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
“아니.”
후작이 고개를 내저으며 피식 웃었다. 여유가 가득한 음성에 제이드가 고개를 갸웃하니 그녀가 말을 이었다.
“우선 저쪽이 해 달라는 대로 내버려 두자꾸나. 방해하지 말라는 데 방해하면 안 되겠지.”
“하지만 북부로 돌아가게 되면 추적이 어렵습니다.”
“괜찮아. 우리가 필요하다면 저쪽에서 먼저 연락 올 거다. 그때 그 검은 새처럼.”
후작이 양손으로 새 모양을 나타내 푸드득, 날아가는 시늉을 했다.
그것만으로도 검은 새의 정체를 알아챈 제이드가 가볍게 부복했다. 역시 그 새는 제물이 보낸 모양이었다.
“예. 알겠습니다.”
“그것보다 다음 주면 정기 회의도 끝이 나는구나. 이번 송별 연회는 꽤 재밌을 것 같아.”
“연회에 참석하실 생각이십니까?”
“글쎄.”
후작이 느른히 웃으며 뜸을 들였다. 사실 송별 연회의 참석 여부는 자유였다.
먼 길을 온 귀족들을 위해 베푸는 연회인 만큼 강제성이 없는 탓이었다.
후작은 수도에 거처하는 귀족인지라 그동안 연회 자리는 숱하게 다녀왔기에 딱히 눈도장을 찍을 귀족도 없었다.
그런데도 연회에 참석할지 망설이는 건 회의에서 본 하델루스 대공과 에이프릴 후작의 만담 때문이었다.
후작이 두 사람의 대회를 엿들었던 것을 회상했다.
‘어쩜 소식 한 번 전하지 않습니까? 혹여 딸아이를 구박하는 건 아니겠지요?’
‘그럴 리가 있습니까, 후작. 새아가는 우리 집의 귀염둥이로 잘 지내고 있으니 염려 붙들어 매시오.’
‘하긴 우리 막둥이가 어딜 가든 사랑받을 재목이긴 합니다. 어릴 때부터 얼마나 귀여웠는데요. 초상화를 보시겠습니까?’
주섬주섬 안주머니에서 로켓 목걸이를 꺼낸 에이프릴 후작이 헤벌쭉 웃으며 초상화를 보여 주었다. 대공이 로켓을 빤히 보며 중얼거렸다.
‘엘라가 보면 아주 좋아하겠군요. 한 장 더 없습니까?’
‘눈독 들이지 마시지요.’
‘누가 그냥 달라 했습니까? 제게 지난번에 파엘 강에 놀러 가서 그린 로에나의 그림이 있지요. 맞교환하는 게 어떻습니까, 사돈.’
‘진작 그리 말씀하시지 그러셨습니까? 바로 보내겠습니다.’
‘좋습니다. 이제 보니 로에나가 제 아들의 초상화를 좋아하는 게 후작을 닮은 거로군요.’
여자애 그림 하나를 암거래하듯 은밀하게 교환하는 둘을 보았을 때 후작은 기발한 생각이 들었다.
대공을 압박하기에 좋은 패가 되지 않을까, 하고.
“마침 만나 보고 싶은 아이가 있어서 가 볼까 한단다. 겸사겸사 제물도 만나면 좋고.”
어린애를 구워삶는 일이라면 식은 죽 먹기였다. 여차하면 힘을 사용해 약점을 잡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후작이 생각을 마치고 느른히 웃으며 말했다.
“우리도 마냥 대기하는 것보다 대책을 세워 두는 편이 제물에게도 좋지 않겠니?”
* * *
다음 날, 나와 아키드는 엘레나와 함께 황궁, 아칼리무트로 향했다.
아칼리무트는 암룡 자파르시아의 놀이터와 같은 곳으로, 그의 흔적이 프로디움 다음으로 많은 곳이었다.
곳곳에 함정이 파져 있어 허락받지 않은 이가 출입하기 어려운 요새이기도 했다.
자파르시아가 대륙을 떠나기 전, 하인트에게 지도를 선물한 덕에 황궁으로 삼을 수 있었다고 한다.
“폐하, 대공비 전하와 대공자 부부께서 오셨습니다.”
시종장의 안내에 안쪽에서 들어오라는 허락이 떨어졌다. 거대한 문이 양쪽에서 열리자 쭉 뻗은 복도와 그 가운데 황좌에 앉은 남자가 보였다.
엘레나와 같은 백금발에 붉은 눈을 지닌 그는 황제, 자카리 칸 하인트였다.
“오랜만이군, 누이.”
“대지의 수호자이자 제국의 태양인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자카리의 환대에 엘레나가 우아하게 예를 갖추자 나와 아키드도 덩달아 고개를 수그렸다.
대지 속성의 최강자라 그런가, 눈을 마주하고 있자니 흙에 파묻힌 것 같은 위압감이 있었다.
괜스레 몸이 부대껴 움찔거리자 엘레나가 말했다.
“폐하, 제 아이들이 불편해하니 기운을 숨겨 주시지요.”
그러자 순식간에 위압감이 사라졌다. 그제야 자카리가 일부러 우리를 겁주었다는 걸 알아챘다.
각성자는 자신의 기운을 숨길 줄 아는데, 간혹 일부러 개방하여 상대를 겁주기도 한다고 들었다.
설마 황제가 이런 식으로 신고식을 할 줄은 몰라 퍽 당황스러웠다.
그때 자카리의 시선이 아키드에게로 향했다. 표정이 서늘한 게 그리 호의적이지는 않았다.
아마도 아키드의 출신이 사생아이고, 엘레나가 황제의 동복누이라 그를 마뜩잖게 여기는 듯했다.
“저 아이가 그 아이로군.”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폐하. 신은 아키드 하델루스라고 합니다.”
“그래. 네가 미각성 발작 증세를 보인다는 건 누이에게 전해 들었다. 과분한 힘을 가졌구나.”
“…….”
“대공은 참 운이 나쁜 듯 좋은 구석을 타고났지. 하델루스 가문의 특성이기도 하고.”
“과찬이십니다.”
“칭찬 아니었는데.”
자카리의 비뚜름한 대답에 아키드가 침묵했다.
아키드를 몰아세우는 듯한 분위기에 괜스레 기분이 상해지던 찰나, 이번에는 그의 시선이 내게로 향했다.
“에이프릴 후작의 막내딸이었던가.”
“로에나 하델루스라고 합니다. 존안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영광이라기엔 표정과 말이 따로 노는구나. 내가 남편을 괴롭혀서 그러느냐?”
떠보는 듯한 말투에 나는 고개를 수그리며 대답했다. 어쨌든 황제에게 대놓고 들이받을 수는 없으니 돌려서 깔 계획이었다.
“괴롭히다뇨, 당치않은 일입니다. 제 남편이 과분한 힘을 타고난 것도, 운이 좋은 것도 사실이니까요.”
“흐음.”
“다만 제 남편은 그러한 것이 보이지 않을 만큼 좋은 점이 많습니다. 지혜로우신 폐하시라면 하루만 함께해도 바로 알아보시리라 믿어요.”
“내 안목이 구리다는 뜻을 참 듣기 좋게도 하는구나.”
“그렇게 들리셨다면 송구합니다.”
“하하하. 맹랑하군.”
자카리는 호탕하게 웃으며 엘레나를 쳐다보았다. 좀 전의 시험하는 듯한 얼굴색과는 확연히 달랐다.
“누이의 말발을 배웠나 보오. 에둘러 반박하는 게 아주 수준급이야.”
“제게 미치려면 아직 멀었지요. 그러게 왜 쓸데없이 애들을 시험하고 그러십니까?”
엘레나의 퉁명스러운 반응에 자카리가 또다시 소리 내어 웃었다. 무엄할 수도 있는 발언임에도 언짢아하는 기색은 없었다.
자카리가 아키드에게 말했다.
“대공자가 대공을 너무도 닮아 조금 놀리고 싶었던 거니 이해하거라.”
“아닙니다, 폐하.”
“볼수록 닮았어. 반응은 영 딴판이지만.”
그 말과 함께 자카리가 시종장에게 무언가를 가져오라 손짓했다. 그러자 시종장이 아키드 앞으로 웬 문서 하나를 내밀었다.
“미각성 발작과 관련한 기록이다. 본인이 직접 오라 번거로운 요청을 한 건 이것이 일급비밀 문서이기 때문이지.”
“겸사겸사 애들 얼굴도 볼 속셈이셨겠죠.”
“누이의 눈은 못 속이겠군.”
반박하지 않는 걸 보니 엘레나의 말이 맞는 모양이었다. 속내를 알 수 없는 듯하면서도 보여 주려는 부분은 여과 없이 내비치는 솔직함이 돋보였다.
“인사치레는 이쯤 하고 차라도 한잔하도록 하지. 대공자비 말대로 대공자에게 어떤 좋은 점이 있나 궁금하기도 하고.”
자카리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그를 따라 이동한 곳은 바로 옆에 마련된 접견실이었다. 테이블 위에는 이미 다과가 준비되어 있었다.
마침 제로니스까지 합류하여 테이블이 만석이었다.
한참 이야기가 오갈 무렵이었다. 자카리가 은근하게 입을 열었다.
“대공이 웬 아이를 보호하고 있다고 하던데, 누이는 알고 계셨습니까?”
그 말에 제로니스의 눈이 커다래졌다.
아마도 스티그 섬에서 발견했다던 그 아이를 두고 하는 말 같았다.
넌지시 꺼내는 말투에는 혹여 대공의 사생아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깃들어 있었다.
이미 전적이 있으니 두 번이라고 못 할 성싶냐는 얼굴이었다. 엘레나가 침착하게 대꾸했다.
“예. 알고 있었어요. 후원하는 고아원에서 영특한 아이를 발견해 해링턴 백작에게 양녀로 주겠다는군요.”
“양녀를 두기엔 백작의 나이가 노쇠할 텐데.”
“백작이 원한다고 했습니다.”
그 순간 나는 북부에서 해링턴 백작이 지나가며 했던 말이 떠올랐다.
‘은퇴한 노인네한테 애 돌보기를 시키다니요.’
‘헐! 진짜로 애 돌보기를 시킨 거야?’
나는 그 말뜻을 이제야 깨달아 어안이 벙벙해졌다.
설마 말 그대로 애를 덜컥 안겨 주었을 줄이야.
데미안의 정신 나간 대처에 황당할 지경이었다. 애초에 황실에까지 숨기려고 작정한 것부터가 제정신은 아니긴 했다.
그때 제로니스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또 밖에서 낳은 자식은 아니고요?”
날카로운 말투가 터지다 아키드를 보곤 입을 꾹 다물었다. 아키드 앞에서 언성을 높인 게 자칫 책망하는 거로 들렸을까 봐서인 듯했다.
엘레나는 우아하게 찻잔을 기울이며 무미건조한 음성을 내뱉었다.
“글쎄요. 설령 대공의 아이라 한들 저는 상관없답니다.”
부정하지 않는 걸 보니 그렇게 오해하도록 내버려 둘 심산인 것 같았다.
아무래도 사생아인 척 주의를 끌어 아이의 정체를 의심하지 못하도록 하려는 모양이었다.
대공이 아이의 정체를 당분간 황실에는 말하지 말자고 했으니까.
남들 보기에 대공이 사생아를 둘이나 입적할 수 없어 측근에게 떠넘긴 것처럼 보일 수 있음을 알고 한 행동이었다.
“제가 괜찮지 않습니다, 고모님. 결혼 전에는 간도, 쓸개도 다 빼내 줄 것처럼 굴더니! 대공은 대체 어떻게 된 사람이 가정도 있으면서 매번……!”
제로니스가 참지 못해 막 대공을 힐난하려는 때였다. 자카리 황제가 낮게 그를 불렀다.
“제로니스, 그만하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