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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가 시집살이 너무 쉬운데요 (88)화 (88/177)
  • #88.

    에이프릴 후작은 내 양손에 선물을 잔뜩 쥐여 주고 나서야 우리를 돌려보내 주었다.

    ‘콩알만 했던 게 엊그제 같은데.’

    ‘이것도 먹어 봐. 특별히 네가 좋아하는 것들로 준비했으니까.’

    ‘팍팍 먹어! 세 그릇은 먹어야지, 한 그릇이 뭐야. 양이 왜 이렇게 줄었어.’

    친정집에 가서 배 터지게 먹고 돌아왔다는 일화는 남의 일이 아니었다. 종일 먹기만 하다 온 것 같아 배가 더부룩했다.

    특히 나를 손 안의 보석처럼 소중하게 대하는 세 사람의 모습은 진귀한 풍경이었다.

    꼼짝하지 않고 눈짓만 해도 앞에 다 대령할 것 같은 극진한 보살핌에 로에나가 왜 그렇게 제멋대로 행동했는지 알 것 같았다.

    이렇듯 싸고돌며 키웠으니 버르장머리가 없을 만도 했다.

    ‘그래도 생각보다 편했어.’

    불편할 줄로만 여겨졌던 만남이었는데, 긴장한 것치고는 꽤 즐거웠다.

    조금 피곤하기는 했지만 근본적으로 나를 향한 애정이 묻어난 행동들이라 마냥 불편하지만은 않았다.

    다행히도 그들은 내게서 위화감을 전혀 못 느끼는 눈치였다.

    아마도 로에나의 취향이 나와 비슷해서 차이를 쉽게 구분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식성이나 미적 취향이 은근 닮아서 속이는 게 제법 수월했다.

    시간이 흘러 어느덧 에셀 성에서의 마지막 날이 되었다.

    캐서린은 우리가 별장으로 거처를 옮긴다는 말에 무척 슬퍼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제법 친해진 터라 더더욱 아쉬운 모양이었다.

    캐서린이 내게 뭔가를 내밀며 말했다.

    “에셀 가문에서 손님을 떠나보낼 때 주는 선물이야. 액운을 막고 길운을 모아 준대.”

    살구색 실과 금색 실을 엮어 만든 실 팔찌였다. 팔찌 중앙에는 투명한 구슬이 있었는데, 그 속에는 불꽃이 타닥타닥 일렁이고 있었다.

    이글거리는 것을 보니 에셀 가문의 힘이 깃든 것 같았다.

    악녀 가문이라고만 생각한 곳에서 액운을 막는 선물을 받으니 기분이 이상했다. 그동안 내가 너무 색안경을 끼고 본 것 같아서.

    “이건 불 속성 힘인가?”

    “응, 맞아. 내가 아플 때 아빠가 선물해 준 건데, 이젠 괜찮으니까.”

    “아팠어?”

    캐서린이 어릴 때 몸이 안 좋았다는 이야기는 읽은 기억이 없는데.

    내가 의아해하며 되묻자 캐서린이 말했다.

    “응. 몇 달 전에 크게 아프기도 했고, 태어날 때부터 몸이 좀 안 좋았거든. 그리고 이건 비밀인데…….”

    캐서린이 내 귓가에 바짝 다가와 작게 중얼거렸다.

    “난 각성을 못 할 거라 아빠가 챙겨 주신 물건이야. 일종의 위장품인데.”

    “응? 그게 무슨 소리야, 각성을 못 하다니?”

    제국민이라면, 특히 귀족이라면 강한 힘을 근거한 각성은 기본이었다.

    게다가 원작에서 캐서린은 정통성에 걸맞게 불 속성 마법을 사용하지 않았던가.

    내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짓자 캐서린이 어색하게 웃었다.

    “그게 내가 태어날 때 불꽃이 일지 않았대. 힘이 없다는 뜻이지.”

    “…….”

    “어쩌면 명줄도 짧을지도 몰라.”

    나는 무거운 이야기를 가벼운 농담처럼 말하는 캐서린을 빤히 쳐다보았다.

    귀족가의 자제는 태어날 때 가문 특유의 속성이 발아하곤 했다. 특히 자파르시아의 네 제자의 속성은 특이점이 있었다.

    대지 속성의 아이는 지진이, 어둠 속성의 아이는 암전이, 불 속성의 아이는 불꽃이, 빛 속성의 아이는 별똥별이 떨어지곤 했다.

    한데 캐서린이 태어날 땐 불꽃이 일지 않은 모양이었다.

    대개 그러한 아이들은 몸이 약해 각성 전에 죽거나 아예 각성기를 건너뛰곤 했다.

    “이걸 왜 나한테 말해 주는 거야? 우린 안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으음. 그냥, 로에나라면 내 비밀을 지켜 줄 것 같아서, 라고 말하면 너무 성의 없지?”

    “…….”

    “그냥, 나 때문에 가족들이 전전긍긍하는 게 싫어서. 차라리 비밀이 확 밝혀졌으면 좋겠어. 그럼 아빠도, 오라버니도 조금은 개운하지 않을까?”

    이제 보니 전혀 가벼운 농담조가 아니었다. 캐서린의 옅은 미소에서 애수가 느껴지는 듯했다.

    가족들이 제 안위 때문에 조마조마해하며 사는 것에 대한 미안함, 초조함 같은 것들 말이다.

    차라리 비밀이 밝혀져 자신이 잘못되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나쁜 생각을 먹는 것 같기도 했다.

    이제 보니 그녀가 유독 밝고 명랑한 건 가족들에게 그 슬픔을 감추기 위함이었나 보다.

    시한부일지도 모를 삶에서 캐서린은 체념이 아니라 열심히 살아 내고자 했겠지. 사랑하는 가족들을 위해서.

    하지만 이따금 그게 다 무어냐 싶어 모난 감정이 삐죽삐죽 새어 나오는 듯했다.

    가족들이 저 때문에 힘들지 않기를 바랄수록 더더욱 크게 느껴졌겠지.

    이렇게 보니 캐서린도 영락없는 어린아이구나. 아키드처럼 아직은 흑화하지 않은 순진무구한 소녀였구나.

    나는 입가를 부드럽게 끌어올리며 말했다.

    “캐서린은 상냥하구나.”

    “응?”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을게. 네 비밀도, 네가 가족을 많이 좋아하는 것도.”

    “……말해도 상관없는데.”

    캐서린이 기어들어 가는 음성으로 불만을 토로했다. 나는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그러니 캐서린도 약속해.”

    “무슨 약속?”

    “네 약점을 오늘처럼 아무한테나 쉽게 발설하지 않겠다고. 나야 말할 생각이 없지만 개중엔 이걸 이용해 에셀 가문을 해치려 할 수도 있어.”

    “…….”

    “너를 위험에 던지면 결국 가족들이 다칠 거야. 내가 볼 때 에셀 공작님도, 소공작도 너를 많이 좋아해서 위험을 감수하려 들 것 같거든.”

    과연 그쪽으론 생각하지 못했는지 캐서린의 눈동자에 지진이 일었다. 금색 눈동자가 물 먹은 별처럼 반짝거렸다.

    “내가 누군가를 엄청 좋아해 봐서 아는데, 그 사람이 다치는 걸 보느니 차라리 내가 다치고 싶어지거든. 아마 네 가족들도 같은 마음일 거야.”

    그래. 아키드가 위험해진다면 나는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그를 대신해 불구덩이에 뛰어들지도 몰랐다.

    내 새끼 다치는 꼴을 어떻게 봐.

    내 엄한 충고에 캐서린이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다 고개를 푹 숙였다.

    “으응. 다신 안 그럴게.”

    “그리고 선물도 고마워. 이걸 내가 받아도 되는지 모르겠어.”

    “난 다른 것도 많아. 네 말대로 아빠가 날 좀 좋아해야지. 너에게 선물했다고 하면 잘했다고 하실 거야.”

    캐서린이 언제 울먹거렸냐는 양 헤실헤실 미소 지었다. 그게 퍽 사랑스러워서 나도 모르게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이에 깜짝 놀란 캐서린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쳐다보았다.

    당황한 내가 뒤늦게 손을 물리려 하자 그녀가 저지했다.

    “계속해 줘. 왠지 기분이 좋아지는 거 같아.”

    “미안, 나도 모르게 동생 같아서.”

    천하의 악녀 캐서린이 귀여워 보이는 때가 올 줄은 누가 알았겠는가. 내가 어색하게 웃자 캐서린이 맑게 미소 지었다.

    “지금 이 순간 아키드가 엄청 부러워졌어. 아키드는 좋겠다, 로에나 같은 부인이 있어서.”

    “응?”

    “나도 날 엄청 좋아해 주는 사람이 나타나면 좋겠어. 그럼 정말 사랑해 줄 자신 있는데.”

    캐서린이 조잘거리는 말에 나는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내가 말한 상대가 아키드라는 걸 단번에 들킨 탓이었다.

    “아키라는 건 어떻게 알았어?”

    “헤헤. 글쎄에.”

    캐서린이 빙글 돌며 시치미를 떼었다. 도로 쾌활해진 모습에 나는 그냥 픽 웃어 버렸다. 그러다 문득 나만 선물을 받았다는 걸 떠올렸다.

    “잠시만.”

    주섬주섬 뭐라도 줄 게 없나 두리번거리자 캐서린이 물었다.

    “뭐 해?”

    “나도 뭔가 주고 싶어서.”

    “아니야. 보답을 바라고 준 선물도 아닌데.”

    그래도 어떻게 그냥 받기만 할 수 있겠는가. 나는 캐서린에게 잠시 기다리라 하고 한나를 시켜 페트라 한 쌍을 가져오게 했다.

    평민 놀이 도구라서 싫어할 수도 있지만 하델루스 인장이 음각된 보석 페트라였다.

    지니고 있는 것만으로도 가치는 충분할 테니 이거라도 줄 생각이었다.

    “이건 우리 집에 놀러 온 손님한테 나눠 준 놀이 도구인데. 바닥에 굴려서 하나씩 잡고 노는…….”

    “엇, 나 이거 알아. 페트라잖아.”

    내가 막 사용법을 알려 주려는데 캐서린이 명랑하게 대답했다. 나는 그녀가 평민들의 놀이인 페트라를 안다는 게 놀라웠다.

    무려 그 캐서린 에셀이지 않는가? 원작에서 귀족의 순혈성을 강조해 아키드를 업신여기던 장면을 생각하면 의외의 모습이었다.

    “알아?”

    “응. 알아. 평민들이 하는 놀이잖아.”

    해맑은 대답에 조금 허탈해졌다. 평민들의 놀이라는 걸 알면서도 저리 해맑다니. 정말 알면 알수록 원작과는 너무도 달랐다.

    “응, 맞아. 안다니 다행이다.”

    “우와, 인장까지 음각되어 있네. 너무 예쁘다. 헤헤.”

    “마음에 들어?”

    “응! 고마워, 로에나. 오히려 내 선물이 초라해진 거 같아.”

    캐서린은 안 되겠다는 듯이 제가 끼고 있던 머리 장식을 떼어 내 머리에 꽂아 주었다.

    “이것도 가져.”

    한눈에도 고가의 장식이었다.

    “아니, 난…….”

    “잘 어울린다.”

    거절할 새도 없이 캐서린이 한 걸음 뒤로 물러나 감상하듯 중얼거렸다.

    빚지는 게 싫어서 선물을 주었더니 선물을 또 받아 버린 상황이 퍽 난감했다.

    이래선 서로 선물 교환만 하다가 끝이 날 것 같아 결국 고맙다는 인사로 끝을 냈다.

    “다음에 영지로 초대할게.”

    “응, 꼭이야.”

    캐서린이 새끼손가락까지 걸며 약속을 받아 내곤 해사하게 웃었다.

    그렇게 작별을 고하고 헤어지려는 무렵, 그녀 너머에 있는 기둥 뒤로 살구색 머리통이 보였다.

    익숙한 머리통인지라 내가 집요히 쳐다보니 캐서린이 뒤를 돌았다.

    “응? 오빠, 거기서 뭐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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