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공가 시집살이 너무 쉬운데요 (83)화 (83/177)
  • #83.

    기사들의 통곡이 도처에 울렸다. 그들이 단체로 엎드려 읍소하는 모습에 주변의 이목이 더욱더 집중되었다.

    사람들의 수런거리는 소리에 나는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아무래도 이 집안은 나를 망신살로 죽게 만들려는 게 분명해.

    “왜, 왜들 이래요!”

    내가 날카롭게 외치는 말에 기사들이 울상을 지으며 “부디 자비를……”과 같은 이상한 말을 했다.

    대체 내가 뭘 했다고 이렇게 호들갑을 떠느냔 말이다.

    누가 설명 좀 해 주었음 하던 찰나, 일라이저가 두 손을 싹싹 비비며 말했다.

    “막둥아, 미안해! 제발 삐치지 마!”

    삐치는 게 문제가 아니라, 댁들 때문에 이 자리에서 수치사할 것 같다고!

    내가 노려보며 아무 말도 안 하자 카일이 한 걸음 다가오며 다독였다.

    “그래. 일라이저 이 녀석이 실언을 했어. 네 남편에게 이 자식이라니. 내가 나무에 매달아 둘 테니까 화 풀어.”

    아니, 그 정도 일로 사람을 매달 필요까진 없잖아.

    카일의 싱그러운 미소 뒤에 언뜻 스산함이 깃드는 것 같았다. 마치 미끼를 던져 상대가 물기만을 기다리는 것처럼.

    나는 우선 저들의 이 막무가내식 기행을 저지하기 위해 입을 뗐다.

    “아셨으면 됐어요.”

    “로에나, 많이 화났어? 왜 자꾸 존댓말 해?”

    카일이 울상을 지으며 말했다. 좀처럼 물러날 기미가 없어 보였다.

    이에 나는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그러고 보니 기사들도 존댓말을 거둬 달라고 빌었었다.

    아마도 로에나는 화가 나면 존댓말을 사용했던 모양이다. 해서 내가 자꾸 존댓말을 하니 저 쌍둥이들이 안절부절못하는 것이고.

    이제야 내막이 이해가 되어 픽 웃는데, 아키드가 내 손을 붙들며 말했다.

    “기사들을 물리시죠. 로에나가 겁에 질렸지 않습니까.”

    내가 겁에 질렸다는 말에 일라이저가 “철수! 철수해!” 하고 수선을 떨었다.

    순식간에 엎드려 있던 기사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재밌는 구경거리가 있는 줄 알고 기대했던 사람들이 픽 웃으며 도로 제 할 일을 했다.

    어쨌거나 따가운 시선들이 사라지자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딱히 겁에 질려서 부르르 떤 게 아닌데 아키드가 오해한 것 같았다.

    “여긴 어쩐 일이야?”

    내 물음에 카일이 화색을 돋우며 말했다.

    “에셀 영애에게 네가 없어졌다는 말을 듣고 찾아다녔어.”

    “응? 키나랑 엇갈린 건가? 볼일이 생겨서 먼저 가 본다고 했는데.”

    “키나?”

    “내 전령새. 붉은 털을 가진 맹금류인데…….”

    “엇, 그러고 보니 에드워드 그 자식이 이상한 새 새끼……가 아니라 앙증맞게 생긴 새를 안고 있던 것 같기도.”

    일라이저가 키나를 ‘새끼’라고 칭하다가 내 눈치를 슬쩍 보며 말을 돌렸다.

    입만 열면 걸걸한 욕설이 튀어나오는 걸 보니 일라이저 에이프릴이 확실했다. 카일은 가만히 안경을 추키며 말했다.

    “흐음, 그랬던 거군. 우리가 오해를 했나 보다.”

    그러곤 화사하게 웃으며 다정히 물었다.

    “그나저나 로에나, 오라버니를 만났는데 뭐 잊은 거 없어?”

    “잊은 거?”

    “왜 있잖아.”

    뭐가 있는데.

    죄송하지만 저와 당신은 초면입니다. 우리 사이에 오갈 만한 뭔가가 있던가요?

    나는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르는 기분이었다. 생각해 보니 에이프릴 쌍둥이와는 첫 대면이었다.

    저들은 내가 진짜 로에나인 줄 알 테니 자연스럽게 행동하겠지만 나는 모르는 게 너무 많았다.

    이럴 때 로에나의 기억이라도 짜자잔, 하고 흘러나와 주면 좋으련만. 이놈의 몸뚱어리는 꼭 필요할 때만 묵묵부답이다.

    내가 눈을 도르륵 굴리며 망설이자 카일이 피식 웃으며 천천히 다가왔다.

    “못 본 새 수줍음이 많아졌구나.”

    코앞까지 다가온 카일이 제 뺨을 톡톡, 두드렸다.

    “만나면 반갑다고 뽀뽀해 줘야지.”

    그게 무슨 뽀뽀뽀 같은 소리야.

    나는 흠칫, 떨며 아키드의 등 뒤로 숨어 버렸다.

    뽀뽀는 개뿔. 어색해 죽겠구만 무슨 뽀뽀야.

    내가 대놓고 피하며 숨어 버리자 카일 뒤에서 일라이저가 박장대소했다. 그가 우스워 죽겠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야, 카일. 수작 부리지 말고 이리 와. 우리 막둥이 뽀뽀를 받으려 하다니 너야말로 나무에 매달려야겠다.”

    일라이저의 만류에도 카일은 아랑곳하지 않고 처연히 중얼거렸다.

    “오랜만에 봤는데 오라버니한테 뽀뽀 안 해 줄 거야?”

    응. 안 해. 어디서 개수작이야.

    내가 단호하게 도리질하자 카일이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보아하니 평소에도 뽀뽀를 잘 해 주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하마터면 진짜인 줄 알고 뺨에 뽀뽀를 할 뻔했다. 그때 아키드가 말했다.

    “부인의 굿나잇 뽀뽀는 원래 하던 습관이었군요.”

    “아니, 저는…….”

    “매일 하던 거면 말씀하시지.”

    아키드가 느른히 웃으며 나직이 속삭이자 얼굴에 열이 오르는 기분이었다.

    저 말은 매일 해 주겠다는 뜻이렷다.

    쌍둥이가 쏘아 올린 신호탄에 얻어걸린 행운이라니. 나는 부정하지 않고 수줍게 눈을 내리깔았다.

    실은 음흉한 속내를 숨기기 위한 가장된 수줍음이었다. 성실하게 아랫입술을 꼬물거릴 때였다.

    “뭐?”

    카일이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들었다는 양 입을 쩍, 벌렸다.

    어느새 그의 미소가 파삭, 하며 부서졌다. 그가 아키드를 붙들며 말했다.

    “너 설마, 우리 막둥이의 굿나잇 뽀뽀를 대가 없이 받은 건가?”

    “부부 사이에 그 정도는 당연하지 않나.”

    아키드가 덩달아 반말을 하며 딱딱하게 대꾸했다. 저쪽에서 자꾸 반말을 해 대니 저도 똑같이 하는 것 같았다.

    오구오구, 내 새끼. 씩씩하기도 하지.

    나는 아키드가 이제는 제 위치에 걸맞게 당당히 행동하는 게 자랑스러워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카일이 휘청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언뜻 “말도 안 돼” 하고 중얼거리는 걸 보니 꽤 충격이 큰 모양이었다.

    ‘카일 도련님이 아가씨를 얼마나 예뻐했는데요. 어릴 적에는 늘 업고 다녔다니까요?’

    ‘평생 카일 도련님이랑 살겠다며 그러셔 놓고 훌쩍 시집을 와 버리셨으니.’

    ‘에이, 작은 마님은 일라이저 도련님이나 후작님께도 그 소리 하셨을걸? 뭐가 필요할 때마다 쓰던 치트키잖아.’

    순간적으로 시녀들이 했던 말이 스쳐 지나갔다.

    이미 양가의 합의 아래 정식으로 결혼한 여동생이건만 마치 도적에게 강탈당한 것 같은 표정이 가관이었다.

    이대로 있다간 아키드에게 심술을 부릴 것 같아 입을 열었다.

    “어쨌든 걱정해 줘서 고마워, 오라버니.”

    “천만에.”

    “이제 가 봐. 어차피 주말에 보기로 했잖아.”

    “오랜만에 만났는데 벌써 가라고?”

    카일이 되묻자 뒤이어 일라이저가 바짝 다가와 말했다.

    “그래! 서운해, 막둥아! 우리 1년도 넘게 못 만났잖아!”

    돌아갈 생각이 전혀 없는 그들의 모습에 나는 한숨을 폭 내쉬었다. 이게 통할지는 모르겠다만 일단 해 보는 수밖에.

    “자꾸 이러면, 주말에 안 찾아간다?”

    “로에나, 반가웠어.”

    카일이 냉큼 내 손등에 뽀뽀를 하고 일라이저의 뒷덜미를 잡았다.

    “주말에 보자!”

    일라이저는 저항하지 않고 내게 손을 흔들었다. 나는 멀어지는 두 사람을 보고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이게 되네?

    이로써 에이프릴 가문의 실세는 로에나 에이프릴임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 * *

    화려한 태피스트리가 휘장처럼 벽과 바닥을 장식했다. 그 안에선 귀부인 하나가 홀로 티타임을 즐기고 있었다.

    찻잔을 기울이는 오른손 검지에는 태피스트리만큼이나 잘 세공된 호갑투가 끼워져 있었다.

    호갑투는 검지 전체를 감는 형태였는데 마치 제 손가락인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후작님.”

    그때 누군가 문밖에서 방문을 알렸다. 귀부인은 기다렸다는 듯이 입장을 허락하며 말했다.

    “제이드, 늦었구나.”

    손을 뻗자 제이드가 그녀의 호갑투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

    “중간에 문제가 생겨서 돌아서 오느라 늦었습니다.”

    “문제라니? 설마 하델루스 대공가 사람과 마주치기라도 한 건 아니겠지?”

    후작의 날카로운 물음에 제이드가 가만히 소년을 떠올렸다.

    ‘제이드?’

    분명 아키드였다. 대공가 사생아의 이름을 들었을 때는 설마 했었는데, 정말로 그였구나.

    제이드는 제법 귀족 태가 나던 아키드를 떠올렸다. 갑작스럽게 마주쳐 당황하기는 했으나 마음을 다잡았다.

    어차피 서로 다른 길을 걷게 될 사이였다.

    13지구의 아이들을 두고 후작을 따라나섰을 때부터 다 버리고 온 이들이었다.

    물론 아키드가 하델루스의 후계자인 건 예상하지 못했으나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제이드가 옛 생각을 털어내며 입을 열었다.

    “거리의 아이들이 자꾸 들러붙어서요.”

    “옛 생각이라도 나서 그랬니?”

    귀부인이 검지 끝으로 제이드의 흉터 난 뺨을 톡, 두드렸다. 날카롭고 차가운 금속이 닿는 감각에 제이드가 질끈 눈을 감고 말했다.

    “송구합니다. 다음에는 이런 일 없을 겁니다.”

    “그래. 그래야지, 당연히.”

    후작이 느른히 웃으며 제이드에게 손가락을 까닥여 보고하라 지시했다. 제이드가 한쪽 무릎을 꿇은 채 보고를 시작했다.

    “제물은 여전히 수도에 머물고 있기는 하나 조만간 북부로 갈 예정이라 합니다.”

    “북부에 두는 게 지키기 편해서일 테지.”

    후작은 마치 예상이라도 한 듯 평이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이전까지만 해도 제물을 데려오지 못해 안달이던 것과는 지나치게 반응이 달랐다.

    그래, 검은 새 한 마리가 찾아왔던 후로는 줄곧 그랬다.

    검은 새는 후작의 손끝에 닿자마자 교감을 마치고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새에게서는 후작과 비슷한 힘이 느껴졌다. 아니, 어쩌면 그것보다 더욱 강한.

    제이드는 후작보다 강한 사람은 본 적이 없었다. 그러니 그자 또한 상당한 능력자일 터. 제이드가 충성심 가득한 눈으로 물었다.

    “북부에 가기 전에 빼돌릴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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