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공가 시집살이 너무 쉬운데요 (94)화 (94/177)

#94.

‘이런 곳에서 다 뵙네요. 오해하지는 말아요. 그쪽 보러 온 게 아니니까.’

메이벨은 나탈리 후작이 인사하는 척하며 흘린 말을 떠올리며 눈을 찌푸렸다.

그렇게 방해하지 말라고 했건만 기어이 찾아와 놓고 우연이라고 하면 그걸 누가 믿는단 말인가.

아무래도 직접 만나 따끔하게 한마디를 하려고 따라나선 차였는데 뜻밖의 사람과 마주쳤다.

구태여 수도까지 와서 얼굴을 보고 싶던 이였다. 제로니스 칸 하인트, 자신의 옛 약혼자이자 저를 버렸던 사내.

‘약혼자 행세는 그만하지? 내가 언제까지 그대의 추태를 두고만 볼 거라고 생각하나?’

‘약점을 잡고 늘어지는 것도 지금뿐이야. 확실히 말하건대 내가 그대랑 결혼할 일은 절대 없어. 그것만큼은 그대 뜻대로 되게 내버려 두지 않을 거니까.’

메이벨은 화가 나던 것도 잊고 그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메이벨이 아무 말이 없자 제로니스가 말했다.

“못 보던 얼굴인데. 날 모르나 보군.”

인사도 하지 않고 쳐다만 보니 하는 말 같았다. 메이벨은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이 얼굴로 만났음에도 그에게선 온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그가 사랑해 마지않던 얼굴인데, 참 우습기도 하지.

메이벨은 싱긋 웃으며 예를 갖춰 인사했다. 이전에 보인 엉성한 예법과 달리 격에 맞는 몸짓이었다.

그 앞에서만큼은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서였다.

“인사가 늦었습니다. 해링턴가의 메이벨 해링턴이라고 합니다. 로에나 님의 시녀로 파티에 참석했어요.”

“아아, 대공자비의 시녀였군.”

제로니스가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대답하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마치 누군가를 찾는 듯한 기색에 메이벨의 얼굴에 서리가 내린 듯 서늘함이 감돌았다.

그가 찾는 사람이 누구일지 짐작이 되면서도 부디 그녀가 아니기를 바란 탓이었다.

적어도 이 얼굴을 마주하면 작은 파랑이라도 일 줄 알았는데, 그에게는 동요하는 기색조차 없었다.

그게 메이벨을 허무하게 만들었다. 어떻게 얻게 된 몸이며 시간인데, 참 부질없기도 하다.

그때 저 멀리서 제로니스를 다정히 부르는 음성이 들렸다.

“제로, 나 찾고 있었어?”

저였다면 절대 허락받지 못했을 그의 애칭을 입에 담으며 다정히 웃는 여인을 보자 메이벨은 웃을 수 없었다.

네가 감히 그 얼굴로 그래선 안 된다는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지만, 지금의 메이벨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이러려고 그런 위험한 짓을 벌인 게 아니었는데.

오히려 저 여자에게 좋을 짓만 한 것 같아 이가 으득으득 갈렸다.

전혀 다른 얼굴이자 메이벨에겐 익숙한 얼굴로 어벙한 표정을 하는 그녀가 미웠다.

“에드워드를 찾아온다더니 오질 않아서.”

“아무래도 가 버린 게 분명해. 숨어 있을 만한 곳을 모조리 뒤졌는데 살구색 머리카락 한 올도 안 보이더라니까?”

“네 머리에 묻은 나뭇잎의 수만 봐도 네가 열심히 찾아다녔다는 건 알겠다.”

제로니스가 캐서린의 머리칼에 묻은 나뭇잎을 떼어 주며 잔소리했다.

캐서린은 그 잔소리가 익숙한지 배시시 웃으며 그의 손길을 받을 뿐이었다.

그 순간 메이벨의 발치에 있던 나뭇가지가 뚝,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저도 모르게 발에 힘이 들어가 마른 나뭇가지가 버티지 못한 것이었다.

그제야 메이벨의 존재를 느낀 캐서린이 눈을 둥그렇게 떴다.

“어라, 이분은?”

“대공자비의 시녀래.”

“정말?”

캐서린은 로에나의 시녀라는 말에 만개한 꽃처럼 활짝 웃으며 메이벨의 손을 덥석 붙잡았다.

“혹시 초행길이라 길을 잃었니? 이 앞은 미로 정원이 있어서 길을 잃기 쉬우니까 들어가면 안 돼.”

“아뇨, 딱히…….”

메이벨은 불쾌함에 얼굴을 찌푸리고 싶은 것을 꾹 참았다.

이깟 길은 눈 감고도 다닐 수 있었다. 그녀에게 황궁은 그런 곳이었으니까.

한데 눈앞의 여인이 저를 천치 취급하니 울화가 치밀었다. 메이벨이 어색하게 웃으며 손을 물렸다.

“잠시 바람을 쐬러 나왔을 뿐이에요.”

“그랬구나. 그렇다면 저쪽 분수 쪽이 쉬기 편…….”

“캐시, 적당히 해. 상대가 곤란해하고 있잖아.”

제로니스가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나무라자 캐서린이 어색하게 볼을 긁적이며 “곤란했으면 미안해” 하고 사과했다.

그 순간 메이벨의 얼굴이 굳어 버린 건 불가항력이었다.

그의 입에서 애칭이 흘러나오자 메이벨은 웃을 수가 없었고, 더는 연기를 이어 갈 수가 없었다.

차고 넘치는 분노를 어찌해야 할지 몰라 파르르 떨고 있는데 누군가 메이벨에게 말을 걸었다.

“메이벨 님.”

처음 보는 낯선 소년이 메이벨에게 알은체를 했다. 뺨에 난 상처가 흉측하기보다는 문신처럼 잘 어울리는 이상한 남자였다.

제 이름을 어떻게 알았나, 하고 의아해하며 쳐다보니 그가 그녀의 귓가에 대고 작게 말했다.

“후작님께서 보내셨습니다. 들키려고 작정한 게 아니라면 추스르세요.”

소년의 경고에 메이벨이 아차, 하며 정신을 바짝 차렸다. 금기를 어긴 이후, 메이벨은 종종 감정 조절을 하는 게 버거웠다.

몸속에 축적된 오염이 그녀의 정신을 자꾸만 갉아먹으려는 탓이었다.

얼른 속에 있는 오염을 어디로든 방출해야 하는데 대공의 눈을 피해 하기에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니 언젠가는 흑마법사 무리에게 손을 내밀어야 하는 처지이기는 했다. 단지 누가 우위에 있느냐를 겨루고 있었을 뿐.

가만 보니 소년도 저와 같은 흑마법사인 것 같았다. 흐르는 기운에서 동류의 느낌이 들었다.

“아는 사람이에요?”

캐서린이 경계하며 물었다. 행색이 파티에 놀러 온 자 같지는 않기에 보이는 경계심이었다. 메이벨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네, 아는 사람이에요.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소년을 뒤따라가던 메이벨이 아쉬움 가득한 얼굴로 제로니스를 힐끗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의 시선은 그녀에게 머물러 있지 않았다.

그 선연한 사실에 메이벨은 주먹을 꾹 쥐었다.

결국 그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저 여자의 존재 자체가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 * *

연회는 별문제 없이 무사히 끝났다. 메이벨은 연회가 끝날 즈음 돌아와 연신 사죄했다. 미로 정원에 잘못 들어가 헤매느라 늦었다고.

하긴 나도 처음에 미로 정원에 발을 잘못 들였다가 한참 같은 자리를 빙빙 돈 적이 있었다.

황궁의 규모만큼이나 미로 정원도 널따래서 한 번 길을 잃으면 찾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아키드가 찾으러 오지 않았다면 거기서 노숙을 했을지도 몰랐다.

‘죄송해요. 넘어지다가 레티큘을 놓쳐서 엉망이 되었어요. 제게 맡겨 주신 일도 제대로 못 해내서 송구합니다.’

메이벨은 울상이 된 채 엉망이 된 레티큘을 내밀었다. 진짜 넘어졌는지 무릎이 까져 있고 드레스에도 흙이 묻어 있었다.

레티큘도 크게 굴렀는지 영상석이 부서진 상태였다.

그나마 다행인 건 사전에 코비슈타인에게 부탁해 내 서재에 있는 시크릿 존에 영상석의 영상을 자동으로 송출하도록 설비해 뒀다는 점이었다.

아직 고도의 기술이 필요해 실용화할 단계는 아닌지라 시범적으로 내 서재에만 있는 기술이었다.

그러니 내 소중한 아키드의 영상은 지켜졌다는 거!

나는 델루스로 돌아오자마자 영상석의 영상을 추리기 시작했다. 잘 전송이 됐는지 깔끔하게 옮겨져 있었다.

메이벨이 오랜 시간 자리를 비운 터라 건질 만한 영상은 초반에만 몰려 있었다.

그거라도 어디냐 싶어 배시시 웃으며 영상을 체크할 때였다.

메이벨이 자리를 비웠을 적의 영상이 이어졌다. 남의 사생활을 훔쳐보면 안 될 것 같아 바로 끄려는데 익숙한 음성이 들렸다.

― 못 보던 얼굴인데. 날 모르나 보군.

나직한 음성은 분명 제로니스였다. 뒤이어 캐서린의 음성도 들렸다.

레티큘의 위치가 낮아 얼굴은 보이지 않았으나 익히 아는 음성이라 바로 알아들었다.

한참 대화가 오갈 무렵 낯선 음성이 끼어들었다.

― 메이벨 님.

뒤이어 귓속말로 무어라 속삭이는 듯했는데 너무 작아 다시 들어도 무어라 하는지 들리지 않았다.

그 뒤로는 어디론가 걷는 소리뿐이었다. 간간이 대화하는 것 같았지만 드레스 자락이 부딪치는 소리 탓에 대화 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조금 의아한 것은 메이벨이 소년을 따라가는 데 주저함이 없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캐서린에게 아는 사람이라고 한 걸 보면 초면은 아닌 듯한데.

‘기억이 없다고 했는데, 아는 사람을 만났다고?’

메이벨은 사고의 충격으로 기억을 잃은 상태였다. 그러니 설령 아는 사람을 만났어도 몰라보는 게 맞았다.

한데 이렇듯 차분한 모습이라니. 분명 수도엔 처음 와 본다고, 황궁 연회도 처음이라고 했던 그녀인지라 그 모든 행동이 수상쩍었다.

게다가 아키드가 한 말도 있어서 그냥 넘어가기 힘들었다. 의심에 불을 지핀 건 그다음이었다.

― 어서 와요.

웬 여인의 음성이 끼어들었다. 얼핏 귀에 익은 듯 생소한 음성인지라 정확히 누구인지는 알 수 없었다.

연회 내내 여러 사람을 만난 터라 더더욱 그랬다. 그러던 차에 익숙한 이름이 거론되었다.

― 수고했다, 제이드.

― 아닙니다.

‘제이드? 제이드라고?’

황궁에서는 만날 리 없을 거라 여겼던 이름이 들리자 나는 두 눈을 홉떴다.

제이드는 아키드의 친구였다. 죽은 줄 알고 있던 자가 살아 있는 것도 모자라 버젓이 황궁을 돌아다니다니.

그리고 그자를 메이벨이 알고 있다니?

‘대체 뭐가, 어떻게 되는 거야?’

얼이 빠져 있는 사이 대화는 이어졌다.

― 그런데 그건 뭔가요?

― 아, 대공자비의 레티큘이네. 오늘 이걸 핑계로 왔거든.

메이벨이 상대를 하대하며 고고하게 대답했다. 평소 유순해 보이던 음성과는 사뭇 다른 오만함이 느껴졌다.

메이벨의 음성이 분명한데 그녀가 아닌 것 같았다.

나는 굳은 얼굴로 영상석을 응시했다. 하필 메이벨의 키가 작고, 허리춤에 레티큘을 매고 있는 터라 상대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드레스를 입은 것을 보면 귀부인인 것 같은데, 그것조차 특정 짓기 어려운 수준이었다.

이번 연회의 드레스 코드에 맞게 다들 비슷한 색과 원단의 옷을 입은 탓이었다.

그때 상대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 흐음, 귀찮은 걸 달고 왔군요. 어디서 보았나 했더니 아까 에이프릴 후작이 자랑하던 거네.

이런.

아무래도 내 영상석을 보고 하는 말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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