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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가 시집살이 너무 쉬운데요 (87)화 (87/177)
  • #87.

    주말이 되자 에셀 성 앞에 화려한 마차 하나가 도착했다. 옥구슬에 칭칭 감긴 붉은 장미 문양 인장을 보니 에이프릴 가문에서 보낸 것이었다.

    오찬에 초대를 받았음에도 아침부터 대기하는 마차는 에이프릴 가문 사람들이 얼마나 극성인지를 알 수 있었다.

    나는 와인색 벨벳 원피스를 입은 채로 아키드와 함께 마차에 올라탔다.

    아키드 역시 나와 비슷한 재질의 정장을 입고 있었다. 검은색 크라바트는 내 리본과 깔맞춤한 것처럼 같은 소재였다.

    한눈에도 커플룩인 이 옷은 에이프릴 후작이 어제 소포로 보낸 것이었다. 오찬에 입고 왔으면 좋겠다는 짤막한 카드와 함께.

    아키드의 것까지 준비해 준 터라 사양할 수 없었다. 게다가 커플룩이니, 내가 마다할 이유도 없다.

    그때 엘레나가 내 리본을 정돈해 주며 말했다.

    “조심히 다녀오거라. 후작께서 알아서 하시겠지만 너무 늦지는 말고.”

    “네. 금방 다녀올게요.”

    뒤이어 엘레나가 아키드의 크라바트도 정돈해 주었다. 제법 다정한 손길이었다. 예전이었으면 상상도 못 할 모습이기도 했다.

    그렇게 단란한 배웅을 받고 에이프릴 별장으로 향했다.

    비옥한 남쪽 땅을 영지로 갖고 있는 가문답게 별장은 1지구에 위치해 있었다. 에셀 성과 거리가 가까워 마차로도 금방이었다.

    멍하니 창을 통해 밖을 보다 문득 떠오르는 일에 고개를 돌려 아키드에게 물었다.

    “그러고 보니 별장 보수 공사는 어떻게 됐어요?”

    공사를 마치면 거처를 옮긴다고 했던 것 같은데, 여태 에셀 성에 머물고 있어 하는 말이었다. 아키드가 말했다.

    “안 그래도 다음 주에는 별장으로 이동할 것 같습니다. 공사는 끝난 지 오래인데, 그 아이가 별장에 머물고 있어서 두 분이 상의하느라 늦어진 듯합니다.”

    “그 아이라면 스티그 섬에서 데려온 그 애요?”

    내 물음에 아키드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하긴 황제에게 대놓고 사생아인 척 행세를 했으니 곧바로 같은 별장에서 머무는 건 모양새가 이상했다.

    적어도 서로 협의하는 척 시간을 끄는 게 그럴듯해 보일 테니까.

    설령 나중에 진상을 알게 되더라도 언제 사생아라고 했냐고 시치미를 떼면 그만이었다.

    “그럼 조만간 그 아이와도 만나겠네요.”

    “그렇겠죠? 그것보다 로에나.”

    아키드는 메이벨을 만나든 말든 상관없다는 듯이 건성으로 대답하곤 화제를 돌렸다.

    “후작께서 정말 이 선물을 좋아하실까요? 전에 보낸 선물들은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

    그가 자신 없는 말투로 상자를 눈짓했다. 이미 앞서 보낸 선물들을 마뜩잖아하던 후작인지라 과연 저 선물이 통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걱정하는 그와 달리 내 표정은 확신에 차 있었다.

    “물론이죠. 분명 아주 기꺼워하실 거예요.”

    상자에는 내가 만든 영상석이 들어 있었다. 그것도 에이프릴 후작과 쌍둥이에게 보내는 영상 편지가 들어 있는.

    물론 편지를 가장한 경고였다. 또다시 아키드의 선물에 왈가왈부하면 만나 주지 않겠다는 선전포고가 들어 있었으니까.

    나는 쌍둥이와 대면하고 나서 확신했다. 에이프릴 가문이 로에나를 덕질하고 있는 게 분명하다고.

    코비슈타인의 증언과 현장 검증까지 마쳤으니 확실했다.

    그들에게서 동류의 냄새가 짙게 풍기는 만큼, 아키드가 그들의 환심을 얻는 건 쉬운 일이었다.

    내가 아키드를 좋아하니 그들도 나의 환심을 사기 위해 아키드에게 잘해 주는 수밖에 더 있을까?

    “아키는 걱정하지 말아요. 아마 이제 더는 아키에게 무어라 하지도 못할 거예요.”

    “안에 무슨 영상을 넣어 두신 건지 물어도 됩니까?”

    “그냥 안부 정도였어요.”

    내가 대충 얼버무리며 키득거리자 아키드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물론 경고성 멘트만 들어 있는 건 아니었다. 겸사겸사 드론도 홍보해달라 이야기했으니까.

    아직 드론과 영상석의 보급은 북부에 그친 상태였다. 슬슬 사업을 확장해야 하는 시기에 마침 수도에 왔으니 절호의 기회였다.

    마지막 날에 있을 연회에서 후작이 영상석과 드론을 홍보해 준다면 큰 효과를 볼 터였다.

    “겸사겸사 드론 홍보도 부탁드렸고요.”

    “그렇다면 더더욱 선물로써의 역할이 희석되는 거 아닙니까?”

    “드론 사업의 중간 유통사 권한을 드렸으니 딱히 희석되진 않을걸요?”

    무려 수도와 북부를 잇는 중개 역할을 선물로 주었는데 싫어할 리 없었다.

    “그리고 이미 보낸 선물로도 충분해요. 아버지가 괜히 심술을 부리는 거예요.”

    “초장부터 밉보인 기분입니다. 아무래도 소식을 전하지 않은 일 때문이겠죠.”

    아뇨. 그냥 싫은 걸 거예요.

    원래 딸 가진 아버지의 눈에 사위는 다 도둑놈으로 보이는 법이었다.

    게다가 눈에 넣어도 안 아플 딸이니만큼 아키드를 대하는 후작의 태도는 몹시 아니꼬울 터.

    “제가 곁에 있으니 아버지도 뭐라 하진 못하실 거예요.”

    “인정받을 수 있게 노력하겠습니다.”

    내가 힘내라는 뜻으로 두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일 무렵이었다. 정문을 통과한 마차가 별장 현관 앞에서 정차했다.

    “도착했습니다.”

    마부가 도착을 알리기가 무섭게 마차 문이 벌컥 열렸다. 놀라 쳐다보니 손 세 개가 쑥 들어왔다.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사태를 파악하려는데 바깥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아비 손을 잡고 내리거라.”

    중후한 음성의 사내는 에이프릴 후작이요.

    “아버지, 반칙입니다. 분명 가위바위보에서 제가 이겼습니다.”

    가위바위보를 운운하며 손을 더 뻗는 이는 카일 에이프릴이었다.

    “먼저 잡는 사람이 임자지. 하여튼 고지식하긴. 막둥아, 내 손 잡고 내려.”

    뒤이어 카일의 손을 찰싹, 때리며 촐싹대는 이는 일라이저 에이프릴이었다.

    도착하기가 무섭게 서로 내 손을 잡겠다고 으르렁대는 가족이라니.

    이래선 나가지도 못하고 입구를 봉쇄당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손은 두 개뿐이라 한 사람은 무조건 소외되는 상황.

    왜? 아예 그냥 머리, 허리, 다리를 사이좋게 붙들고 모셔서 내려가지?

    황당해진 내가 입을 열었다.

    “입구 막지 마세요. 그리고 가위바위보에서 졌으면 승복하셔야죠.”

    “역시 로에나, 똑똑하기도 하지. 뭐 하세요, 자리가 좁습니다.”

    카일이 승리자의 미소를 지으며 양옆에 선 이들을 번갈아 힐끔거렸다. 이에 의기를 상실한 두 사람이 아쉬움 가득한 얼굴로 손을 물렸다.

    나는 카일의 손을 잡고 마차에서 내렸다. 뒤이어 아키드가 내리며 후작에게 선물을 건넸다.

    “이번 선물은 로에나와 함께 준비했습니다.”

    “오오.”

    후작은 나와 함께 준비했다는 말에 반색하며 냉큼 선물을 챙겼다. 그러곤 무어라 할 새도 없이 상자를 열었다.

    “이건?”

    “로에나가 이번에 가신과 함께 개발한 아티팩트입니다. 마나 수치에 따라 긴 영상도 담을 수 있죠.”

    “영상이라고?”

    “예. 로에나가 안에 드론에 관한 설명이랑 세 분을 향한 안부 영상 편지를 넣어 두었다고 하니…….”

    아키드가 차근히 설명하려는데 카일과 일라이저의 눈빛이 맹수처럼 번득였다.

    그리고 그보다도 먼저 후작이 상자에 드론을 넣어 품에 단단히 넣었다.

    “아주 마음에 드는군.”

    “아버지, 분명 세 분을 향한 안부 영상 편지라고 했습니다. 저희에게도 볼 권리가 있습니다.”

    “맞아요, 아버지! 치사하게 같은 편끼리 이러지 맙시다!”

    카일과 일라이저의 항변에도 후작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

    “먼저 잡은 사람이 임자이니라.”

    “뺏는 방법도 있습니다만.”

    “어디 뺏어 볼 수 있으면 뺏어 보든가.”

    후작이 오만한 표정으로 카일의 항변을 일축하곤 옆에서 대기 중이던 집사에게 제 서재 금고에 넣어 두라 단단히 지시했다.

    서재 금고라는 말에 카일과 일라이저가 낮게 욕지거리를 뱉는 걸 보면 보안이 철저한 모양이었다.

    나는 안 되겠다 싶어 나섰다.

    “셋이서 같이 보셔야죠. 그리고 혼자서 꼭꼭 감추고 있으라고 드린 게 아니에요. 이번 연회 때 홍보해 주길 바라서 드리는 건데.”

    “우리 귀염둥이 말이라면 그래야지. 걱정하지 말거라, 영상 편지는 내 서재에 두고 보여 줄 테니.”

    결국 소장은 본인이 하겠다는 말이었다. 카일과 일라이저가 여전히 분개했지만 어쩌겠는가. 저 셋 중에 제일 센 사람이 에이프릴 후작인 것을.

    “그것보다 우리 로에나, 많이 컸구나. 어디 안아 보자꾸나.”

    에이프릴 후작이 푸근한 미소와 함께 두 팔을 벌렸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어쩐지 마음 한편이 찌르르한 기분이었다.

    쭈뼛쭈뼛 다가가 품에 안겼다. 이상하게도 가슴이 뭉클해지는 게 꼭 내가 로에나 본인이 된 기분이었다.

    “보고 싶었단다.”

    후작의 다정한 말에 울컥하여 가만히 안겨 있는데 돌연 등이 묵직해졌다. 카일과 일라이저까지 내게 찰싹 붙은 탓이었다.

    답삭 안겨 붙는 쌍둥이 덕에 졸지에 공처럼 똘똘 뭉쳐지게 되었다.

    대체 아키드 앞에서 이 무슨 해괴한 짓이란 말인가.

    내가 몸을 비틀며 불편한 기색을 내비치자 후작이 날카롭게 으르렁거렸다.

    “비켜라, 우리 귀염둥이가 답답해하잖아.”

    “혼자만 안는 법이 어디 있습니까. 같이 좀 안읍시다.”

    카일이 물러서지 않고 더욱 엉겨 붙자 뒤이어 일라이저가 보태었다.

    “우리 막둥이, 아직도 품에 한 줌이잖아. 잘 먹고 있는 거 맞아? 설마 시집살이시켜?”

    저기요, 그런 건 품에서 놓고 말해요.

    그나마 있던 감동도 단번에 파괴하는 위력에 나는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로에나가 왜 이들에게 먼저 연락하지 말라고 한 건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잠깐 같이 있었을 뿐인데도 유난스러움이 하늘을 찔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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