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공가 시집살이 너무 쉬운데요 (86)화 (86/177)

#86.

[작은 마님, 혹시 대공 전하께서 메이벨이란 아이를 거두실 걸 알고 찾아 달라 하신 겁니까?

소재를 파악하니 대공 전하의 산하에서 보호를 받고 있더군요.

은발에 금색 눈을 가진 소녀라는 걸 보면 동일 인물이 맞는 것 같습니다.

이미 만나셨을지도 모르지만 혹시나 싶어 편지 드리오니 확인 부탁드립니다.]

아실은 메이벨이 대공의 보호를 받고 있다고 했다.

그토록 찾아 헤맨 여주인공이 이스터스 고아원이 아닌 스티그 섬에서 시아버지에게 발견되었다.

그리고 시아버지인 대공의 비호 아래 백작가의 영애로 둔갑될 예정이라니.

‘메이벨이 왜 스티그 섬에 있었을까. 거긴 이스터스 고아원과도 거리가 있는데.’

원작과는 다른 행보였다. 내 삶의 변화가 다른 인물들에게도 영향을 끼친 걸까?

궁금한 게 많으나 정작 본인에게 직접 물어볼 기회가 없었다. 대공이 메이벨을 보여 주지 않는 탓이었다.

물론 이유 없이 숨기는 건 아니었다. 듣자 하니 메이벨의 불안 증세가 심하다고 했다. 해서 대공에게 지나치게 의존한다고.

스티그 섬에서 고립된 일로 기억상실증까지 걸렸다고 하니, 메이벨에게 물어본다 해도 원하는 대답을 듣기는 어려울 듯했다.

‘대체 원작이 어떻게 굴러가는 건지 모르겠네.’

오염의 전이는 소강상태이기는 했다. 아마 오염이 또 시작되면 메이벨을 숨기기 어려울 터였다.

대공이라면 정령사인 내 정체를 밝히느니 성녀인 메이벨을 내세우려 할 게 뻔하니까.

“고모님은 화도 나지 않는 건가.”

그때 제로니스가 짓씹듯 중얼거리는 음성이 귀에 꽂혔다. 데미안의 자유분방한 아랫도리에 관해 불만이 많은 듯했다.

나는 그가 뭔가 아는 듯해 떠볼 요량으로 입을 열었다.

“듣자 하니 대공께서 결혼 전에는 안 그러셨다는데, 정말이에요?”

“결혼 전까지만 해도 고자가 아니냐는 소문이 돌 정도로 여자 문제가 깨끗했네. 어울리는 여자라곤 고모님 한 분뿐이었지.”

“거짓말!”

믿기지 않는 사실에 나도 모르게 버럭 외쳤다가 화들짝 놀라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아키드 역시 놀라기는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믿을 수 없겠지만 사실이야. 내 나이 세 살 때까진 대공과 고모님이 꽤 친했거든. 결혼 후에는 틀어졌지만.”

“뒤늦게 사춘기라도 온 걸까요?”

“글쎄. 모르지. 그 이유를 폐하께선 아시는 것 같은데.”

제로니스가 깊어진 눈으로 바닥의 잔디를 탁탁, 걷어차며 말을 이었다.

“실은 결혼식 전날, 폐하를 알현하고 돌아가던 대공이 우는 걸 봤어.”

예? 우리 아버님이 울어요?

칼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은 사람에게 눈물이라니!

그거야말로 앞선 말보다도 더더욱 믿기 힘든 일이었다. 내가 눈만 끔벅이자 제로니스가 말을 이었다.

“본인은 운 적 없다고 했지만 눈가가 빨갰거든.”

그러곤 눈가를 톡톡, 두드렸다. 제로니스가 이런 거로 농담을 할 리는 없으니 사실일 터.

결혼을 앞둔 신랑이 사돈댁에 들렀다가 눈물을 흘렸다. 그것도 예비 신부의 오라버니를 만난 직후라지 않는가.

‘설마.’

나는 불현듯 스쳐 지나가는 원작의 내용을 떠올렸다.

{엘레나는 정원을 뛰노는 사절단의 자제를 보며 아련한 표정을 지었다.

괜스레 제 배를 힐끗거리는 건 그 속에 아이가 없음이요, 만들고 싶다 한들 목숨을 걸어야 한다는 현실이 공허하게 만든 탓이었다.

목숨이라면 얼마든지 걸 수 있었지만, 그건 혼자 노력한다고 되는 게 아니었다. 남편인 대공이 저를 홀대하니 자연히 포기한 일이었다.

갑자기 돌변해 버린 상대를 향한 의구심도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녀의 눈에 그는 더 이상 이전의 데미안이 아니었다. 그저 다른 여자에게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추태를 부리는 바람둥이일 뿐.

그나마 다행이었다. 어련히 사생아를 데려와 주어 후계 걱정을 덜었으니까. 엘레나는 한 터럭의 미안함마저 떨쳐 내 버린 지 오래였다.}

“…….”

나는 잠시 말을 잃었다. 대공의 행동이 수상하다고 생각하기는 했으나 엘레나의 몸 상태와 연관 지어 본 적은 없었다.

엘레나 스스로 제 몸에 대해 대공에게 말하지 않았다는 걸 원작에서 본 탓이었다.

한데 통 울지 않던 그가 사람들이 보는데도 눈물을 참지 못할 정도로 슬퍼했다고 하니 조금 달리 생각하게 되었다.

어쩌면 황제가 그에게 엘레나의 몸 상태에 대해 미리 언질한 게 아닐까 하고.

심란한 마음을 뒤로한 채 황궁 구경을 다 마쳤을 때였다. 제로니스가 시종의 부름을 받고 사라지자 아키드가 말했다.

“표정이 안 좋습니다.”

“아, 그냥 생각이 좀 많아져서요.”

내가 어색하게 웃자 아키드가 내 손을 가만히 쥐었다.

“혹시 아버지 일 때문입니까?”

“어떻게 알았어요?”

“그 이야기를 듣고 나서 표정이 계속 안 좋아서요.”

산책 내내 나만 쳐다본 모양이었다. 괜히 그를 걱정하게 만든 것 같아 생각을 털어 내려는데 그가 입을 열었다.

“전 변하지 않을 겁니다.”

“네?”

“델루스 꽃을 걸고 했던 약속은 언제나 유효합니다.”

‘아키드 님. 그 꽃, 다른 사람한테는 주지 말아요.’

‘예. 뜻대로 하겠습니다. 그 대신……. 로에나도 그 꽃은 제게만 주십시오. 다른 사람은 싫어요.’

델루스 꽃의 꽃말은 ‘눈부신 사람’, ‘당신밖에 보이지 않아요’였다.

그리고 우리는 그 꽃말을 나누며 서로에게만 델루스 꽃을 허락하자고 약속했었고.

아키드는 내가 데미안이 변했다는 말에 불안해한다고 여긴 모양이었다. 전혀 그런 게 아니었는데.

“저는 언제나 로에나의 곁을 지킬 겁니다. 당신이 내가 싫다고 하는 순간이 온다 해도.”

아키드가 말갛게 웃으며 내 손등에 가만히 입을 맞추었다.

푸른 눈동자 속은 온통 나로 가득 차 있었다. 잿빛 같던 그의 눈동자에 푸름이 돋보이게 된 건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었다.

언제부턴가 그의 시선 속에는 늘 내가 따라붙었다. 내가 그를 보듯 그 역시 나를 보고 있는 상황은 다소 벅찬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원작에서 서로 반목하던 사이가 어느 틈에 이리 가까워졌을까.

늘 울타리 밖에서 불안해하던 그에게 아늑한 울타리를 내어 준 것 같아 덕후로서 흡족하고 행복했다.

“저도 마찬가지예요. 아키가 나를 싫다고 해도 저는 옆에 꼭 붙어 있을 거거든요.”

“그럴 일은 없습니다. 로에나가 싫었던 적은 한 번도 없어요.”

“거짓말. 불과 1년 전의 우리를 돌이켜 보세요.”

“진짭니다. 물론 그때와 지금의 깊이는 조금 다르지만, 그때에도 저는 로에나가 싫지 않았습니다.”

아키드가 고집스럽게 대꾸하며 내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톡, 부딪쳤다. 반박은 받지 않겠다는 몸짓이었다.

그래, 이전에도 아키드는 로에나를 진정으로 미워하거나 싫어하지 못했다. 오히려 미안해했으니 패악질도 눈감아 주었겠지.

‘아이고, 이런 순둥이가 하필 짝사랑을 해서 온갖 맘고생을 하다 흑화하다니.’

아키드 덕후로서 작가에게 항의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물론 내가 그 세계 속에 들어온 시점에서 이제 그런 미래는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나는 절대 아키드를 메이벨에게 보낼 생각이 없으니까.

설령 아키드가 뒤늦게 메이벨에게 반해 이혼을 해 달라고 해도, 오늘의 약속을 기억하라며 딱 잘라 거절할 테다.

난 내 새끼가 짝사랑하다 고통받는 꼴은 추호도 보고 싶지 않았다.

물론 메이벨을 만나는 게 마냥 겁이 안 나는 건 아니었다.

혹시라도 아키드가 그녀를 마음에 들어 하면 어쩌나, 하는 생각을 안 해 본 건 아니니까.

그때 가서 생각이 달라질 수도 있는 일이기에 마냥 단정하지도 못하는 게 현 실정이었다. 해서 여지를 남겨 두기 위해 입을 열었다.

“혹여 나중에 아키드가 다른 사람이 좋아져서 더는 그 약속을 지키고 싶지 않은 때가 온다면 꼭 말해 주세요. 저는 아키가 행복하면 그뿐이니까, 그때에는 제가 이호…….”

“로에나.”

아키드가 내 말허리를 자르며 성난 표정을 지었다. 음성에서부터 언짢음이 가득했다. 그가 내 양 뺨을 손으로 감싼 채 말했다.

“왜 그런 이야길 합니까?”

“네?”

“그럴 일은 없습니다.”

“…….”

“절대로.”

뒤이어 못 들은 거로 하겠다는 아키드의 단호한 말에 나는 절로 멍해졌다. 본의 아니게 그를 화나게 한 것 같았다.

“아키, 화났어요?”

“…….”

“난 그냥 혹시나 만약의 상황을 생각해서, 사람 마음이란 게 언제 변할지 모르는…….”

“변할 건가요?”

잔잔한 음성이 내 귀에 파고들었다. 마치 변하지 말라고 애원하는 듯한 음성처럼 들렸다.

푸른 눈동자가 물먹은 것처럼 촉촉해지는 걸 보고 있자니 절로 죄책감이 들어 버럭 소리쳤다.

“아, 제가 그렇다는 게 아니라! 저는 언제나 아키 편이고, 아키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요!”

“그럼 상관없겠군요. 저나 로에나나 변할 일은 없을 테니까.”

아키드는 언제 울먹였냐는 양 느른히 미소 지었다. 그 눈빛에 언뜻 짙은 소유욕이 느껴지는 듯했다.

눈앞의 상대를 결코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푸른 불꽃이 일렁이듯 그의 감정이 용솟음치고 있었다.

그가 이렇듯 맹목적으로 나를 바라보는 게 싫지 않았다. 실은 그가 싫다고 하길 바라고 했던 말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언젠가 아키드가 내게 이혼 서류를 내밀며 했던 말을 그대로 돌려주었다.

“후회하실 거예요. 이번이 마지막 기회일 테니까.”

‘……후회하실 겁니다. 이번이 마지막 기회일 겁니다.’

그러자 무엇을 기대하고 한 말인지 알아들은 아키드가 다정하게 속삭였다.

“그런 기회 필요 없습니다. 저는 로에나가 이혼해 달라고 노래를 불러도 절대 하지 않을 생각이니까요.”

‘그런 기회 필요 없어요. 저는 아키드 님이 이혼해 달라고 노래 불러도 절대 하지 않을 생각이니까요.’

언젠가 내가 아키드에게 했던 말이었다.

그때는 당장에 이혼당할까 봐 조마조마했었는데 지금 그 말을 그의 입에서 듣게 될 줄이야.

서로를 가만히 바라보다 결국 내 쪽에서 먼저 웃음이 터져 버렸다. 나는 내 볼에 닿은 그의 손을 마주 잡으며 말했다.

“후회하지 않게 잘해 줄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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