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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가 시집살이 너무 쉬운데요 (78)화 (78/177)
  • #78.

    “정말 미안해!”

    캐서린이 두 손을 모은 채 울망울망한 눈빛을 보냈다. 내가 쓰러졌다는 소식을 듣고 놀라서 찾아온 것이었다.

    아마도 저가 억지로 끌고 나간 것 때문에 무리했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그녀가 손에 든 꽃다발을 내게 내밀며 거듭 말했다.

    “내가 너무 무신경했어. 난 너무 반가운 마음에 얼른 친해지고 싶어서…….”

    “괜찮아. 그리고 꽃도 고마워.”

    내가 배시시 웃으며 꽃다발을 받자 캐서린이 감동한 눈빛을 보냈다.

    “응! 내가 직접 엮어 온 거야.”

    “아가씨, 또 정원의 꽃을 맘대로…….”

    곁에 있던 시녀의 말에 캐서린이 한 번만 봐 달라는 듯한 몸짓을 취했다.

    이에 못 이기는 척 넘어가는 시녀의 모습에서 캐서린을 귀여워하는 게 느껴졌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다소 심경이 복잡해졌다. 못될 거라 생각했던 악녀가 너무도 순진무구해서였다.

    내가 등장인물을 착각했나 싶을 정도였다. 캐서린은 조금 막무가내이기는 해도 그 나이대 아이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누군가를 조종해서 제게 유리하게 상황을 끌어가려는 법도 없고 오히려 너무 솔직해서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게다가 제로니스와 캐서린의 관계를 떠올리니 더더욱 혼란스러웠다.

    ‘캐서린, 거기 물웅덩이가 있어.’

    ‘앗, 그러네.’

    ‘하여간 잠시도 한눈팔 수가 없어.’

    제로니스가 덤벙대는 캐서린의 뒤를 졸졸졸 따라다니는 걸 봤을 때의 기분이란.

    악녀가 덤벙거린다는 소리는 못 들었는데. 하지만 직접 본 광경이기에 어릴 때는 조금 달랐나,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때 캐서린이 몸에 힘을 꽉 주며 말했다.

    “사과의 의미로 수도 구경을 시켜 줄게.”

    “앗, 아니, 괜찮은데…….”

    “아니야. 해 주고 싶어, 해 주게 해 줘, 응? 나 열심히 준비했어.”

    캐서린이 웬 종이를 펼치며 결의에 찬 표정을 지어 보였다.

    종이에는 수도 곳곳의 명소를 볼 수 있는 코스가 수기로 짜여 있었다.

    한눈에도 어린아이의 필체였다. 나는 조금 얼떨떨한 기분으로 되물었다.

    “설마 네가 직접 계획한 거야?”

    “응! 뭐라도 도움이 되고 싶어서……. 물론 당장 가자는 건 아니고 몸이 좀 괜찮아지면 같이 가 줬으면 해서.”

    캐서린이 우물쭈물하는가 싶더니 점차 말소리가 잦아들었다. 아무래도 강요한다고 여길까 봐 걱정하는 것 같았다.

    이렇게 온몸으로 사과하는 경우는 처음이라 거절할 수가 없었다.

    어차피 나나 아키드나 수도를 잘 모르니 1~6지구는 그녀에게 가이드를 부탁해도 될 것 같았다.

    “응, 그럼 1~6지구 관광을 부탁할게. 7지구는 아키랑 단둘이 가기로 해서.”

    “응! 물론이지. 나한테 맡겨 줘! 대공자도 같이 갈 수 있는 코스로 짰으니까 분명 즐거울 거야.”

    캐서린이 힘차게 포부를 밝혔다. 그게 좀 귀여워서 푸스스 웃음을 터트렸다.

    “아키, 괜찮죠?”

    “로에나가 원한다면야.”

    곁에 있던 아키드에게 동의까지 구하니 거칠 게 없었다.

    * * *

    그날 저녁. 황성에서 돌아온 엘레나와 데미안은 곧장 내 침실부터 방문했다.

    대공은 내 뺨을 짜부라뜨린 채 안색을 요리조리 살피며 작게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보약을 먹여야겠어. 이렇게 허약해서야.”

    “개차나여.”

    그것보다 이것 좀 놔요. 아키드 앞에서 흉한 꼴 보이게 하지 말라고요!

    내가 바둥거리자 엘레나가 대공을 떼어 놓으며 새침하게 말을 받았다.

    “말만 하지 말고 사 왔어야죠.”

    “그럼 대공비께선 사 오셨습니까?”

    “그야 당연하죠.”

    엘레나가 호기롭게 대답하며 메이를 눈짓했다. 그러자 그녀가 웬 유리병 하나를 꺼냈다.

    그 속엔 씹으면 입 안을 초토화시킬 것처럼 무지하게 써 보이는 환이 들어 있었다. 메이가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최근 수도에서 보양에 좋다고 소문난 환입니다. 먹으면 기운이 불끈불끈 솟는대요.”

    엘레나가 ‘봤죠?’ 하는 듯이 턱을 추키며 뚜껑을 열어 환을 하나 꺼내 내밀었다.

    “자, 먹어 보렴.”

    “…….”

    “어서.”

    뭘로 만든 건지도 모르는데 무작정 먹으라니요.

    내가 입을 꾹 다문 채 가만히 있자 데미안이 피식 웃으며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대공비께선 좀 더 분발하셔야겠습니다. 이리 아이 다룰 줄을 모르시니.”

    “뭐라고요?”

    엘레나가 눈을 세모꼴로 뜨며 되묻자 대공이 주머니에서 사탕 봉지를 꺼내었다.

    “최근 어린 영애들에게 인기가 많다는 딸기 맛 사탕이죠. 무작정 쓴 약을 먹게 한다고 먹습니까? 주머니에 사탕 하나도 안 챙겨 두고 무엇 하셨는지.”

    “큭.”

    엘레나가 분하다는 표정을 짓자 데미안이 뿌듯하게 웃으며 사탕을 내밀었다.

    “자, 새아가. 여기 사탕이랑 같이 먹으렴.”

    궁지에 몰린 난 입을 꾹 다문 채 아키드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제발 이 두 사람 좀 말려 보란 의미에서 쳐다본 것이었다.

    하지만 내 의사가 잘못 전달된 걸까. 아키드는 엘레나에게서 환을, 데미안에게서 사탕을 빼앗으며 말했다.

    “네, 제가 먹여 드릴게요.”

    “아닛…….”

    “아, 하세요.”

    아키드가 해사하게 웃으며 환을 내밀었다. 그 미소에 나도 모르게 입을 벌리고 만 건 불가항력이었다.

    어떻게 저 얼굴로 부탁하는데 들어주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예상대로 무척 쓴 약이라서 눈을 찌푸리니 아키드가 사탕을 입에 쏙 넣어주었다. 단 게 들어가니 조금 살 것 같았다.

    “잘했어요.”

    내가 순순히 입을 열자 화색을 보이는 아키드와 달리 엘레나와 데미안은 얼굴을 와락 구겼다.

    홀리듯 환을 먹어 버린 나는 열심히 혀로 사탕을 굴려 쓴맛을 없애느라 희비가 교차하는 현장을 내버려 두었다.

    잠시 후, 엘레나가 허망한 얼굴로 혼잣말했다.

    “수고한 건 난데 공은 네가 가져가는구나.”

    뒤이어 데미안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사탕 봉지를 도로 주머니에 넣었다.

    “생각해 보니 이 사탕은 내가 먹어야겠군.”

    내가 어이없다는 듯한 시선으로 데미안을 쳐다보자 그가 콧방귀를 뀌며 고개를 돌려 버렸다.

    엘레나를 돌아보니 그녀의 입매가 일자로 굳게 닫혀 있었다.

    어째 풀어 주지 않으면 앞으로의 대공가 생활이 순탄치 않을 것만 같았다. 별수 없어진 나는 두 손을 모아 아부를 시작했다.

    “어머님, 벌써부터 기운이 불쑥불쑥 솟는 거 같아요.”

    만세까지 해 보이며 힘차게 말하자 엘레나의 입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이윽고 주인의 의지를 배반한 입꼬리가 쑥 올라갔다.

    일단 한 명은 됐고.

    나는 뒤이어 데미안에게 두 손을 내밀며 말했다.

    “아버님이 주신 사탕 덕분에 입 안이 달아요. 하나만 더 주시면 안 돼요?”

    “내가 먹을 거래도.”

    “너무 맛있어서 그래요. 네?”

    내가 눈까지 깜빡이자 대공이 “허, 참” 하고 앞머리를 쓸어 넘기는가 싶더니 주머니에서 꺼내 봉지째로 내 손에 올려 줬다.

    “네가 그렇게 먹고 싶다면야.”

    “와아! 감사합니다!”

    내가 봉지를 품에 안고 배시시 웃자 데미안이 “내일은 레몬 맛으로 사 오지” 하고 말을 덧붙였다.

    남은 한 명도 성공적으로 아부 성공!

    어쩌다가 시부모님을 구슬리는 며느리로 성장한 건지는 모르겠다만 미움받는 것보다야 훨씬 나았다.

    물론 세 사람이 묘하게 경쟁을 벌이게 된 상황은 의아하지만 싸우지 않는 게 어딘가.

    긍정적인 변화에 홀로 자축하고 있던 그때 대공이 입을 열었다.

    “아, 그러고 보니 이번 모임에서 에이프릴 후작을 만났다.”

    “아버지를요?”

    이곳에 올라오면서 어느 정도 예상한 일이기는 했다.

    정기 회의는 모든 귀족에게 해당되는 거니까 에이프릴 후작도 오지 않을까 하고.

    마침 쌍둥이는 아카데미에 재학 중이라 수도에 있으니, 후작은 몰라도 쌍둥이와는 마주치리라 각오는 하고 있었다.

    내 물음에 대공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맘때엔 영지가 바쁘다며 대리인을 보내더니 아마도 네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직접 온 모양이지. 날 보자마자 딸아이가 잘 있냐며 어찌나 닦달하던지.”

    “편지 보낼 걸 그랬나 봐요.”

    그때 이후로 연락 한 번 안 했으니 후작 입장에선 애가 탔을 것 같았다. 하지만 딱히 할 말이 없었는걸.

    “그래. 안 그래도 후작이 네게 편지도 전해 달라 했었지.”

    대공이 서신을 품에서 꺼내 내밀었다. 내가 얼결에 편지를 받자 그가 말을 이었다.

    “그리고 괜찮다면 너와 아키드 모두 별장에 초대하고 싶다고 했다.”

    “저랑 아키를요?”

    “그래, 너랑 아키…… 잠깐 아키?”

    내가 애칭을 서슴없이 부르자 데미안과 엘레나의 눈이 커다래졌다.

    표정에서 벌써 그렇게 친해졌냐는 듯한 뉘앙스가 폴폴 풍겼다. 이윽고 데미안이 아키드에게 말했다.

    “아키, 너도 갈 테냐?”

    그러자 아키드가 얼굴을 와락 구기며 낮게 거부했다.

    “아키라고 부르지 마십시오. 로에나한테만 허락했습니다.”

    “그렇다면 더 부르고 싶은데.”

    “……하지 마십시오.”

    “싫다.”

    아무래도 대공이 회의에서 안 좋은 일이라도 있던 게 분명했다. 그런 게 아니라면 이렇게 유치하게 굴 리가 없는데.

    내가 막 아키드를 감싸려는데 엘레나가 두둔하고 나섰다.

    “애 놀리지 말아요. 나이를 어디로 먹은 건지.”

    하지만 그게 오히려 데미안의 심기를 거슬렸는지 그가 비뚜름히 웃으며 그녀를 다정히 불렀다.

    “엘라.”

    “……더는 살고 싶지 않다는 뜻으로 이해해도 되나요?”

    엘레나가 참지 못하고 시녀가 사과를 깎던 과도를 움켜잡으며 살벌하게 중얼거렸다.

    당장이라도 휘두를 기세라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아까 자축은 취소다. 역시 이 집구석은 친해지려면 아직 먼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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