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
그 직후 영상 속이 고요했다. 잠시 후 내 예상대로 레티큘이 크게 흔들리는가 싶더니 영상석이 뚝 끊겼다. 전원을 끊어 버린 것이었다.
나는 아쉬움을 느끼며 한숨을 내뱉었다. 상대가 눈치채지 못했다면 메이벨이 그들과 무슨 대화를 하는지 들을 수 있던 탓이었다.
그나마 아예 건질 게 없지는 않았다. 에이프릴 후작과 대면할 정도면 상대도 고위 귀족인 게 분명했다.
그날 온 고위 귀족이 많아 특정하기 어려운 건 사실이나 적어도 그날 참석한 인원으로 한정할 수 있으니 다행이었다.
그리고 가장 큰 수확은 메이벨이 그녀를 알고 있다는 점이었다. 자연스럽게 하대한 것만 봐도 아는 사이가 분명했다.
이 모든 정황을 종합해 보았을 때 내린 결론은 하나였다.
메이벨이 뭔가 의도를 가지고 하델루스 대공에게 거짓말을 했다.
‘그동안 기억을 잃은 척하며 모두를 속이다니.’
나는 혼란스러운 마음을 추스르며 영상석을 꼭 쥐었다. 간과했던 사실을 알고 나니 등줄기가 서늘했다.
메이벨은 영상석의 내용을 숨기기 위해 일부러 넘어지기까지 하는 치밀함을 보였다.
만약 내가 백업을 해 둘 생각을 하지 않았다면 이 사실은 영영 몰랐겠지.
그저 윤택한 덕질을 하려고 만들었을 뿐인데 얼결에 메이벨의 이중성을 발견하고 말았다.
의심을 피하려 무릎을 깨면서까지 연기를 한 것이 조금 섬뜩하기까지 했다.
하필 그녀가 내가 읽은 책 속 여주인공이라 더 그랬다.
문득 그녀도 나와 같은 빙의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까지 미치자 오싹해졌다.
내가 빙의를 체험했으니 그녀에게도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었다.
어쩌면 그녀도 나처럼 뭔가를 바꾸려고 하는 게 아닐까.
그게 무엇인지 알게 되면 메이벨의 의도를 조금은 파악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나마 메이벨 앞에서 이 영상석을 자랑하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그녀는 내가 이 영상을 보지 못했다고 생각할 테니까.
‘곁에 두고 지켜봐야겠다.’
나는 의지를 다지며 영상석을 잘 보관했다. 앞으로는 메이벨에게 모든 것을 시시콜콜 말하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하면서.
* * *
칼날 같은 겨울바람이 지나가고, 봄기운이 물씬 풍기는 순풍이 제일 먼저 계절이 바뀐 것을 알렸다.
말을 할 때마다 입김이 뭉게뭉게 피어오르던 때도 이미 지난 지 오래. 자연히 옷차림도 가벼워졌다.
시간은 쏘아진 화살처럼 빠르게 지났다. 크지 않을 것 같던 키가 훌쩍 크고, 덩달아 몸의 윤곽도 어린이에서 어엿한 아가씨로 변했다.
고사리 같던 손은 길쭉해졌고, 잘록한 허리는 가느다래 뭘 입어도 맵시가 좋았다.
벌써 내가 로에나로 산 지도 7년이었다. 세월이 지난들 내 덕심은 줄지를 않았다.
나는 여전히 아키드 덕질에 여념이 없었고, 늘 그의 얼굴을 볼 때마다 새로움을 느끼곤 했다.
그리고 그 덕질은 혼자로만 끝나지 않고 세를 넓혀 갔다.
“다들 모이셨군요.”
토끼 가면을 쓴 내 앞으로 각자 좋아하는 동물 가면을 쓴 영애들이 원탁에 모여 앉았다.
“오늘 오신 여러분들을 위해 특별히 준비한 것이니 마음껏 보세요.”
“세상에, 이건 아키드 님이 지난 연회 때 착용하셨던 크라바트가 아닌가요?”
“어쩜 토끼 님은 늘 이런 애장품을 어디서 사 오시는 건가요?”
“역시 대공자비님과 친분이 있으신 거겠지요?”
말, 고양이, 개의 가면을 쓴 영애들이 감탄조로 말하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이 기묘한 익명 모임의 이름은 <아사모>. ‘아키드를 사랑하는 영애들의 모임’을 줄인 사교 클럽이었다.
대외적으로는 ‘아름다운 식물을 사시사철 즐기는 모임’이라고 포장하고 있었으나 현실은 덕질 클럽이었다.
아사모 회원의 신상은 클럽장 말고는 아무도 몰랐다.
익명성을 보장해 주는 가면은 특수 제작한 아티팩트(코비슈타인의 작품이다)라 벗기 전에는 누군지 알아볼 수 없었다.
그 덕에 나를 숨기기에도 좋았다. 내가 이 일을 시작한 건 모두 아키드 때문이었다.
출신 때문에 아키드의 평판이 좋지 않기에 시작한 일인데 지금은 거의 본분은 잊고 즐기는 수준이었다.
지금 북부에선 아키드 열풍이 불고 있었다. 소년에서 청년이 된 아키드는 북부에서 제일가는 미남이었으니까.
아니, 솔직히 말해서 전 대륙을 다 합쳐도 아키드만 한 얼굴은 보지 못할 거라 자부했다.
하여튼 아키드의 물오른 모습을 본 영애들이 하나둘 그에게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귀족이라면 응당 표정을 숨기고, 돌려 말해야 한다고 배웠던 영애들이 그 미모가 궁금해 암암리에 아키드의 초상화를 돌려 볼 정도였다.
그리고 하나같이 이 미남을 미리 알아보지 못한 것에 안타까운 한숨을 내뱉었다.
사생아라는 이유로 거들떠보지도 않던 이가 훈훈하다 못해 남신으로 자랐으니 오죽 아까울까.
물론 줄 사람은 생각도 않는데 저 혼자서 북 치고 장구 치는 데서 오는 어이없는 안타까움이었다.
나는 그런 잘생긴 남자를 어릴 때부터 얻어 낸 행운의 주인공으로 자리잡혀 있었다.
현실은 데뷔탕트 전이라 합방도 못 하고 수절하는 아내였지만 그건 비밀로 하고.
사실 영애들 사이에 초상화를 흘린 것도, 아키드의 외모를 널리널리 알린 것도 모두 나였다.
이 세상 사람들이 모두 아키드의 얼굴을 보고 행복해하기를 바라는 것과 별개로 해결해야 하는 문제가 있어서였다.
아키드는 열세 살에 하델루스가에 입적한 뒤로 줄곧 애꿎은 소문이 따라붙었었다.
대귀족인 하델루스 가문의 후계자가 실은 사생아이니 얼마나 입방아에 올랐겠는가.
어떻게든 헐뜯고 싶어 하는 호사가들의 입에서는 듣기에도 불쾌한 것들이 넘쳤었다.
얼굴이 못생겼다느니(이건 정말 말이 안 된다. 자기 얼굴은 거울로 안 보나 보지?), 성격이 고약하다느니(우리 천사한테 무슨 막말이야. 입을 꿰매 버릴라) 같은 터무니 없는 말들 말이다.
그러한 평판을 단숨에 뒤집는 데에 미인계만 한 게 없었다.
그리고 그러한 내 생각은 이 ‘아사모’를 통해 성공적으로 증명이 된 상태였다.
아키드는 어느새 북부의 꽃으로 불리며 수도에서도 그 얼굴을 보고 싶어 하는 유명 인사가 되었으니까.
나는 괜스레 토끼 가면의 귀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대공자비님과 친분이 있기는 하죠.”
“그럼 아키드 님을 가까이에서 뵌 적도 있겠네요?”
“그럼요.”
오늘도 보고 왔는데요?
내가 뒷말을 꾹 삼키자 영애들이 콧소리를 내며 한숨을 내쉬었다. 부러워 죽겠다는 반응이라 참 우스웠다.
익명의 힘이란 대단했다. 내숭을 일삼는 영애들이 이곳에서만큼은 날것과 같은 적나라한 반응을 보였으니까.
덕분에 나도 나의 덕력과 주접을 모두 쏟을 수 있어서 좋았다.
그렇게 나는 한참 아키드를 찬양하는 수다를 떤 후, 하델루스 성으로 돌아왔다.
곧장 방으로 돌아가 샤워를 하고 나오니 누군가 소파에 앉아 있었다. 동그란 머리통만 봐도 누구인지는 빤했다.
“아키?”
내가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툭툭 매만지며 소파로 향하자 아키드가 책에 있던 시선을 내게로 옮겼다.
그의 시선이 내 젖은 머리에서 가운 차림으로 느릿하게 향했다. 청회색 눈동자가 울렁이는 듯한 건 눈앞의 촛불 때문일 터.
가운 속에 잠옷까지 모두 입은 터라 그리 야한 복장은 아니었지만 괜스레 의식하게 되어 가운을 단단히 여미었다.
그대로 그가 앉은 소파 옆에 털썩 주저앉으니 그가 내 손에서 타월을 빼앗아 갔다.
“제가 말려 드리겠습니다.”
“한나를 시켜도 되는데.”
“제가 하고 싶어서 하는 건데요.”
“그렇다면 부탁할게요.”
순순히 그에게 마른 타월을 넘기고 뒤를 돌자 그가 내 머리카락을 타월로 털기 시작했다.
볕에 잘 말린 수건에서는 보송보송한 냄새가 났는데, 아키드의 청량한 기운과 함께 섞이니 나른한 기분까지 들었다.
“로네, 불편한 곳은 없습니까?”
아키드가 다정히 내 애칭을 불렀다. 어느 날 나만 애칭으로 부르는 게 불공평하다며 본인 스스로 지은 그만의 애칭이었다.
다른 사람의 입으로는 오르내리는 게 싫어 그에게만 허락한 애칭이기도 했다.
물론 대공이 나를 놀리고 싶을 때 장난식으로 몇 번 부르기도 했지만 진짜 허락받은 사람은 아키드뿐이었다.
“아뇨, 너무 편해서 졸음이…….”
나는 배시시 웃으며 뒤를 돌아보다 말문이 막혔다. 아키드의 얼굴이 생각보다 가까운 탓이었다.
검은 머리카락이 내 입김으로 인해 가볍게 팔랑였다. 가벼운 셔츠 차림의 그는 필요 이상으로 내게 붙어 있었다.
그로 인해 바짝 긴장되어 허리를 곧추세우자 그가 빙그레 미소 지었다.
“마침 잘됐네요. 아예 제 방향으로 돌려 보십시오.”
아키드가 기다렸다는 듯이 내 몸을 제게로 돌렸다. 자연히 마주 보는 형국이 되자 거리는 더 가깝게 느껴졌다.
그는 즐거운 일을 맡은 사람처럼 내 머리를 말리는 데 여념이 없었다. 시녀인 한나보다도 꼼꼼해서 조금 놀라울 정도였다.
그게 어쩐지 부끄러워 고개가 자꾸만 수그러졌다.
이건 고문이나 다름없다. 저 얼굴을 코앞에 두고 어떻게 가만히 있어.
아키드는 정말 너무도 내 취향대로 자라 있어서 볼 때마다 깜짝 놀랐다.
“로네의 머리카락은 꼭 솜사탕 같습니다.”
내 타는 속도 모르고 아키드가 수건을 내려놓고 내 머리를 가만히 지분거렸다.
입가에 걸린 미소가 왜 그렇게 시선을 빼앗는지.
아무래도 다 말랐는지 확인하는 것 같은데 그 행위 자체도 왠지 긴장되어 나도 모르게 머리카락을 잡아 뺐다.
“제 머리가 좀 부스스하긴 하죠.”
하지만 그리한 게 무색하게 그가 머리카락을 쥔 내 손을 같이 붙잡으며 말했다.
“전혀요. 부들부들해서 계속 만지고 싶다는 의미로 한 말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