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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가 시집살이 너무 쉬운데요 (89)화 (89/177)
  • #89.

    에드워드는 캐서린의 부름에 몸을 웅숭그리며 시치미를 떼었다. 그러자 캐서린이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며 물었다.

    “설마 기둥으로 그 덩치를 숨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다 보여, 오빠.”

    “헐! 진짜 다 보여?”

    “응. 대놓고 보이는데.”

    캐서린의 심드렁한 대꾸에 에드워드는 충격받은 얼굴로 입술을 달싹였다.

    제 딴엔 잘 숨어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가 기둥에서 나와 쭈뼛쭈뼛 다가오더니 뒷머리를 만지작거리며 내게 말했다.

    “벌써 가려고? 좀 더 있다 가지.”

    이젠 말을 더듬는 어리숙한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여전히 눈은 잘 못 마주쳤다.

    아키드에게 하던 것을 보면 그리 소심한 성격도 아닌 것 같은데.

    ‘에드워드도 캐서린만큼이나 캐붕(캐릭터 붕괴)이 심한 거 같아.’

    이제는 내가 알던 원작과 이 세계는 별개의 세상이지 않을까, 하는 기분마저 들었다. 이름만 같고 알맹이는 완전히 다른.

    “너무 오래 있었으니까요. 정기 회의도 곧 끝나는데 더 민폐 끼치기 전에 가야죠.”

    “혹시 누가 눈치 줬어? 걱정하지 마. 내가 가만 안 둘 테니까. 그냥 계속 있어도……!”

    “에이, 그러다간 그쪽 정강이가 남아나질 않을걸요?”

    “응?”

    내 서늘한 말에 에드워드가 알아듣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가 웃음으로 무마하자 그가 슬쩍 눈치를 보는가 싶더니 등 뒤에 숨긴 물건을 내게 건넸다.

    웬 장미 꽃다발이었다. 내가 멀뚱히 쳐다보자 그가 벌게진 얼굴로 말했다.

    “오다 주웠어.”

    “아, 예…….”

    오다 주웠다기엔 포장이 멀끔한 꽃다발이었다.

    누군가 한 송이, 한 송이 정성 들여 포장해서 밖에 버려두었나 보구나.

    내가 우스워 죽겠다는 얼굴로 꽃다발에 손을 뻗는데 누군가 꽃다발을 채 갔다. 청량한 향이 코끝에 감도는 것을 보니 아키드였다.

    “뭘 이런 걸 다.”

    아키드가 꽃향기를 맡으며 능청스럽게 중얼거렸다. 꽃과 아키드가 너무 잘 어울려서 나도 모르게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때마침 등장한 아키드에 표정이 사나워진 에드워드가 팔을 뻗었다.

    “뭐야, 안 내놔? 너한테 준 거 아니라고.”

    가뿐히 손길을 피해 낸 아키드가 내 손을 붙들며 말했다.

    “데리러 왔습니다.”

    “내 말 안 들려?”

    에드워드가 씩씩거리자 아키드가 힐끔 쳐다보았다.

    “남의 아내한테 너무 지대한 관심을 보이지 마시죠.”

    딱딱한 존칭에 에드워드가 변명조로 대꾸했다.

    “따, 딱히 그런 거 아니야! 그냥 작별 선물일 뿐이었어.”

    “그럼 제가 받아도 상관없겠군요. 저도 오늘 떠나니까요. 고맙습니다, 소공작.”

    “이……!”

    에드워드가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해 입술을 달싹이다 낮게 욕지거리를 했다.

    떠나는 사람은 나뿐만이 아니니 아키드의 말에도 일리가 있는 탓이었다.

    눈에 띄게 에드워드를 의식하는 아키드를 보면 괜스레 웃음이 나왔다. 결국 에드워드가 울상을 지은 채 포기했다.

    “그럼 다음에 봐요.”

    나는 꾸벅 인사하고 마차로 향했다. 캐서린이 뒤따라오려는 에드워드를 막고 “추태 부리지 마” 하고 으름장을 놓는 소리가 다 들렸다.

    경계한 게 무색하게도 무해한 남매라서, 나는 선물 받은 팔찌를 만지작거리며 생각이 많아졌다.

    * * *

    하델루스 별장의 부부 침실은 제법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지닌 아늑한 별채였다.

    아쉬운 점이라면 이곳도 하델루스 성처럼 침실이 두 개로 나뉘어 있다는 점이었다.

    “쓸데없이 구조가 닮아선.”

    내가 구시렁거리는 말에 한나가 피식 웃음 지었다. 이미 여러 번 들은 말이라 더는 대꾸도 안 하는 눈치였다.

    나는 한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한나는 전날에 먼저 별장으로 와 내 짐을 정리했었다.

    그렇다면 메이벨과 마주쳤겠지. 나는 별생각이 없는 척 침대에 엎드린 채 운을 뗐다.

    “한나는 그 애 봤어?”

    “그 애요?”

    “왜, 아버님이 데려온 여자애.”

    “아아, 메이벨 님.”

    한나의 입에서 예상했던 이름이 거론되었다. 나는 몸을 뒹굴어 한나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가 말했다.

    “응. 걔. 어떤 것 같아?”

    “음, 굉장히 조용하세요. 대공 전하께서 계실 땐 아이답게 이런저런 말도 많이 하는데, 평소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더라고요.”

    “조용하다고?”

    “네. 좀 다가가기 힘든 타입이에요. 신기하게 대공 전하한테만 아이처럼 칭얼거리세요.”

    “아버님께 많이 의존한다는 게 사실이구나.”

    확실히 스티그 섬에서의 일이 충격이 컸던 모양이다.

    저를 구해 준 대공에게 집착하는 것을 보면 의지할 구석이 필요한 것도 같고.

    밝기만 하던 여주인공이 조용하다니. 내 기억에 원작 속 메이벨은 상큼발랄한 오지라퍼였는데.

    지나다니며 남주 후보들을 구해 주고, 조력자들을 얻어 내는 스토리부터가 오지랖 없이는 안 되는 일이었다.

    나는 대공이 오기 전에 한번 볼까 싶어 자리를 툭툭 털고 일어났다.

    “말 나온 김에 지금 한번 볼까?”

    “지금요?”

    “응. 미리 인사 정도는 해 두는 게 좋을 것 같아서. 곧 같이 북부로 돌아간다며.”

    “직접 갈 필요가 있나요. 제가 이곳으로 데리고 올게요.”

    “아냐. 뭘 번거롭게 그래. 그냥 방이 어딘지만 안내해 줘.”

    내가 손사래 치며 안내하라 눈짓하자 한나가 나를 메이벨의 방으로 데려갔다.

    막 메이벨의 방 앞에 도착했을 때였다. 마침 방을 나서던 시녀가 우리를 발견하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대공자비님, 여긴 어쩐 일로.”

    문을 연 채로 시녀가 엉거주춤 내게 인사하자 안쪽에서 음성이 들렸다.

    “누가 왔어요?”

    맑은 음성이었다. 캐서린의 명랑한 목소리와는 대조적으로 차분한 말씨였다.

    내가 고개를 빼꼼 내밀어 안쪽을 살폈다. 그리고 깜짝 놀랐다. 청초한 인형처럼 생긴 여자애가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는 탓이었다.

    원작에서 늘 웃는 상이라고 했던 것과 달리 다소 차가운 인상이었다. 아마도 그렇게 느낀 건 표정 때문인 것 같고.

    “누구세요?”

    경계 가득한 얼굴에 나는 무해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안녕, 메이벨.”

    친근하게 이름을 부르자 오히려 역효과였는지 메이벨이 와락 얼굴을 구겼다. 그러자 한나가 곁에서 말했다.

    “대공자비님이십니다.”

    “대공자비?”

    메이벨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나를 빤히 바라보는가 싶더니 “아아” 하는 탄성을 내뱉으며 고개를 주억였다.

    기묘한 반응에 멀뚱히 있자 그녀가 내게 다가와 공손히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대공자비님. 메이벨 해링턴이라고 합니다.”

    아직 입적하기 전인데도 벌써 해링턴 일가가 된 것처럼 자연스러운 행동이었다. 뭔가 상상한 첫 만남이 아니라 다소 얼떨떨했다.

    “으응, 반가워.”

    “이렇게 뵙게 되어 영광이에요. 처음 보는 분인지라 저도 모르게 결례를 저질렀습니다.”

    직전의 심드렁한 반응과 달리 눈에 띄게 싹싹해진 태도에 어쩐지 이질감이 들었다. 깍듯해도 너무 깍듯해서, 좀 기계 같은 느낌이다.

    “괜찮아. 그럴 수 있지.”

    “제가 먼저 찾아뵈었어야 했는데…….”

    “아냐, 아냐! 몸이 안 좋다고 들었어.”

    나는 또다시 듣기 좋은 말을 시전하려는 메이벨의 입을 원천 봉쇄하며 손사래 쳤다. 그러자 메이벨이 수줍게 미소 지었다.

    “대공 전하께서 보살펴 주신 덕에 많이 좋아졌어요.”

    그 말과 함께 메이벨이 자리에 앉을 것을 권했다.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행동에 나도 모르게 휩쓸려 앉은 때였다. 메이벨의 시선이 내 머리로 향했다.

    “내 머리에 뭐가 묻었어?”

    “아뇨, 머리핀이 예뻐서 봤어요. 리본 매듭이 특이한 걸 보니 에셀 가문의 물건 같네요. 특히 여기 묶은 방식이요.”

    메이벨이 내 리본의 매듭 부분을 가리키며 말했다. 수도에 한 번도 와 본 적 없을 텐데 이런 건 어떻게 안 건지 몰랐다.

    일종의 여주인공 버프인가 싶어 감탄조로 물었다.

    “그런데 이게 에셀 가문 것인지 어떻게 알았어?”

    그때였다. 메이벨의 얼굴에 아차, 싶은 당혹감이 스치는가 싶더니 그녀가 뜨끔한 어조로 얼버무렸다.

    “으음, 에셀 공작가가 사치품을 다룬다는 이야길 들어서요. 리본 장식이 특히 인기라고 해서 그냥 찍어 봤어요.”

    찍었다기에는 아까 어떤 매듭 방식을 콕 집어 말하지 않았던가?

    내가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리자 메이벨은 무해한 미소를 지어 보일 뿐이었다.

    “제가 찍어 맞히는 걸 좋아해서.”

    “그렇구나. 신기하다. 이거 에셀 영애가 선물로 준 거거든. 아마 네 말이 맞을 거야.”

    “네? 에셀 영애를 아세요?”

    내가 캐서린을 언급하자 메이벨이 눈을 둥그렇게 뜨고 물었다. 설마 내가 그녀를 만났을 줄은 몰랐다는 듯했다.

    “당연하지. 그동안 그 성에서 지냈었거든.”

    내가 대수롭지 않게 대꾸하자 메이벨이 눈에 띄게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그녀가 더듬더듬 말했다.

    “에셀 성에서 지낸다는 이야기는 못 들었어요. 왜 말씀 안 하셨지.”

    아마도 대공이 거처에 관해서 메이벨에게 설명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내가 아는 그라면 분명 귀찮아서 대충 얼버무렸을 터였다.

    “그야 그것까지 말할 이유는 없으니까. 내가 너한테 일일이 보고해야 하냐.”

    그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깜짝 놀라 뒤를 도니 대공이 문설주에 기댄 채 이쪽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정확히는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새를 못 참고 여길 오는구나. 나를 좀 그렇게 찾아보지 그러냐.”

    “아버님, 어서 오…….”

    “전하!”

    내가 막 대공에게 배꼽 인사를 하려고 일어난 찰나였다.

    메이벨이 나보다도 먼저 일어나 대공에게 쪼르르 달려갔다. 내게는 보이지 않던 아주 환한 미소를 머금은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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