좋은 듯 나쁜 듯 애매모호한 두 사람이라 이젠 티격태격하는 것조차 정겨워 보일 지경이다.

    * * *

    오염이 시작되자 대공가는 비상이 걸린 채 바쁘게 돌아갔다.

    다행히 메이벨이 합류하자 무서운 기세로 퍼지던 오염이 잦아들었다. 아직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이 정도면 대단한 성과였다.

    이 일로 더는 메이벨의 정체를 숨길 수 없어졌다.

    성녀의 출현에 오염으로 두려워하던 북부민들이 너도나도 성녀를 찬양하기 바빴다.

    며칠 새 영웅이 되어 돌아온 메이벨이 고개를 수그렸다.

    “다녀왔습니다.”

    튜닉 형태의 달마티카를 입은 모습은 영락없는 성녀였다. 그녀 곁에는 같은 디자인의 옷을 입은 사제가 두서넛 더 있었다.

    “대공을 뵈러 왔습니다.”

    사제의 낯에는 까칠함이 역력했다. 그간 성녀를 숨긴 것에 대한 무언의 항변이었다.

    다행히 파블로가 잘 설득했는지 고소는 당하지 않았다. 뭐, 고소해 봤자 꿈쩍도 안 할 대공이었지만.

    사제들이 대공을 보러 간 사이 메이벨이 내게 와 다정히 말했다.

    “그간 별일 없으셨죠?”

    “나야 뭐, 성에서 지냈지.”

    오염이 어디서 발발될지 몰라 안전을 위해 성에 꼼짝없이 갇혀 있었다. 오염과 함께 마수까지 출현하자 대공가는 무척 바빠졌다.

    대대로 북부의 마수 토벌을 담당한 가문이라 그랬다. 해서 대공가의 기사 절반은 이미 곳곳에 분산 배치된 후였다.

    내가 방금 생각났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아, 맞다. 손님이 와 계셔.”

    “손님이요?”

    “황가에서 파견단이 왔거든.”

    성녀를 숨긴 일로 황실에서 유감을 표시했었다. 결국 직접 만나겠다고 파견단까지 보낸 탓에 현재 대공 성엔 냉기류가 흘렀다.

    그나마 엘레나가 있어 이 정도로 끝난 거지. 그게 아니었다면 아마 대공을 수도로 소환하고 문책했을지도 몰랐다.

    물론 대공은 나를 위해서라면 기꺼이 그 고난을 감수했을 위인이라 내심 고마웠다. 나는 그녀의 기색을 살피며 말했다.

    “파견단 대표로 황태자 전하께서 직접 행차한 터라 성안이 정신이 없어.”

    “황태자 전하께서 직접이요?”

    메이벨이 유난히 환한 얼굴로 되물었다. 그녀는 유독 제로니스 이야기에 저렇게 표정 관리가 안 되곤 했다.

    나는 그녀의 눈치를 기민하게 살피며 떡밥을 던졌다.

    “응. 아마 넌 처음 뵙겠다. 전에 갔던 정기 회의 때 길을 잃어서 인사도 못 해 봤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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