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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가 시집살이 너무 쉬운데요 (79)화 (79/177)

#79.

며칠 후, 충분히 쉬고 나자 캐서린의 가이드가 시작되었다.

13지구로 나뉜 수도인 만큼 하루 만에 1~6지구를 모두 구경하기는 힘들어 사흘에 걸쳐서 다니기로 했다.

어차피 1지구와 2지구는 주택가라 3지구부터 본격적인 관광이었다.

그리고 이번이 세 번째 외출이라 벌써 6지구를 구경하는 중이었다.

나는 3일이라는 시간 동안 캐서린과 제법 친밀해졌는데, 역시나 원작 속 악녀 같은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녀가 아직 흑화하기 전일 수도 있겠다 싶어 경계를 느슨하게 풀었다.

원작 속에서 캐서린이 악녀였든 아니든, 내가 만난 그녀가 위험하지 않다고 판단한 탓이었다.

“로에나, 이쪽으로.”

캐서린이 내 손을 이끌며 웬 분수대 앞으로 갔다.

뒤이어 아키드와 흰둥이가 조르르 따라왔다. 이미 이런 식으로 줄지어 가는 게 익숙해진 모두였다.

캐서린이 분수를 향해 손을 척 뻗으며 야무지게 설명했다.

“이건 암룡 자파르시아와 네 명의 제자들을 조각한 「인연의 시작」이라는 분수야. 6지구의 중앙에 위치해서 관광 명소로 유명해.”

“와, 엄청 크다.”

나는 「인연의 시작」이라 불리는 분수를 보며 탄성을 내뱉었다.

거대한 날개를 펼친 자파르시아를 중앙으로 네 명의 제자들이 무릎 꿇고 있었다.

각각 대지, 어둠, 불, 빛을 상징하는 물건을 든 채였다. 하인트는 황금을, 에셀은 불사조를, 루이스는 별을 형상화한 물건을 들고 있었다.

반면 하델루스는 조금 특이한 물건을 쥐고 있었다. 나는 초대 하델루스가 들고 있는 책을 가리키며 물었다.

“저 사람은 왜 책을 들고 있어?”

“아, 저건 하델루스의…….”

캐서린이 채 설명하기도 전에 아키드가 대답했다.

“비전(祕典)입니다. 하델루스는 옛부터 기록을 담당했거든요.”

“비전이요?”

“예. 자파르시아가 대륙을 떠나기 전까지의 기록을 하델루스가 보관하고 있습니다.”

― 들어 본 적 있어! 하델루스의 비전! 자파르시아가 하델루스와 계약하는 조건으로 기록을 지키게 했었지.

― 듣기론 엄청 거대한 책이라고 했는데. 궁금하다! 분명 재미난 이야기가 가득할 텐데.

정령들이 아는 게 나왔다며 신나서 조잘거렸다. 옛부터 이어진 기록이라면 꽤 방대할 터.

이제 보니 책 겉면에 하델루스의 인장이 음각되어 있었다. 월계수 잎이 양 날개 형상을 띤 채 눈송이를 감싼 문양.

나는 혹시 하델루스의 비전에 흑마법에 관한 기록도 있을까 해서 슬쩍 귓속말로 물어보았다.

“아키드 님은 어디에 보관되어 있는지 아세요?”

하델루스 성을 다 돌아다녀 봤지만 기록을 보관해 두는 장소는 본 적이 없었다. 거대한 책이라면 못 봤을 리는 더더욱 없을 텐데.

내 질문에 아키드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저도 몰라요. 가주가 아니면 열 수 없다는 것밖에는.”

“열 수 없다고요?”

“예. 아마도 어둠 속성 마법으로 열람할 수 있는 게 아닐까 싶어요. 암룡과의 계약으로 파수꾼의 역할을 받았으니까요.”

파수꾼이라.

원래 기록에는 큰 힘이 있다고 들었다. 과거를 돌아보면 미래를 알 수 있다고들 하지 않는가?

자파르시아가 기록을 지키라고 한 것을 보면 분명 대단한 내용이 들어 있을 터. 알면 알수록 점점 더 호기심이 일었다.

“그럼 책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본 사람 말고는 모르겠네요.”

“그런 셈이죠.”

그것참, 찾아서 열어 보고 싶은 책이었다.

자파르시아의 유희 시절 기록이라면 흑마법에 관한 실마리가 있을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볼 수는 없을까?

내가 아쉬운 기색을 띠자 아키드가 말을 덧붙였다.

“아버지께선 아마 읽어 보셨겠죠. 가주 승계식을 치르면 자연히 책을 열람하는 방법을 깨닫게 된다고 들었거든요.”

“아.”

“아마 승계 이후에 비전의 내용을 살펴보셨을지도 모릅니다.”

그래. 내가 직접 열람하지 못한다면 대공에게 흑마법에 관한 기록이 없는지 확인해 달라 요청할 수 있었다.

나는 대공에게 기회가 되면 비전에 관해 물어봐야겠다 다짐했다.

물론 방대한 분량을 다 살피려면 좀 걸리지 않을까 싶었지만 그건 아버님이 알아서 하겠지.

그렇게 생각을 정리할 즈음 캐서린이 다음 행선지로 이동하자고 제안했다.

이에 줄줄이 따라가는데 아키드가 우뚝, 멈추었다. 얼굴은 귀신을 본 것처럼 희게 질려 있었다.

“제이드?”

그가 무어라 중얼거리는가 싶더니 홀연히 반대 방향으로 걸음을 돌려 인파를 뚫기 시작했다.

“아키?”

마침 정기 회의 시즌이라 사람이 북적이는 통에 아키드를 따라가는 것도 벅찼다.

“아키!”

나는 캐서린을 불러 세울 새도 없이 아키드를 뒤따라갔다.

“아키! 같이 가요!”

아무리 소리쳐 불러도 아키드는 앞만 보고 걸어갔다. 꼭 다급히 누군가를 뒤쫓는 것처럼 황급하게 움직였다.

겨우 인파를 뚫고 옆 골목으로 넘어갔을 무렵이었다.

하얗게 질린 아키드가 갈림길에서 두리번거리며 서성이고 있었다. 정확히는 망설이고 있었다.

“아키, 왜 그래요, 무슨 일인데?”

어쩐지 위태로워 보이는 모습에 손을 붙들자 아키드가 중얼거렸다.

“제이드를 봤습니다.”

“제이드라면…….”

아키드 대신 사제의 심부름을 갔다가 실종됐다는 친구 이름이 아니던가.

그 이름을 듣고 나서야 아키드가 혼비백산하여 달려 나간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내가 그의 손을 꼭 붙들며 물었다.

“확실해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얼굴에 난 그 흉터는 제이드가 분명한데.”

아키드의 몸이 파르르 떨렸다. 죽은 줄 알았던 친구와 닮은 사람을 봐서 놀란 것 같았다.

스치듯 본 거라 스스로도 잘못 본 게 아닌가, 의심하는 듯했다. 나는 가만히 갈림길을 살폈다.

하나는 5지구로, 하나는 7지구로 통하는 길이었다. 중립 지역인 7지구는 13지구와도 연결된 곳이었다.

만약 아키드가 제대로 알아본 거라면 분명 13지구로 향했을 터.

여기서 그냥 돌아간다면 아키드는 두고두고 후회할지도 몰랐다.

이미 친구를 죽음으로 내몰았다고 여겨 죄책감을 느끼는 그였다. 거기에 친구를 만나고도 모른 척했다는 자괴감까지 더하게 할 수는 없었다.

나는 아키드가 과거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돕고 싶은 마음에 그의 손에 손깍지를 끼며 말했다.

“직접 가서 확인해 볼래요?”

“아뇨. 13지구는 위험해요. 로에나를 그런 곳에 데리고 갈 수는 없습니다.”

“그럼 절 두고 혼자 가려고요?”

“그건…….”

역시 혼자 갈까, 말까 망설인 게 분명했다. 나는 한숨을 폭 내쉬며 말했다.

“저도 아키 혼자 보낼 수 없어요. 갈 거면 같이 가요. 우리한텐 흰둥이도 있고, 뒤따라오는 호위 기사도 있으니 안전은 걱정하지 말고요.”

“아무리 그래도…….”

“어차피 이대로 돌아갈 수는 없잖아요. 진짜 제이드일지도 모르는데.”

내가 거듭 권하자 아키드가 아랫입술을 꾹 깨무는가 싶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습니다.”

“우리 사이에 뭘요.”

“같이 가 줄래요?”

“당연하죠. 어차피 가 보고 싶던 곳이기도 한걸요. 아키가 지내던 곳이잖아요.”

내가 냉큼 화답하자 아키드가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 아까보다는 덜 긴장한 모습이었다.

“그럼 캐서린한테 연락해야겠어요. 갑자기 사라져서 놀랐을 거예요.”

나는 품에서 호루라기처럼 생긴 피리를 꺼내 불었다. 그러자 깍깍거리는 소리와 함께 키나가 저 멀리서 날아왔다.

두 팔을 벌리자 키나가 사뿐히 품에 안착했다. 키나에게 몸통 박치기를 당할까 염려한 것과 달리 안정적인 착지였다.

슈리가 봤다면 놀라 자빠졌을 광경에 내가 두 눈을 둥그렇게 뜨며 중얼거렸다.

“우리 키나, 이제 보니 착지 잘하네?”

깍깍.

주인은 박지 않아!

키나가 부리를 오물거리며 재롱을 피웠다. 초반에 눈싸움에서 이긴 보람이 있었다. 이렇듯 잘 따르는 걸 보면 말이다.

그러고 보니 키나가 나를 박은 적이 없기는 했다. 주로 곁에 있던 슈리나 비비안을 박았지.

역시 진짜로 주인을 알아보는 걸까?

나는 키나의 영특함에 눈을 빛냈다.

“어쩜, 누가 선물한 건지 모르겠지만 총명하기도 해라.”

슈리가 들었다면 기겁할 만한 말을 내뱉자 키나가 가슴을 쭉 펴며 으스대는 듯한 몸짓을 취했다.

곁에 있던 아키드까지 내 발언을 듣고 덩달아 볼을 붉혔다.

키나의 턱을 가만히 쓸어 준 나는 급히 쪽지를 써서 다리에 묶었다.

“캐서린이 우릴 찾고 있을 거야. 일이 생겼으니 먼저 성으로 돌아가라고 썼으니까 잘 전달해 줘야 해.”

깍깍.

두말하면 잔소리다!

키나가 나만 믿으란 듯이 날개를 퍼덕였다.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나는 순간 멈칫했다. 키나의 위용이 제법 매서운 탓이었다.

캐서린이 저 덩치를 보고 놀라면 안 될 텐데.

나는 혹여라도 캐서린에게 몸통 박치기를 시전할까 싶어 따끔히 주의를 주었다.

“사람한테 달려들지 않기. 착지는 푹신한 곳으로. 알겠지?”

키나는 잔소리하는 게 싫었는지 내 품에서 벗어나 푸드득 날아가 버렸다. 그 모습을 잠깐 살핀 내가 아키드에게 말했다.

“7지구에 가서 후드 달린 로브를 사서 입는 게 좋겠어요. 이대로 가면 표적이 되기 쉬우니까.”

13지구는 평민 중에서도 빈민층이 주로 머무는 곳이었다.

고급 원단 옷을 입고 가면 눈에 띌 테니 후줄근한 로브로 온몸을 덮는 게 좋을 듯했다.

아키드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예. 물론이에요.”

그러곤 그가 내 손을 다잡으며 7지구로 향하는 갈림길로 방향을 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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