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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가 시집살이 너무 쉬운데요 (96)화 (96/177)
  • #96.

    아키드는 이번에는 내 손을 쥔 채로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손을 만지는 건지, 머리카락을 만지는 건지 모를 은근한 손길에 절로 얼굴이 화끈거렸다.

    요즘 부쩍 그가 내 방을 찾아오는 일이 잦았다. 어릴 적만 해도 문밖에서 이야기하거나 피치 못 할 경우엔 용건만 간단히 말하고 나간 그였다.

    한데 최근에 와선 그의 그런 선이 조금 뭉개진 기분이었다.

    이렇듯 내가 씻는 동안에도 들어와 제 방인 양 행세하고 있는 걸 보면 확실했다.

    그만큼 내가 편해졌다는 징조였다. 그와 나는 각방은 쓸지언정 대공 부부처럼 사이가 나쁘지는 않았으니까.

    나는 알 수 없는 긴장감을 없애려 화제를 돌렸다.

    “여긴 어쩐 일이세요?”

    “꼭 일이 있어야만 올 수 있는 곳입니까?”

    “그건 아니지만.”

    내가 우물쭈물하자 아키드가 유쾌한 미소를 지은 채 말했다.

    “다음 주 프로디움 행사에 몇 시쯤 갈지 의논하러 왔습니다.”

    “아, 벌써 행사 날이 다 되었군요.”

    아키드가 미각성 발작을 한다는 걸 알게 된 이후, 우리는 정기적으로 프로디움에 가고 있었다.

    대외적으로는 후원한 신전의 초대를 받아 대공 대리로 방문하는 것이었으나 실제는 요양이었다.

    “점심 먹고 출발하면 되지 않을까요? 어차피 만찬 전까지 할 일도 딱히 없으니까요.”

    프로디움은 성역이다 보니 인근의 개발이 금지되어 있었다. 해서 주변에서 놀 만한 거라고는 산책 정도였다.

    “그래도 이번에 다녀오고 나면 더는 전처럼 자주 가지 않아도 되겠군요.”

    “그러게요. 그동안 정말 고생했어요, 아키.”

    내가 그의 손을 마주 잡고 방긋 웃자 그가 따라 웃었다.

    작년 겨울, 아키드에게 각성기가 찾아왔다. 그 일로 일대가 비상이 걸렸었다.

    대공이 그의 곁에 머물며 용솟음치는 마나를 눌러 주는 동안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출입이 금지된 아키드의 방 앞에서 안절부절못하며 기도하고, 서성거리는 게 고작이었다.

    어차피 앞에서 본다고 빨리 끝나는 것도 아닌데 그냥 그러고 싶었다.

    하여 방에서 기다리라는 엘레나의 말도 잘 들리지 않았다.

    그렇게 노심초사하기를 일주일. 아키드가 무사히 각성을 마쳤다.

    각성을 마친 아키드는 땀에 흠뻑 젖은 채 내 손을 잡고 이렇게 말했었다.

    ‘잠을 못 잔 얼굴이네요. 괜히 나 때문에.’

    비몽사몽 간에 내 걱정부터 하자 나는 왈칵 울음을 터트렸었다.

    정작 나보다 더 초췌한 모습이면서 누가 누굴 걱정하는 건지.

    실제로 본 각성기는 내 생각보다 더욱 무시무시한 일이었다.

    아키드가 보통 사람들과 달라 지리멸렬하게 시간이 걸린 거라 해도 가족으로서 보기 힘든 광경이었다.

    어쨌든 한시름을 놓기는 했다. 더는 그가 발작을 일으킬까 염려할 일은 없었으니까.

    “고생은 로네가 했죠. 계속 왔다 갔다 하느라 힘들었을 텐데.”

    “딱히 힘든 건 없었어요.”

    아키드랑 가는 곳이라면 그곳이 어디건 파티장이었다. 도무지 힘들다는 표현이 성립될 수 없는 일이라고 할까.

    현재 그는 순조롭게 각성을 마치고 힘을 완벽히 통제할 수 있었다. 하델루스 대공이 놀랄 만큼 대단한 실력이라 장래가 유망하기도 했다.

    문제는 사실 나였다. 로에나는 데뷔탕트가 있는 여름이 되기 전에 전염병으로 요절할 운명이었다.

    원작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에 퇴장하는 엑스트라라는 말씀.

    ‘그런데 조용해도 너무 조용하잖아.’

    나는 오염의 조짐이 전혀 보이지 않는 대륙의 모습에 당혹스러움을 감추기 어려웠다.

    스티그 섬의 오염이 일찍 시작된 터라 분명 오염이 전체적으로 빨라질 줄 알았는데 이상한 일이었다.

    아예 흔적도 보이지 않으니 오히려 더 불안했다. 이러다 갑자기 내가 병에 걸려서 꼴까닥하는 건 아닌가, 하고.

    중간에 조짐이 없던 건 아니었다. 헨리의 호출을 받고 갈 적마다 허탕을 쳤을 뿐이다.

    어쩌면 흑마법사들이 몸을 사리고 있는 걸지도 몰랐다.

    스티그 섬의 오염 원인이 흑마법사인 게 밝혀진 이후, 황실이 대대적인 색출에 나선 탓이었다.

    감옥에 갇힌 흑마법사들만 해도 상당했고, 수배 중인 자도 많다고 들었다.

    이래저래 오염이 더딘 이유가 아예 없지는 않았다. 다만 이대로 끝날 리 없다고 여겨 긴장의 끈은 계속 잡고 있었다.

    나는 괜한 생각을 떨쳐 내며 말했다.

    “늦었는데 어서 자요. 내일 일정도 있으니 피곤할 거예요.”

    “예,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찾아왔습니다.”

    “네?”

    나는 아키드의 태연자약한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좀 전에 분명 프로디움에 몇 시에 갈지 의논하러 왔다고 했었기에 더더욱.

    그 순간 아키드의 입매가 부드럽게 올라갔다. 그가 제 뺨을 톡톡, 건드리며 말했다.

    “굿나잇 뽀뽀를 받아야 하잖아요.”

    “…….”

    “안 해요?”

    맑은 청회색 눈동자가 뭘 주저하냐는 빛을 띠었다. 나는 심장이 콩닥거려 두 손을 가슴 위에 가지런히 모았다.

    그는 내가 굿나잇 뽀뽀를 즐긴다고 오해하고 있었다.

    과거 엘레나에게 급습한 전력도 있고, 쌍둥이의 인증까지 있던 터라 단단히 오해하고 있었다.

    한마디로 내겐 완전 오예, 인 상황.

    그 후 나는 딱히 부정하지 않고 그의 볼에 뽀뽀할 수 있는 영광을 누리고 있었다.

    “해, 해요.”

    그러면서도 매번 떨려서 이렇게 우물쭈물해하며 빠르게 새 모이 쪼듯 할 뿐이었다.

    아키드는 볼에 닿은 둥 마는 둥한 뽀뽀에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잠시 그가 볼을 만지작거리는가 싶더니 내가 한 것보다 더 깊게 내 볼에 입을 맞추었다.

    쪽, 소리가 나자 머리에서 팡파르가 터졌다.

    “나만 받으면 아쉬우니까.”

    “…….”

    “잘 자요.”

    아키드가 살인 미소를 짓곤 내 방을 유유히 나갔다. 나는 그가 사라진 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의 바람과 달리 나는 덕분에 오늘 밤 잠을 설칠 예정이었다.

    나는 침대로 번지점프를 한 채 이불을 팡팡, 내리쳤다. 행복한 덕질 라이프였다.

    * * *

    나는 대공의 서재에 있는 소파 팔걸이에 머리를 기댄 채 데미안을 불렀다.

    “아버니임.”

    그러자 품에 있던 흰둥이도 덩달아 내 팔에 머리를 기댄 채 야옹, 하고 울었다.

    대공은 서류에 시선을 붙박은 채 내 목소리를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벌써 세 번이나 불렀는데도 대답하지 않는 걸 보면 내가 무슨 요구를 할지 아는 듯했다.

    내가 대공에게 하델루스의 비전(祕典)을 열람하게 해 달라고 요구한 지 어언 7년.

    조금만 애교를 부려도 쉽사리 부탁을 들어주던 대공을 생각하면 꽤 오래 버티는 중이셨다.

    그만큼 비전을 보여 주는 게 힘든 일이라는 걸 어렴풋이 짐작했지만 나도 쉽게 포기하는 성격은 못 되었다.

    아마도 조만간 내 데드 플래그가 시작될 걸 알기에 더 집요해지는 걸지도 몰랐다. 나는 불퉁한 음성을 토해 냈다.

    “정말 안 돼요?”

    “안 된다고 했잖아.”

    “한 번만 보게 해 주세요. 아니면 안 되는 이유라도 말씀해 주시든가요.”

    정말이었다. 딱 한 번만 보고 싶었다. 하델루스의 비전은 자파르시아가 살아 있을 적부터 전해지는 이야기가 담겨 있다고 했다.

    모든 지혜가 총망라되어 그 책을 얻는 자가 세상을 얻을 것이라는 소문도 있었다.

    그에 비해 내가 그걸 보고 싶은 건 세계 제패 같은 거창한 이유가 아니었다.

    그저 내가 이 세계로 뚝 떨어진 것에 관한 실마리라도 잡고 싶었다.

    모든 게 담겨 있는 책이니 내가 빙의한 이유도 적혀 있지 않을까, 하고.

    내가 로에나가 된 지도 7년이다. 그동안 나는 내 전생의 기억뿐 아니라 내가 몰랐던 로에나의 과거까지 듬성듬성 기억해 내곤 했다.

    간혹 그 기억에 통증이 뒤따라 혼절도 했던지라 나는 내 몸의 상태가 괜찮은 건지 혼란스러웠다.

    어쩌면 영혼이 몸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겪는 성장통일지도 몰랐다.

    배운 적도 없는 걸 자연스럽게 척척 해내는 걸 보면 몸의 기억도 있는 듯했다.

    대공이 깃펜을 내려놓고 턱을 괸 채 중얼거렸다.

    “글쎄. 그 책은 그렇게 쉽게 볼 수 있는 게 아니라니까.”

    “아버님껜 쉬울 거 아니에요.”

    “아니. 가주라고 해서 그 책을 마음대로 들여다볼 수 있는 게 아니다.”

    “네? 마음대로 못 본다고요?”

    처음 듣는 내용에 두 눈을 둥그렇게 뜨자 데미안이 손가락 두 개를 내보이며 말했다.

    “딱 두 번이다. 가주로서 자파르시아의 비전을 열어 볼 수 있는 건. 물론 가주로 즉위할 때 쓰는 것도 횟수로 포함되니 정확히는 한 번의 기회만 있는 거지.”

    “설마…….”

    “그래. 난 이미 책을 열람할 기회를 모두 사용했다. 그러니 네가 아무리 졸라도 난 들어줄 수 없어.”

    나를 단념시키려 하는 말치고는 진중한 눈빛이었다. 비전을 보여 줄 수 없는 진짜 이유를 들으니 조금 허탈해졌다.

    어쩐지 그간 흑마법사를 추적하면서도 비전을 참고하지 않는 게 이상했는데 그런 말도 안 되는 제약이 있었을 줄이야.

    “말도 안 돼.”

    “그러니 정 그 책의 내용이 궁금하면 아키드가 즉위할 때 물어보거라. 물론 내가 가주 자리를 언제 내놓을진 모르겠지만.”

    대공이 도로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히죽 웃더니 깃펜을 휘휘 돌렸다.

    “아마 그 녀석이라면 두 번 다 너를 위해 쓸지도 모르겠구나.”

    “그럼 아버님은 어디에다 쓰셨는데요?”

    내 물음에 대공이 나를 힐끗 쳐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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