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
아키드는 북부의 대공 성에서 외로울 때면 어릴 적 친구들을 떠올리곤 했다.
그 시절엔 춥고 배고프긴 했어도 의지할 사람이 있어 마음까지 춥진 않았던 탓이었다.
하지만 로에나에게 마음을 연 후, 아키드는 더는 옛 생각에 잠기지 않았다.
더 이상 마음이 춥지 않으니 자연히 잊고 지낸 것이었다.
그러다 수도로 돌아오니 도로 옛 생각이 들었다.
저 혼자 배불리 먹고 편히 지내는 동안 친구들은 어떻게 지냈을까, 하는 자책감도 들었다.
그러던 중 제이드와 닮은 사람과 마주쳤을 때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런 제 심경이 표정에도 드러났는지 쉐리를 만나기 전 로에나가 제게 귀엣말을 했다.
‘에이프릴 별장에서 아버지를 만나면 아키의 친구들의 거처와 일자리를 마련해 달라고 요청해 볼게요.’
곧 에이프릴 별장에 방문하는 것을 염두에 둔 제안이었다.
딱히 그녀가 그들을 챙길 이유가 없는데도 이리도 세심히 배려하다니.
저는 아버지의 꾸중이 두려워 친구들에 관해서는 일절 말하지 않았던 것과 비교하면 당차고 용기 있는 모습이었다.
로에나 덕분에 용기를 얻은 아키드는 쉐리를 만나 자초지종을 설명하려 했다. 그랬는데.
“저렇게 멀쩡히 살아 있으면서 우리한텐 오지도 않고! 배신자!”
쉐리의 비난에 아키드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늘 꾸었던 악몽에서와 같은 모습으로 저를 비난하는 탓이었다.
연락할 방도 따윈 없었다. 대공의 사생아인 게 밝혀지자마자 작별 인사할 틈도 없이 북부로 떠났으니까.
당시엔 어디에 팔려 가는 게 아닌가, 무서울 정도로 급박하게 돌아간 형국이었다.
‘역시 내 잘못이야.’
아키드가 수렁에 빠지듯 어둠에 깊게 침잠하려던 때였다. 돌연 손끝에 따스함이 감돌았다. 로에나의 손이었다.
마주친 눈빛에선 손의 온기보다도 따스한 무언가가 담겨 있었다. 마치 자책하지 말라고, 네 잘못이 아니라고 말해 주는 것 같았다.
아키드는 속에서 울컥 덩어리진 감정이 치미는 느낌에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사이 로에나는 쉐리를 무지막지하게 몰아세우고 있었다.
옛날에 저에게 그랬듯 숨 돌릴 틈도 없이 쉐리를 쏘아 대는 로에나는 흡사 기사 같았다. 저를 지키기 위해 칼을 겨누기를 주저하지 않는.
이상한 일이었다. 누군가 조건 없이 제 편을 들어준다는 사실을 눈으로 확인하자 거짓말인 듯 슬픔이 줄었다.
뒤이어 로에나에게 함부로 하는 쉐리를 조금 객관적으로 보게 되었다.
친구로 생각하며 호의를 베풀었으나 돌아오는 건 적의뿐이었다.
그게 일반적인 관계가 아니라는 걸 아키드는 이제야 가려낼 수 있었다.
그리고 쉐리 역시 제이드의 행방을 모르는 듯했다.
‘분명 제이드였어.’
다시 생각해도 그 흉터는 제이드가 분명했다. 저와 함께 곰과 싸우다 난 상처가 아니었던가.
“이제 됐어요.”
아키드가 씩씩거리며 화를 내는 로에나를 다독였다. 이제 아무래도 상관없다. 제이드가 살아 있다면 언젠가 마주치겠지.
그것보다 더는 로에나가 쉐리와 말을 섞게 하고 싶지 않았다. 쉐리의 입에서 나오는 가시 같은 말은 하나도 듣게 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렇게 쉐리 일행을 등지고 13지구를 막 빠져나와 중립 지구인 7지구에 도착했을 때였다.
“아키, 괜찮아요?”
로에나가 걸음을 멈추며 손을 끌었다. 내내 앞만 보고 걷던 아키드가 그제야 로에나에게 시선을 두었다.
그전까지만 해도 형편없이 구겨진 얼굴을 펼 수 없어 내내 앞만 보았는데 그게 오히려 걱정을 산 모양이었다. 아키드가 표정을 갈무리한 채 다정히 말했다.
“안 괜찮을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거짓말. 지금 엄청 마음 아프잖아요.”
로에나는 제가 욕을 들은 양 울상을 지었다. 쉐리의 말이 아프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로에나가 있어서 생각만큼 뼈아프지도 않았다.
그저 현실을 깨달았을 뿐이다. 그러니 자신은 괜찮은데, 되레 로에나가 울망울망한 눈을 했다.
“울지 마십시오.”
“미안해요. 아키의 친구들을 함부로 대해서.”
“친구였을까요?”
아키드의 자조적인 질문에 로에나가 눈을 깜박였다. 이에 옥구슬이 똑똑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아까 쉐리를 매섭게 몰아붙이던 사람치고는 유순한 반응이었다.
그리고 그게 저에게만 그런다는 걸 알기에 왠지 모를 만족감이 북이 되어 가슴 한편에 둥둥, 울렸다.
“좋은 친구는 아니래도 친구였겠죠. 그 시절 아키드가 삶의 끈을 놓지 않도록 도와준.”
“그랬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제이드를 대신해 쉐리를 지켜 주려 더 열심히 살았던 것도 사실이니까.
아키드가 소매로 눈가를 훔쳐 주자 로에나가 처량히 올려다보며 말했다.
“역시 아버지께 잘 말해서…….”
이 와중에도 제 친구를 챙겨 줄 생각을 하다니.
눈가가 빨개진 채로 내뱉는 로에나의 말은 아키드가 참기 힘든 무언가를 자극하는 것 같았다.
그게 못내 사랑스러워서 아키드는 로에나를 품에 끌어안았다.
충동적으로 안았음에도 로에나는 거부하지 않았다. 오히려 놀랐는지 돌연 딸꾹질을 해 댔다.
“딸꾹.”
“놀라게 했으면 미안합니다.”
아키드의 사과에 로에나가 품에서 고개를 도리질했다. 괜찮다는 뜻인 것 같아 품에 안은 채 속삭였다.
“조금만 이러고 있어도 됩니까?”
위로를 핑계로 품에 더욱 오래 있게 하고 싶어서 건넨 말이었다. 그러자 로에나가 수줍게 대꾸했다.
“오래도록 있어도 돼요.”
야무진 대답에 피식 웃음이 흘러나왔다. 잠시 후, 로에나는 언제 딸꾹질을 했냐는 양 고요히 안겼다.
그녀가 막 아키드의 등을 마주 안으려는 찰나였다.
“동작 그만. 당장 우리 로에나에게서 떨어지시지.”
어디선가 형형한 음성과 함께 두 사람의 주변을 무장한 기사들이 둘러싸기 시작했다.
* * *
한창 아키드와 분위기가 좋았던 그때, 난데없이 불청객이 끼어들었다.
깜짝 놀라 쳐다보니 적발에 푸른 눈을 한 두 소년이 부리부리한 눈으로 아키드를 노려보고 있었다.
행색을 보아하니 에이프릴 쌍둥이인 것 같았다. 찰랑거리는 생머리를 한 안경 쓴 소년이 나를 보며 싱긋 웃었다.
“오랜만이야, 로에나.”
아까 서슬 퍼런 음성으로 아키드에게 떨어지라 명령한 소년이었다. 외관을 보니 카일 에이프릴인 것 같았다.
“막둥아아아아아!”
뒤이어 그의 옆에 있던 곱슬머리 소년이 괴성을 지르며 내게 달려들려다 카일에게 목덜미를 잡혔다.
“이거 놔악!”
“막둥이가 다가오라고 안 했잖아.”
“그렇지만……!”
바둥거리면서 내게 팔을 뻗는 그의 모습은 애절하기 그지없었다. 보아하니 일라이저 에이프릴 같았다.
‘쟤들이 왜 여기에? 게다가 기사들은 왜 이렇게 많이 달고 다니는 거야?’
얼핏 봐도 족히 열 명은 넘었다. 호위 기사치고는 너무 많은 인원이라 얼떨떨했다.
수도에서 저렇게 많은 사병을 데리고 다녀도 되는 걸까? 물론 허가받은 기사일 테지만 너무 눈에 띄었다.
벌써부터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쑥덕대는 게 보였다. 부끄러움에 아키드의 품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러자 일라이저와 카일이 얕은 탄성을 내뱉었지만 가볍게 무시했다. 내가 슬쩍 고개를 돌려 그들을 힐끔거렸다.
“봤어? 우리 막둥이가 저놈한테 안겼어! 내가 안아 달라 해도 귓등으로도 안 듣던 그 새침데기가!”
“응. 봤어. 그러니까 굳이 입으로 사실 적시하지 마. 짜증 나니까.”
카일이 허리춤의 검을 만지작거리며 서늘하게 중얼거렸다. 그게 살인 경고 같아서 나는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이 미친놈들아! 내가 내 남편 안는 것도 불만이냐?’
쉐리를 해치우고 돌아왔더니 에이프릴 쌍둥이와 마주칠 줄이야.
쉐리야 입만 산 겁쟁이라 상대하기 쉬웠지만 저들은 달랐다.
메이벨을 괴롭히는 사람은 즉각 척결할 정도로 대책 없는 빠돌이들이니까.
예전에 왔던 편지나 알랑에서의 일을 돌이켜 보면 더더욱 확신이 들었다. 그들에게서 나와 같은 덕후의 기운이 물씬 풍긴다는 것.
그것도 사생팬 못지않은 끈덕진 근성과 집요함이 가득한 진성 덕후!
‘이대로 있으면 아키드가 위험해.’
내가 아키드를 보호하기 위해 나서려던 때였다. 아키드가 나를 품에서 놓아주며 카일과 일라이저에게 인사했다.
“오랜만입니다. 잘 지내셨습니까?”
“아니. 너 때문에 잘 못 지냈는데?”
카일이 비뚜름히 대꾸하자 일라이저가 말을 받았다.
“너 이 자식, 벌건 대낮에 길거리에서 포옹이 웬 말이야!”
발까지 구르는 모양새가 부러움을 넘어 화가 난 것 같았다.
두 사람의 삐딱한 태도에도 아키드는 웃음을 잃지 않았다. 오히려 웃음을 잃은 건 나였다.
“이 자식, 저 자식이라고 하지 마세요.”
“!!”
그 순간 카일이 못 들을 소리라도 들은 것처럼 말문이 턱 막힌 표정을 지었다. 마치 과거의 공포를 되새기는 듯한 모습이었다.
“마, 마, 막둥아.”
뒤이어 일라이저가 울상을 지은 채 말을 더듬었다. 차마 내게 다가오지는 못하고 우물쭈물하는 모습이 아키드에게 하던 것과는 딴판이었다.
‘뭐지? 갑자기 왜 이래?’
내가 뭔가 말실수라도 했나 싶어 고개를 갸웃거리던 찰나였다.
돌연 곁에 있던 에이프릴가의 기사들이 넙죽 엎드리며 소리 질렀다.
“로에나 님! 부디 존댓말을 거둬 주십시오오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