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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가 시집살이 너무 쉬운데요 (85)화 (85/177)
  • #85.

    서늘한 음성에 제로니스가 움찔하는가 싶더니 고개를 수그렸다.

    “실언했습니다.”

    “전하, 제 앞에서 대공을 욕하는 건 상관없으나 아들 내외 앞에서는 주의를 해 주셨으면 합니다. 제가 낳은 자식은 아니나 마음으로 거두었으니 차별하지도 마셨으면 하고요.”

    “죄송합니다, 고모님.”

    엘레나의 싸늘한 대꾸에 제로니스가 한 번 더 사죄했다. 싸해진 분위기 속에서 나는 가만히 생각했다.

    ‘결혼 전에는 간도, 쓸개도 다 빼내 줄 것처럼 굴더니!’

    제로니스의 말에는 배신감이 섞여 있었다. 마치 믿었던 자에게 발등이라도 찍힌 것처럼.

    반면 자카리 황제는 태연했다. 대공의 행동을 이해하기라도 하는 것 같은 모습에, 그는 대공이 왜 그러는지 잘 아는 듯했다.

    나 역시 대공의 모순적인 행동에 의구심을 갖고 있었다.

    마냥 사이 나쁘기만 한 부부로만 알았는데 보면 볼수록 데미안이 엘레나를 무척 아끼는 것 같아서였다.

    물론 그녀의 화를 돋워 관계의 진전을 막기는 했지만 그것 역시도 본인 의지가 들어간 것 같았다.

    둘 사이에 내가 모르는 어떤 사건이 있었고, 그 사건으로 뭔가 틀어지게 된 게 아닐까?

    “그것보다 대공이 해괴한 취미를 만들었더군. 함께 온천을 즐기다 우연히 보았는데.”

    황제가 화제를 돌리며 대공과 온천을 즐겼던 이야기를 꺼내었다. 그가 제 오른쪽 어깨의 등 쪽을 톡톡, 가리키며 말했다.

    “오른쪽 어깨에 웬 장미 문신을 그렸더군. 스티그 섬에서 다쳤다더니 흉터를 지우려고 한 모양이야.”

    장미라는 말에 엘레나가 한쪽 입꼬리를 비뚜름히 올리며 혹평했다.

    “……흉물스럽겠군요. 장미라니, 쯧.”

    “아냐. 의외로 잘 어울렸어. 뭐, 이미 봤겠지만, 누이의 것과 비슷하던데. 맞춘 거 아닌가?”

    “……뭐라고요?”

    엘레나는 못 들을 소리를 들은 것처럼 황당하다는 듯 되물었다. 뒤이어 엘레나의 얼굴에 금이 가는 소리가 환청처럼 들려왔다.

    나는 눈을 둥그렇게 뜨며 엘레나를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수도에 와서도 그녀는 긴팔을 입었다. 북부는 추워서라지만 여기는 그리 춥지도 않은데 말이다.

    활쏘기 시합에서도 대수롭지 않게 어깨를 사용하기에 전혀 몰랐다.

    “흉터가 있으셨어요?”

    내 물음에 엘레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본 적 있지 않니?”

    “네?”

    그때 불현듯 로에나의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로에나는 바짝 얼어붙은 채 대공비의 왼쪽 어깨를 응시했다. 로에나가 노크도 없이 들이닥친 터라 미처 흉터를 가릴 새도 없었다.

    그녀의 어깨에는 거대한 흉터와 함께 화려한 장미 문신이 그려져 있었다.

    흉터를 줄기 삼아 덧입혀진 장미는 크고 아름다웠다. 동시에 다 감추지 못한 흉터는 흉측해 절로 눈이 찌푸려졌다.

    무언가에 쭉 베인 상처는 꽤 깊은 흉터를 남긴 듯했다.

    로에나는 얼어붙어 아무 말도 못 했다. 예사 상처가 아니었기에 더더욱 할 말을 잃었다.

    대공비가 시선을 느꼈는지 가운으로 어깨를 감추며 말했다.

    “왜? 이제야 내가 좀 무섭니?”]

    “아.”

    뒤늦게 기억이 흘러들어 오자 엘레나에게 오해 살 만한 질문을 했음을 깨달았다. 내가 살짝 주의를 다른 쪽으로 환기했다.

    “그런데 흉터는 왜 생기신 거예요?”

    “모지리 하나를 구하려다가 그랬지.”

    “네?”

    “습격이 있었거든.”

    황족을 습격하다니 간이 배 밖으로 나온 집단이 아닌가?

    “배후는 찾으셨나요?”

    “뭐, 찾기는 했다만 으레 그 시기엔 노리는 정적이 많으니까.”

    그 시기라 함은 각성기를 말하는 것 같았다. 엘레나가 생각이 많은 얼굴로 중얼거리자 황제가 서늘한 어조로 말했다.

    “그때 그냥 그놈을 죽게 두었다면 좋았을 텐데, 아쉽군.”

    살벌한 발언임에도 엘레나는 웃음으로 맞받아쳤다.

    “그러게 말이에요. 그나저나 폐하, 대공의 문신과 제 것을 같은 선상에 두시니 무척 불쾌합니다. 제 문신이 흉물스럽다는 건가요?”

    “그럴 리가 있나. 난 또 대공이 누이에게 흉을 지게 한 게 미안해서 제 어깨도 뚫어 버렸나 했지.”

    “헉!”

    나는 흉터의 원흉이 대공이라는 황제의 말에 숨을 삼켰다.

    그렇다면 모지리와 그놈은 대공을 뜻하는 말일 터. 뒤이어 엘레나가 쯧, 혀를 차며 말했다.

    “모지리가 자란다고 똑똑이가 되지는 않죠.”

    “실례지만 그 모지리가 듣고 있습니다.”

    하필 그때 하델루스 대공이 들어온 건 우연이었다. 대공은 저를 모지리로 칭한 엘레나를 보며 비뚜름히 웃고는 황제에게 예를 갖추었다.

    “이제 왔나?”

    “어쩐지 귀가 몹시 가려워서 와 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평소 행실을 바르게 했다면 귀 간지러울 일도 없었겠지.”

    “지당하신 말씀이라 모지리는 할 말이 없군요.”

    대공이 스스로를 모지리라 칭하며 자연스럽게 엘레나의 옆에 앉았다. 엘레나의 시선이 잠시 대공의 오른쪽 어깨로 향했다가 금세 물러났다.

    “안 그래도 자네 문신 이야기를 하고 있었지.”

    “대체 언제까지 놀리시렵니까. 자꾸 그러시면 제 미색을 시샘하는 거로 알겠습니다, 폐하.”

    “시샘은 무슨. 얼마나 벌과 나비를 꼬이게 하고 싶으면 장미 문신까지 그려 넣나? 차라리 암룡을 그렸다면 충성심이 돋보였을 텐데.”

    “그건 그것대로 건달 같지 않겠습니까?”

    “굉장히 불경한 언사로군. 이미 건달처럼 살면서 건달 같아 보이면 뭐 어떻다고? 화끈하게 해.”

    “모지리에 이어 건달이라. 충신을 칭하는 호칭이 심하다는 생각은 안 드시는지요?”

    “이런 소리 듣기 싫었으면 내 누이에게 잘하지 그랬나. 밖에서 애만 주렁주렁 데려오지 말고. 자네가 그러고도 사람인가?”

    황제의 힐난에 데미안이 콧방귀를 뀌며 다과로 나온 포도알을 우물거렸다.

    태도를 보아하니 역시나 그 아이의 입양에 관해 일부러 흘린 모양이었다.

    “이젠 사람 취급도 안 하시는군요. 친우에게 못 하는 소리도 없으십니다.”

    데미안이 상처받은 척 가슴을 부여잡았다. 엘레나가 그 모습을 가증스럽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나는 그런 세 사람을 힐끔거리며 방금 전의 대화를 곱씹었다.

    대공의 각성기 때 습격이 있었고, 엘레나는 그를 도우려다 어깨에 큰 상처를 입었다.

    ‘그러고 보니 활쏘기 대회 때…….’

    나는 시합이 끝나고 엘레나가 화살통을 던지고 씩씩거리며 나가던 것과 그녀를 뒤따라가던 데미안을 떠올렸다.

    그날 유독 대공의 실력이 형편없었고, 엘레나의 마지막 한 발도 심히 불안정했었다.

    ‘일부러 엉망으로 쏘았구나. 어머님은 그걸 알고 화가 나셨던 거야.’

    왜 그렇게 냉랭한 분위기를 풍겼나 했더니 데미안이 엘레나의 자존심을 상하게 해서였구나.

    나는 뒤늦게 냉전의 내막을 깨닫고는 낮게 침음했다. 데미안과 엘레나는 서로를 자극하는 방법을 아주 잘 알았다.

    그렇다는 건 대공이 일부러 엘레나를 자극해 시합을 그만두도록 하려 했다는 뜻.

    예전이었다면 지독하게 삐뚤어진 인간이라고 생각했겠지만, 에셀 공작과 대거리를 하던 그를 떠올리면 마냥 엘레나를 약 올리기 위함은 아니었던 것 같았다.

    게다가 이번에 다친 어깨에 엘레나와 같은 장미를 그려 넣다니.

    누가 봐도 좋아하는 사람을 떠올려 한 행동이 아니던가. 싫어하는 사람이었다면 따라 그리고 싶지도 않을 텐데.

    나는 눈을 가느스름히 뜨며 대공을 바라보았다. 좋아하면서 왜 저렇게 삐뚤게 행동해 업보를 쌓는 걸까.

    본능적으로 대공이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우같이 잔꾀 많은 그가 일부러 그녀에게 미움을 사려고 하는 이유가 뭘까.

    그것을 곰곰이 생각하고 있는데 내 접시 위에 단내를 폴폴 풍기는 복숭아가 얹어졌다.

    “이것 먹어 보세요. 무척 달아요.”

    아키드가 씨익 웃으며 먹어 보라 권했다. 내게 닿아 있는 청회색 눈동자가 맑고 투명했다. 표정을 보아하니 아까부터 나를 응시한 것 같았다.

    ‘세상에, 내가 아키드를 앞에 두고 한눈을 팔다니. 그깟 시부모 연애 사정이 뭐라고!’

    나는 아키드가 준 복숭아를 한입에 넣어 오물거렸다. 잘 먹는 모습을 본 그가 복숭아 한 조각을 또 내밀었다.

    “많이 먹어요.”

    마치 내가 먹는 것만 봐도 배가 부르다는 얼굴이었다. 그게 꼭 내가 아키드를 볼 때와 비슷해서 괜스레 수줍어졌다.

    아마도 13지구에 다녀온 이후부터였다. 아키드와 나 사이에 묘한 유대감이 생긴 것은.

    13지구에서 돌아온 후, 나와 아키드는 쉐리 일행을 만난 것을 비밀로 하기로 했다.

    우선 위험한 13지구에 갔던 것부터가 말하면 혼날 거리인 탓이었다.

    아키드는 제이드가 살아 있을 거라 여기는 것 같았다.

    자신을 가장 힘들게 한 친구의 죽음이 없던 것이 되어서일까. 아키드는 처음 수도에 왔을 때보다 한결 편안해진 얼굴이었다.

    “고마워요, 아키.”

    나는 그의 앞 접시에도 복숭아를 옮겨 주었다.

    이런 우리를 제로니스가 묘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게 느껴졌다. 깨가 쏟아지는 부부의 모습에 속이 부대끼는 걸까?

    그때 대공과의 실랑이를 마친 황제가 제로니스에게 말했다.

    “제로니스, 네가 대공자 부부에게 황실 구경을 좀 시켜 주거라. 우리끼리 긴히 할 얘기가 있으니.”

    “예, 폐하.”

    제로니스가 명을 받고 일어나자 나와 아키드도 덩달아 일어났다.

    접견실을 나와 정원을 반 바퀴 정도 돌았을 무렵이었다. 제로니스가 넌지시 물었다.

    “대공이 데려왔다는 아일 본 적 있나?”

    내내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굴더니 저게 궁금했던 모양이다. 나는 고개를 도리질했다.

    “아뇨. 저희한테도 꼭꼭 숨기셔서 아직 이름도 몰라요.”

    사실 아예 짐작하지 못한 건 아니었다. 그만한 신성력을 가진 내 또래의 여자애라면 떠오르는 사람이 하나 있었으니까.

    게다가 얼마 전 온 아실의 편지가 내게 확신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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