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공가 시집살이 너무 쉬운데요 (97)화 (97/177)
  • #97.

    “가장 필요한 때에 썼지.”

    대공이 감상에 젖은 표정을 지으며 나직이 뇌까렸다. 그게 언제냐고 물어보려는데 대공이 선수 쳤다.

    “그것보다 대체 그 책으로 뭘 확인하려는 거냐?”

    “비밀이에요.”

    “그럼 나도 비밀이다.”

    “치사해.”

    “누가 할 소리?”

    대공이 피식 웃으며 서류로 시선을 옮겼다. 하여간에 말하기 싫은 주제가 나오면 귀신같이 화제를 돌려 버린다.

    나는 대공에게 대답을 듣기를 포기하고 서재를 구경하기 시작했다. 책장에는 고루한 주제를 다룬 책들이 가득했다.

    금세 흥미를 잃은 난 서랍을 열어 뭐 재미난 물건이 없는지 뒤적거렸다.

    그때 서랍 안에서 낯익은 물건이 손에 잡혔다.

    “어, 이건?”

    손에 쥐고 꺼내 보니 예전에 파엘 강 박물관에서 봤던 흑마법사의 아티팩트였다.

    신수를 가두어 힘을 착취하는 무시무시한 도구인데 부화 도구로 오역되었던 바로 그것.

    이것을 보니 그날 아키드가 했던 말이 문득 떠올랐다.

    ‘그러게요. 어디서 많이 본 것 같다 싶었는데 아버지의 서재에 있던 것과 흡사하네요.’

    ‘골동품 상인한테 사기당했다며 서랍에 박아 넣던 걸 본 적이 있어요. 이것보다는 좀 작았던 거 같기도 하고.’

    아버님의 서재에서 봤다던 모조품이 바로 이것인 모양이다.

    이게 아직도 집 안에 있었다니.

    녹이 슬고 먼지가 낀 걸 보면 대공도 그 존재를 잊어버린 물건인 것 같았다.

    그때 아버님께 부정 타니까 버리라고 말한다는 게 뱃놀이가 즐거워 까맣게 잊고 말았다.

    나는 모조품을 만지작거리다 일하는 중인 대공을 불렀다.

    “아버님.”

    “또, 왜.”

    “이거 뭐예요?”

    내가 모조품을 손에 쥔 채 묻자 대공이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아아, 그거. 예전에 사기꾼이 비싸게 팔아먹은 가짜다. 버린 줄 알았는데 아직 있었군.”

    “근데 그 사람을 그냥 두셨어요?”

    내가 아는 대공이었다면 사기 친 자를 찾아내 두 배로 물어내게 했을 텐데 이상했다. 내 질문에 대공이 픽 웃었다.

    “그럴 리가.”

    아아, 이미 처리해 버리셨구나.

    나는 어쩐지 오싹해져서 모조품을 만지작거렸다. 잠시 사기꾼의 명복을 빌며 그것을 주물럭거렸다.

    그리고 무심코 밑바닥을 보다 익숙한 이름을 발견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로즈 나탈리>

    익숙한 이름이라 가만히 입 안에서 굴리던 중 번뜩 떠올라 손뼉을 쳤다.

    몇 년 전 수도에서 있었던 정기 회의 연회에서 내게 목각 인형을 주었던 분의 이름이었다.

    나는 나탈리 후작의 이름이 잘 보이도록 대공에게 들이대며 물었다.

    “아버님, 여기에 왜 나탈리 후작님의 이름이 적혀 있어요?”

    “그야 나탈리 후작이 고고학계의 거장이니까. 그 이름으로 인증만 되어도 값이 열 배는 뛰지.”

    “후작님께서 고고학자셨어요? 그러고 보니 들어 본 거 같기도 하고.”

    내가 관심을 보이자 대공이 설명을 보태었다.

    “뭐, 고고학계에서나 알아주는 일이긴 했지. 예전에 후작이 고대의 유물을 대거 발견하고 그 사용법을 알아내 학계에 큰 파란을 일으켰었거든.”

    “그렇구나.”

    “아마 박물관에 있는 유물과 아티팩트의 대부분이 로즈 나탈리의 발견품이거나 그녀가 해석한 물건들일 거다.”

    “진짜요? 파엘 강 인근 박물관에 있던 유물도요?”

    “그렇겠지.”

    “굉장하신 분이셨군요.”

    나탈리 후작은 탐험가의 기질을 타고난 모양이었다. 유물을 찾고 해석하는 데 능한 사람이라니 조금 대단해 보이기도 했다.

    물론 그런 사람도 이 물건이 흑마법사의 유산인 줄은 몰랐다는 점에서 정령들의 연식이 새삼 와닿았다.

    나는 가짜 아티팩트를 손 안에서 굴리며 중얼거렸다.

    “그런 분이 왜 이게 흑마법사의 물건인 거는 밝혀내지 못했을까요?”

    “흑마법사의 물건이라니?”

    “정령들이 그랬어요. 이렇게 생긴 아티팩트가 예전에 신수를 억지로 가두는 데 사용되었다고요. 근데 박물관 해설본엔 단순한 신수 부화용 아티팩트라고 소개되어 있었어요.”

    당시 정령들이 졸라서 신수가 갇혀 있나 확인하러 갔던 게 생각나자 웃음이 나왔다.

    어이없게도 신수는 박물관이 아니라 그 유물이 발견되었던 테슬 지역에서 찾았으니까.

    나는 발치에 있는 흰둥이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처음 발견되었을 때 아사 직전이던 걸 생각하면 아마 이와 비슷한 아티팩트에 갇혀 있던 걸지도 몰랐다.

    너를 못 찾았으면 어쩔 뻔했나 싶어, 마음이 찡해졌다. 해서 자리에 쭈그려 앉아 흰둥이를 만져 주는데 대공이 말했다.

    “그게 사실이냐?”

    나는 고개를 올려 대공을 쳐다보았다. 어쩐지 대공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 * *

    내가 쏘아 올린 공은 생각보다 여러 사람을 때리며 떨어졌다. 제일 큰 피해를 본 사람은 로즈 나탈리였다.

    그간 나탈리 후작의 업적이라고 여겼던 유물 중에 흑마법사의 유산이 대거 섞여 있던 탓이었다.

    그녀도 그 사실을 알고 적잖이 당황해 사태를 수습 중이라 했다.

    해석상의 차이는 고고학자에게 자주 있는 일이었으나, 고고학계의 거장이라 불리던 나탈리 후작의 오판은 쉬이 지나가기 어려운 이슈였다.

    그 탓에 고고학계가 한동안 끓는 냄비처럼 가라앉지 못하고 보글보글 끓었다.

    특히 나탈리 후작의 의견에 반하던 고고학자들의 목소리가 커졌다.

    대공이 지끈거리는 머리를 만지며 투덜거렸다.

    “자꾸 귀찮게 찾아와서 죽겠군. 최초 고발자는 따로 있다고 말해 버릴 수도 없고.”

    그 최초 고발자인 나는 간담이 서늘해졌다.

    대공이 그날 내게 아티팩트에 관해 자세히 듣고 난 후, 대뜸 고고학계에 폭탄을 던졌다.

    내가 쏘아 올린 공을 받아 그가 폭약을 제조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어쩐지 정령에게 끈질기게 물었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어차피 당장 내가 정령사라는 걸 밝히지도 못해 정령을 증인으로 내세울 수도 없어 의혹만 남을 일이었다.

    괜히 학계만 소란스럽게 만든 대공이 이해가 안 되었다.

    “그러게 왜 그걸 무턱대고 말씀하셨어요.”

    “개미굴에 들어간 개미를 나오게 하려면 물을 뿌려야 하니까.”

    어련하실까요.

    아무래도 음지에 있는 흑마법사들을 압박하기 위한 것 같았다.

    이미 지난 스티그 섬의 오염 원인이 흑마법이었다는 게 밝혀졌었다.

    그 일로 대륙이 한차례 떠들썩하며 흑마법사들에 대한 반감이 더욱 깊어졌다.

    대대적인 색출과 수배령까지 떨어질 정도였으나 정작 금기를 어기고 오염을 일으킨 흑마법사는 아직 발견하지 못한 상태였다.

    다행히 그 후로 오염이 번진 곳이 나타나지 않고 있었으나 여전히 흑마법사는 달갑지 않은 존재였다.

    아예 흑마법사를 모조리 죽여야 한다는 강경파가 나올 정도였다.

    이제야 그들에 대한 세간의 관심이 좀 사그라든 상황인데 대공이 또다시 불을 지핀 것이었다.

    고대 유물인 줄만 알았던 것들 중 흑마법사의 유산이 섞여 있었으니 온 제국이 또다시 들끓었다.

    그 탓에 나탈리 후작의 해석본뿐 아니라 유물 전체를 검수, 조사하고 있을 정도였다.

    이미 흑마법사의 유산으로 밝혀진 유물들은 박물관에서 빼 폐기 처분 중이라고 했다.

    하나둘 밝혀지는 음지의 유산에 고고학계는 나날이 들썩거렸다.

    “흑마법사들은 자기 유산에 아주 예민한 놈들이거든. 맨날 고대의 광영이 어쩌고 하며 헛소리를 하던 것만 해도 아마 지금 굉장히 열받았을 거다.”

    “아아, 그럼 상대를 열받게 해서 양지로 나오게 할 작정인 건가요?”

    “글쎄다. 그런 멍청이였으면 진즉 붙잡히고도 남았겠지.”

    대공은 내가 헛다리를 짚었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차피 이 정도로 정체를 드러낼 거라고는 기대도 안 했어.”

    “그럼 대체 왜 그러신 거예요?”

    이렇게 귀찮은 일을 도맡으면서까지?

    내가 의문을 제기하자 대공이 뭘 그런 것에 이유씩이나 붙이냐며 히죽 웃었다.

    “재밌으니까.”

    아무래도 평생 아버님을 이해하게 되는 순간은 오지 않을 듯했다.

    * * *

    얼마 후, 프로디움의 행사 날. 나와 아키드는 대공가를 대표해 프로디움으로 향했다.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행사마다 매번 참석해 자리를 빛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파블로가 씨익 웃으며 우리를 맞았다. 여전히 험상궂은 얼굴이었으나 이제는 익숙해서 전혀 무섭지도 않았다.

    “방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시동 둘이 나와 아키드를 각각의 숙소로 안내했다. 이 보수적인 숙소 문화는 바뀔 줄을 몰랐다.

    익숙하게 포기한 얼굴로 혼자 머물 침실에 들어서자 먼저 와 짐을 풀고 있던 메이벨이 나를 맞았다.

    “오셨어요?”

    메이벨은 해링턴 백작가에 입양되고 1년 후, 내 정식 시녀가 되었다.

    정확히는 시녀이자 곁붙이라 한나, 슈리, 비비안과는 다른 대우를 받았다.

    아직 각성기를 치르지 않은 상태에서 내가 정령사임이 발각될 경우 위험에 노출되기 쉬워 내린 결정이었다.

    메이벨은 나와 나이도, 성별도, 생일도 같으니 대타(혹은 미끼)로 삼기 좋았다.

    물론 생일이 같다는 건 나만 아는 비밀이었다. 그녀는 여전히 기억을 잃은 척 행세하고 있었으니까.

    나는 7년 전 그날 영상석의 내용을 확인한 이후, 메이벨에게 적당한 거리를 두며 중요한 일은 맡기지 않고 있었다.

    곁에 두고 감시한 지도 꽤 오랜 시간이 흘렀으나 여전히 그때 그녀와 대화한 귀족이 누군지 알아내지 못했다.

    혹시 몰라 당시 정기 회의 파티 참석자 명단도 받아 보았으나 역시나 초대된 인원이 어마어마해 메이벨과 만난 이를 특정하는 것조차 어려웠다.

    북부로 그녀에게 연락하는 이도, 그녀가 따로 연락을 보내는 이도 없어 그대로 오리무중이었다.

    “응. 별일 없었지?”

    우리는 여전히 서로를 탐색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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