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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가 시집살이 너무 쉬운데요 (91)화 (91/177)
  • #91.

    황궁 연회 전날, 아키드는 창밖을 응시한 채 생각에 잠겼다. 그의 손에는 쉐리에게서 온 편지가 들려 있었다.

    외출하고 돌아올 때 마부가 건네준 것이었다. 아키드가 다시 한번 편지를 읽었다.

    [어떻게 알고 편지를 보냈나 생각했지?

    오해하지 마. 내가 시켜서 널 미행한 건 아니니까.]

    그 말은 쉐리의 아이 중 하나가 미행을 했다는 뜻이었다. 쉐리는 예전부터 제 사람에게 극진해서 추종자가 많이 붙곤 했었다.

    설령 미행이 아니더라도 그날 7지구에서 13지구로 향하는 문턱에서 에이프릴의 쌍둥이와 떠들썩하게 이야기했으니, 주변에 수소문만 해도 알 수 있었을 터였다.

    [역시나 배부르고 따뜻하게 잘 살고 있더라. 샘나게.]

    퉁명스러운 언행 뒤로 다소 난폭한 말이 이어졌다. 대충 너만 잘 먹고 잘 살아서 좋냐는 비아냥이었다.

    거기까지만 읽고 버려도 좋았겠지만 아키드는 그러지 않았다.

    그 이유는…….

    [그때는 미안했어. 아무것도 모르고 애먼 너를 괴롭히고 욕했어. 네 말대로라면 제이드가 먼저 우릴 버린 거니까.]

    심술 섞인 말 뒤에는 미안하다는 사과가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딱히 제이드에게 책임 회피를 하려고 했던 건 아니었는데, 쉐리는 제이드에게 분노를 느끼는 듯했다. 그러면서도 그리운지 넌지시 물었다.

    [혹시 제이드가 어디 있는지 너는 알아? 알면 알려 줘, 줘 패 버리게.]

    원망할 타깃을 잡지 않으면 살 수 없는 병이라도 걸린 건지. 아키드는 쉐리의 난폭성에 실소를 터트렸다.

    제이드의 위치를 알고 싶은 건 아키드도 마찬가지였다.

    [네 아내한테 못난이라고 한 것도 사과할게. 이제 보니 마음씨 넓은 아가씨더라.]

    아키드는 마지막 구절을 거듭 읽었다. 보아하니 로에나가 그 후에 몰래 뒤를 봐 준 모양이었다.

    쉐리는 거처를 들키면 꼭꼭 숨는 버릇이 있었다. 해서 찾기 쉽지 않았을 텐데.

    아무래도 쌍둥이 오빠 찬스를 쓴 것 같았다. 그때 보니 수색에 능해 보였으니까.

    [네 부인 덕분에 그간 해 보고 싶었던 일을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아. 그러고 보면 꽤 철저하더라. 차용증에 계약서까지 쓰라고 하고, 어휴.

    어쨌든 덕분에 받은 게 있기도 하고, 너한테는 미안한 게 많으니까. 나중에 내가 필요해지면 13지구로 찾아와.

    아마 그즈음이면 나도 뭐라도 되어 있지 않겠어?]

    로에나에게 차용증을 쓰는 건 예삿일이었다. 이미 사업까지 벌이고 있으니 그런 것은 더더욱 철저하게 할 터였다.

    ‘미안해요. 아키의 친구들을 함부로 대해서.’

    지난날 로에나가 했던 말이 귓가에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나타나기를 반복했다.

    아무래도 그날 일을 내내 마음에 둔 모양이었다. 이렇듯 쉐리를 찾아내 살길을 마련해 준 것을 보아하니.

    대체 로에나가 얼마나 도와줬고, 쉐리가 무얼 하겠다는 건지는 모르겠다.

    한 가지 확실한 건 그가 먼저 쉐리를 찾아갈 일도, 다시 13지구로 돌아갈 일도 없다는 점이었다.

    혹여 찾아가게 되더라도 그 이유는 단순한 향수가 아니라 다른 것이리라.

    아키드에겐 이미 과분할 정도로 소중한 존재가 있었다. 언제든지 저를 반갑게 맞아 줄 아내가 말이다.

    아키드가 걸음을 옮겨 테이블에 놓인 등불에 편지를 태웠다. 활활 잘도 타오르는 등불은 로에나를 닮은 붉은색이었다.

    그것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데 테라스에서 누군가의 인기척이 들렸다.

    아키드가 설마, 하고 테라스로 나가니 잇닿은 테라스에 반가운 얼굴이 있었다.

    로에나였다.

    * * *

    [정중히 사과했어. 네 말대로 다시는 아키드를 찾아가지 않을게.

    이제 만족해?]

    힐난하는 듯한 편지였다. 나는 성격 나쁜 발신인인 쉐리를 떠올리며 피식 웃었다.

    아무리 멍청한 쉐리라 해도 계약서까지 쓴 마당에 아키드를 괴롭히지는 못할 터였다.

    나는 쉐리 일당과 그렇게 헤어진 후 비비안을 13지구로 보낸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이미 거처를 옮겨 흔적도 없다는 말에 포기했다가, 뒤늦게 혹시나 싶어 카일에게 부탁했었다.

    그러자 반나절 만에 옮긴 거처를 알아내서 얼마나 놀랐던지. 덕분에 쉐리를 만나 결판을 낼 수 있었다.

    아키드를 향한 쉐리의 비뚠 생각을 고쳐먹도록 아주 촌철살인을 날려 뭉개 주었으니까.

    “이걸로 아키드의 마음이 조금 나아졌으면 좋겠는데.”

    나는 괜스레 아키드의 방에 딸린 테라스를 힐끔거렸다. 혹시라도 나올까 싶어 아까부터 이곳에서 서성이는 중이었다.

    내가 쉐리 일당을 원조해 주기로 한 건 비단 그녀를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혹시 모를 미래를 위한 일종의 보험이었다.

    ‘어쨌든 쉐리는 나중에 검은 조직에 몸담게 되니까.’

    원작 속 그녀는 13지구를 쥐락펴락하는 위치까지 오르게 되었다.

    어릴 적부터 거리를 전전하며 익힌 나쁜 기술들로 나쁜 짓을 했다고나 할까.

    원래 검은돈은 모으기 쉬운 법이고, 그러한 조직은 아주 악질 중의 악질일 확률이 높았다.

    원래라면 그런 자들과 상종하지 말자는 주의지만, 상황이 상황인 만큼 미리 손을 써 둘 필요가 있었다.

    지금부터 잘 지원한다면 그럴듯한 길드로 탈바꿈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고.

    쉐리는 거리 출신이니 다른 곳보다도 흑마법사들을 추적하기 수월할 것 같았다.

    음지의 조직은 음지의 조직으로 맞서겠다는 판단이었다. 물론 그 정도로 성장하려면 꽤 시간이 걸릴 터였다.

    “오염이 언제 또 시작될까?”

    ― 금기를 어긴 사람을 찾지 않는 한 오염은 끊임없이 나타날 거야. 그들은 오염을 몰고 다니거든.

    정령이 내 손끝에 가만히 내려앉으며 재잘거렸다. 나 혼자서 그 못된 흑마법사들의 뒤처리를 할 걸 생각하니 절로 울컥했다.

    그래. 이게 다 망할 흑마법사들 때문이었다. 로에나가 요절하는 것도, 하델루스 가문이 큰 타격을 입는 것도 모두 다.

    ― 그래도 걱정하지 마. 너라면 충분히 막아 낼 수 있을 거야.

    “막기만 한다고 되나. 찾아서 담판을 지어야지. 이대로 계속 정화만 하고 다닐 수는 없잖아.”

    ― 어차피 꼬리는 밟힐 거야.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금기를 어긴 부작용은 커지니까.

    “부작용이라고?”

    ― 흑마법사가 금기를 어기는 건 사실 자살 행위나 마찬가지야. 오염을 양산하는 걸어 다니는 죽은 땅이거든.

    ― 대륙을 온통 오염시키고도 남을 재앙 덩어리지.

    “그럼 정말 위험한 거 아니야? 나 혼자서 감당 못 하면 어떻게 해?”

    ― 얘도 참, 그건 걱정할 필요 없어. 네가 델피나를 인식할 수 있는 특이체질이란 걸 잊지 말라고.

    ― 그래, 맞아. 정화한다고 해도 죽지는 않을 거야. 그렇고말고.

    어쩐지 신뢰가 떨어지는 말투인데.

    내가 못 믿겠다는 듯 가느스름한 눈으로 쳐다보자 정령들이 부산스럽게 말했다.

    ― 어차피 여기에 성녀도 있다며. 성녀가 도와줄 텐데, 뭘 걱정해?

    “그거야 그렇지만.”

    어쩐지 폭풍 전야처럼 불안하단 말이야.

    게다가 메이벨에게서 낯선 느낌이 들 때면 뭔가 놓친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나는 태평한 정령들에게서 고개를 돌려 테라스 난간에 턱을 괴었다. 저녁이 되니 조금 쌀쌀해 이만 들어가야 할 것 같았다.

    그때였다.

    “아직 안 잤습니까?”

    “아키?”

    고개를 돌리니 아키드가 등불을 든 채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간절히 바라면 달님이 소원을 이루어 준다고 하더니, 정말 아키드가 이 밤에 테라스로 나와 놀라웠다.

    내가 난간을 붙잡아 상체를 앞으로 쭉 빼자 그가 등불을 내려놓고 난간에 바짝 다가왔다.

    “조심하십시오.”

    이 와중에도 내가 떨어질까 염려하다니, 다정하기도 하지.

    때마침 부는 바람에 아키드의 흑발이 가만히 나부꼈다. 그 광경이 참 아름다웠다.

    달빛까지 머금으니 꼭 밤하늘이 지상에 강림한 것처럼 보였다. 내가 그 모습을 대놓고 감상하며 말했다.

    “그냥 잠이 안 와서 밤하늘을 구경하고 있었어요.”

    “날이 아직 추운데, 너무 얇게 입은 거 아닙니까?”

    그 말과 함께 아키드가 담요를 챙겨 와 내밀었다.

    테라스와 테라스를 사이에 두고, 난간과 난간에 기대어 아키드와 달밤의 대화를 시작했다.

    “그러는 아키도 옷이 얇은데요.”

    “추위를 잘 안 타서 괜찮습니다.”

    “하긴 아키 품은 늘 따뜻하더라고요.”

    “필요하면 언제든지 내어 줄게요. 로에나한테는 늘 열려 있으니까.”

    아키드가 두 팔을 벌려 환영한다는 몸짓을 취했다. 매번 귀가 붉어지면서, 이럴 때 보면 과감하기 이를 데 없다.

    성인이 되면 얼마나 더하려고 벌써부터 이렇게 멋지고 난리야.

    “그런 약속은 위험해요. 제가 아예 붙어 다니게 해 달라고 하면 어쩌려고요?”

    “과연 제가 위험할까요?”

    청회색 눈동자가 짙은 빛을 띠며 나를 그윽하게 바라보았다. 눈을 반쯤 감아 웃는 그를 보니 심장이 간질거렸다.

    “로에나가 원한다면 하루 종일 붙어 다녀도 좋은데, 난.”

    이 사람이, 어디까지 위험해지려고!

    나는 괜스레 헛기침을 하며 허세를 부렸다.

    “좋아요, 약속했어요?”

    그러곤 잠시 그의 품에 안긴 채 뽈뽈거리며 돌아다니는 상상을 하다 그만 히죽 웃고 말았다.

    아키드는 알까. 내가 이렇게 흑심을 잔뜩 품은 연필 같은 존재라는 걸.

    역시 위험한 건 내가 아니라 아키드인데, 그는 영 모르는 것 같다.

    착한 생각, 착한 생각, 하고 속으로 주문을 외울 때였다.

    “로에나, 혹시 지금도 추워요?”

    “으음, 조금 추운 거 같기도 하고.”

    내가 어깨를 쓸자 아키드가 말했다.

    “그렇다면 잠시 뒤로 다섯 걸음 물러나십시오.”

    “아, 네.”

    난간에 기대다 떨어질까 걱정되나 싶어 다섯 걸음 물러나 섰을 때였다.

    돌연 바닥에 그림자가 지는가 싶더니 아키드가 훌쩍 이쪽으로 넘어와 바로 앞에 착지했다.

    ‘에단에게 검술이 아니라 비상하는 법이라도 배운 걸까?’

    새인 키나보다도 자연스러운 착지에 감탄하는데 돌연 아키드가 나를 와락 안았다.

    따스한 품에서 청량한 향기가 나는 듯했다. 그리고 그보다도 더욱 달콤한 음성이 귓가에 울렸다.

    “저는 약속을 잘 지킵니다.”

    “…….”

    “이러면 안 춥죠?”

    어쩜.

    자꾸만 귀여운 짓을 하는 아키드에 어느새 올라간 광대가 내려갈 줄을 몰랐다.

    약속하자마자 이렇게 몸소 실천까지 해 주다니, 너무 좋은데?

    나는 못 이기는 척 그 품에 기대며 속삭였다.

    “네. 이제 좀 따뜻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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