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
13지구로 들어서자 공기부터가 달라진 기분이었다. 주변을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행색이 좋지 못했다.
곳곳에 구걸하는 아이들이 돌아다녔고, 해쓱한 얼굴을 한 여인네들이 노점을 하고 있었다.
후줄근한 로브에 머리까지 깊게 후드를 뒤집어쓴 덕에 나와 아키드에게 시선을 주는 이들은 별로 없었다.
그저 외지인인가 하고 힐끗힐끗 쳐다보는 정도였다.
아키드는 이곳 지리에 능숙한지 내 손을 잡고 거침없이 걸었다.
“어디로 가는 거예요?”
“전에 지내던 곳에 들를까 했습니다. 혹시 돌아왔을지도 모르니까.”
아키드는 아까보다는 덜 긴장된 모습으로 차분히 대답했다. 내가 같이 와 준 것에 고마우면서도 동시에 책임감을 느끼는 듯했다.
얼른 그 제이드라는 사람을 만나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골목길을 도는 찰나였다.
누군가 내 어깨를 빠르게 치고 갔다. 일부러 옆으로 피했음에도 따라와 부딪친 것이었다.
황당해 쳐다보는데 아키드가 달아나려는 아이의 손목을 비틀었다.
“읏.”
챙그랑.
아이가 손에 쥔 것을 놓치며 앓는 소리를 냈다. 그것의 정체를 확인한 나는 내 안주머니를 뒤적거릴 수밖에 없었다.
“저건 내 돈주머니잖아.”
“조심하십시오. 여긴 소매치기가 일상이니까.”
아키드가 돈주머니를 주워 건네며 아이를 사납게 노려보았다. 아이는 아키드의 위용에 파드득 떨며 놓아 달라 칭얼거렸다.
그러자 아키드가 아이를 놓아주며 품에서 빵 한 덩이를 꺼내 내밀었다. 이곳에 들어오기 전에 산 빵이었다.
돌연 빵을 샀을 때는 무슨 일인가 했는데, 거리의 아이에게 쓸 유인책이었던 모양이다.
“먹어.”
아키드가 손에 쥔 빵을 흔들자 아이가 빵을 받고 허겁지겁 먹기 시작했다.
아키드는 아이가 다 먹을 때까지 기다리는가 싶더니 말문을 열었다.
“혹시 이 근처에서 뺨에 흉터가 있는 사내애를 본 적 있나?”
“잘 모르겠는데.”
“보아하니 쉐리의 동료 같은데.”
“누님을 알아?”
아이가 귀에 익은 이름을 듣자마자 두 눈을 둥그렇게 떴다.
내게도 익숙한 이름이라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이, 아이와 대화를 마친 아키드가 말했다.
“마침 이 아이가 쉐리에게 안내해 준대요. 가서 제이드에 관해 물어보면 될 것 같습니다.”
“아, 네.”
어쩐지 께름칙한 기분이 들었으나 애써 무시했다. 친구를 만날 생각에 들떠 있는 아키드 앞에서 초를 칠 수는 없어서였다.
‘이상하게 익숙한데 불쾌한 이름이란 말이지.’
가만히 아이가 이끄는 대로 따라가니 우리를 웬 동굴로 안내했다.
“여기서 잠시 기다리세요.”
아까보다 공손해진 아이가 후다닥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아키드? 정말 아키드야?”
동굴 안에서 웬 여자애가 부리나케 달려왔다. 갈색 머리에 갈색 눈. 까무잡잡한 얼굴에는 주근깨가 가득했다.
나는 그 애를 보자마자 그 이름에 왜 자꾸 불쾌감이 들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원작 속 인물 중 하나였으니까.
특히 원작에서 아키드를 지독하게 괴롭히던 무리의 우두머리였다. 사고를 치고 늘 아키드에게 수습을 해 달라 거머리처럼 들러붙던 이들.
부탁할 때는 꿀 발린 말을 내뱉다가도 들어주지 않으면 돌변하여 아키드를 찌르기를 주저하지 않던 자들.
유독 아키드가 그들 무리에게는 약하게 굴었는데 어릴 적에 함께 거리를 떠돌던 친구였던 거였나.
나는 착잡한 마음으로 원작을 상기했다. 쉐리 무리가 또다시 무리한 요구를 하며 아키드를 괴롭히던 장면이었다.
{“도와줘. 넌 다 할 수 있잖아.”
“대체 언제까지 이런 식으로 살 건데.”
“지금 나를 힐난하는 거야? 우리를 버리고 떠났던 네가?”
쉐리의 한마디에 아키드의 얼굴에 빗금이 그어졌다. 형형한 혐오감을 담은 그녀의 눈빛은 아키드의 내밀한 죄의식을 자극했다.
결국 저 눈빛을 마주하면 거절할 수 없었다. 그녀의 말대로 그는 친구를 버리고 호의호식하는 비겁한 배신자니까.
아키드가 마른세수를 하며 뇌까렸다.
“이번 한 번만이야. 더는 봐줄 수 없어.”
“너처럼 대단한 귀족에겐 아무렇지 않게 해결할 수 있는 일이잖아. 친구끼리 돕고 살아야지.”
쉐리가 언제 혐오를 드러냈냐는 양 헤실헤실 웃었다. 그 가식적인 모습에 아키드는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저를 이용해 먹으려는 걸 알면서도 속아 줄 수밖에 없는 제 이중성이 이해되지 않았다.
이런 식으로라도 죄책감을 덜고자 하는 자기 자신에게 혐오감이 들기도 했다.
“난 네 뒤치다꺼리를 하는 사람이 아니야.”
아키드가 애써 표정을 갈무리하며 차갑게 쏘았으나 쉐리는 콧방귀를 뀌었다.
“아하핫! 잘난 귀족이 되더니 옛정도 잊고 지 살길만 찾는다, 이거지? 하긴, 친구를 사지로 몰았을 때부터 알아봤어.”
“쉐리, 내가 그 애 이야기는 꺼내지 말라고 하지 않았나?”
“왜? 찔려?”
“…….”
“하긴 찔려야지. 너 때문에 죽었는데. 그뿐이야? 네가 우릴 잊고 편하게 살 동안 우리는 온갖 개고생을 했어.”
쉐리의 말에 아키드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부정하지는 않았다. 그녀의 말이 영 거짓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탓이었다.
상처 주려고 작정한 사람이 휘두르는 칼은 날카롭고 뼈아팠으나 이미 무뎌진 고통이었다.
굳이 들춰낸들 썩을 대로 썩은 마음에 더 아파할 통각도 남아 있지 않았다.
“옛정으로 넘어가는 것도 이번뿐이야. 네 말대로 난 귀족이고, 언제든지 너희 무리를 쓸어버릴 힘도 있지.”
“이 비겁자! 운 좋게 귀족 가문의 사생아로 태어나서 호의호식했으면서 우정을 저버리겠다고?”
“그래. 그 잘난 우정 때문에 널 살려 두고, 네 만행에도 눈감아 주고 있다는 것만 알아 둬.”
“…….”
“더는 날 찾아오지 마. 그 애를 가지고 거래를 할 생각도 그만하고.”
아키드의 마지막 경고에 쉐리가 눈을 부라리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러면서도 덤비지 못하는 건 그의 힘과 권력을 아는 탓이었다.
아키드는 이 기형적인 관계에 환멸을 느끼며 등을 돌렸다. 죽이려면 진즉 죽일 수도 있었건만 그는 차마 쉐리의 무리를 칠 수 없었다.
“위선자.”
아키드는 쉐리의 힐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속으로 그 말에 동의하면서.}
내가 제일 싫어하는 부류였다. 남 탓을 밥 먹듯이 하며 타인을 제 뜻대로 조종하려는 인간.
눈앞의 쉐리가 딱 그랬다. 아키드의 피를 빨아먹으며 기생하는 모기 같은 자였다.
이걸 왜 이제야 기억한 걸까? 빨리 기억했다면 아키드와 저 인간을 만나게 두지 않았을 텐데.
내 허접한 기억력에 울분이 나오려던 때였다.
“쉐리, 오랜만이야.”
아키드가 그녀를 한눈에 알아보곤 낮게 인사했다. 그러자 쉐리가 입을 가린 채 울먹거렸다.
“너 살아 있었구나!”
그러더니 아키드에게 안길 듯이 달려오는 게 아닌가? 나는 짜증이 치밀어 아키드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러자 쉐리가 우뚝 멈추며 퉁명스럽게 물었다.
“이 못난이는 누구야?”
누구 보고 못난이래?
내가 눈을 부릅뜨자 품에 있던 흰둥이가 덩달아 으르렁거렸다. 내가 적의를 보이는 걸 기민하게 알아챈 것이었다.
정령들도 이에 질세라 쉐리에게 달려들려는 찰나, 아키드가 눈을 찌푸리며 말했다.
“함부로 말하지 마. 내 아내야.”
쉐리는 아내라는 말에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으며 꽥, 소리를 질렀다.
“거짓말! 누가 그 나이에 결혼을 해!”
“그야…….”
아키드가 제 신분을 설명하려 막 입을 연 때였다. 선수 치듯 그의 어깨에 손을 올린 내가 우아하게 맞받아쳤다.
“아키, 저 꼬질이는 누구예요?”
일단 아까 저 애가 나를 못난이라고 부른 것에 복수부터 시작했다.
“뭐, 꼬, 꼬질이?”
쉐리는 꼬질이라는 말에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나는 그러거나 말거나 다정히 속삭였다.
“저는 질투가 많아요. 다른 여자랑 눈도 마주치지 말아요. 기분 나쁘니까.”
특히 저 애랑은 더더욱 상종하지 말았으면 해.
내 직설적인 말에 아키드가 눈을 둥그렇게 뜨고 바라보았다.
설마 질투라는 단어가 내 입에서 툭 튀어나올 줄은 몰랐다는 듯이.
뒤이어 귓불이 붉어지는 게 후드 너머로도 보여 만족스러웠다. 내가 배시시 웃자 쉐리가 험상궂은 얼굴로 소리쳤다.
“너! 우리는 사지로 몰아 놓고 저런 못난이랑 시시덕거리며 지내 온 거야? 이 배신자!”
그녀가 씩씩거리며 아키드의 후드를 벗겨 버렸다.
“하! 이제 보니 안에 입고 있는 옷도 꽤 고급이잖아. 너만 호의호식하고 우리는 구걸하며 지내게 내버려 둔 거야? 이 나쁜 놈! 차라리 죽지 그랬어!”
역시나 힐난의 화살이 아키드에게 돌아갔다. 아키드는 말없이 쉐리를 관망했다. 원작처럼 바보같이 욕을 듣고만 있는 게 화가 났다.
후, 아무래도 휴업한 지옥의 주둥아리를 부활시켜야 할 것 같네.
나는 목과 손목을 풀며 싸울 준비를 마쳤다.
내 새끼 건드리는 연놈은 내가 또 못 참지.
내가 막 아키드에게서 쉐리를 떼어 내려는 찰나.
“난 건들면 물…….”
“못난이 아니야. 함부로 하지 말라고 경고했어, 쉐리.”
아키드가 쉐리와 거리를 두며 차갑게 말했다. 뜻밖의 반박에 막 다다다 쏘아 주려던 것도 잊고 아키드를 쳐다보았다.
분명 소설에서처럼 그녀를 제대로 상대하지 못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쉐리에게 달려들 기세라 놀라웠다. 쉐리는 아키드가 나를 옹호하자 발을 구르며 씩씩거렸다.
“지금 저 못난이 편을 드는 거야? 이래서 검은 머리 짐승은 거두는 게 아니라더니. 반반한 얼굴로 귀족 영애라도 꼬셨나 본…… 웁!”
나는 냉큼 품에 있던 빵으로 그녀의 입을 막아 버렸다. 그녀의 입에서 더러운 말만 나오는 탓이었다.
이성의 줄을 간신히 붙든 나는 쉐리에게만 들리도록 서늘하게 중얼거렸다.
“입에서 똥내 나니까 그만 짖어 대고 이거나 먹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