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
“정말 괜찮은 건가?”
아키드가 잠이 든 로에나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거듭 물었다. 벌써 다섯 번째 같은 질문이었으나 마샤는 상냥하게 대답을 반복했다.
“네. 그저 잠이 든 것이니 안심하셔도 돼요.”
“혹시 모를 내상이 있을지도 모른다. 혼절하기 전에 가슴을 부여잡았었어.”
“아마도 여행길이 고돼서 피로가 쌓인 모양입니다. 영양제도 놓았으니 푹 주무시고 난 후면 괜찮아지실 거예요.”
마샤가 거듭 설명을 하자 아키드가 짙은 한숨을 내뱉었다. 의원이 괜찮다고 하는데도 안심이 되지 않는 탓이었다.
“……알겠네.”
하지만 더는 주치의를 괴롭혀 봤자 나오는 게 없었다. 게다가 그녀는 전 주치의와 달리 로에나를 극진히 살피는 의원이었다.
계속 추궁해 봤자 의미 없는 일이었다. 오히려 반감을 사면 로에나에게도 좋지 않고.
“이만 나가도 좋아.”
“혹시 일이 생긴다면 호출해 주십시오. 가까운 곳에서 대기하겠습니다.”
마샤가 정중히 인사하고 자리를 떠났다. 아키드가 로에나의 머리칼을 가볍게 쓸어 넘겼다.
로에나가 쓰러진 직후, 놀란 데미안이 로에나를 방으로 옮기고 주치의를 호출했다.
다행히 별다른 문제가 없다는 주치의의 말에 안심하는가 싶더니 엘레나와 사라졌다.
아마도 앞선 대화 내용들을 토대로 그녀와 상의하려는 것 같았다.
흑마법사와 음표 문신, 그리고 알 수 없는 습격까지 의논해야 할 게 산더미였으니까.
“자꾸 아프기나 하고.”
아키드가 작게 핀잔하며 로에나의 볼을 톡, 건드렸다. 마샤의 말대로인지 로에나의 안색은 한결 좋아진 상태였다.
그럼에도 쓰러지기 직전 비추었던 두려움 섞인 표정이 잊히지 않았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런 얼굴을 했던 걸까.’
아키드는 종종 로에나가 무언가를 숨기는 듯한 느낌을 받곤 했다. 정확히 콕 집을 수는 없지만 외면받는 걸 두려워하는 것도 같았다.
해서 시녀들을 떠보았으나 얻은 답은 실마리를 풀기엔 역부족이었다.
‘작은 마님께서 에이프릴 성에서 어땠냐고요?’
‘그래. 가족들과 혹시 사이가 나빴다던가…….’
‘그럴 리가요. 작은 마님은 에이프릴 성의 귀여움을 한 몸에 받는 분이셨는데요. 후작님께서 정말 아끼셨어요.’
‘그뿐인가요? 도련님들은 아가씨의 말이라면 껌벅 죽는시늉도 하실걸요?’
가족 간에 문제가 없다면 로에나가 후작을 초청하겠다는 말에 거부 반응을 보일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로에나는 그들을 만나는 일 자체를 두려워하는 것 같아 의아했다.
“대체 뭘까.”
상념에 잠긴 아키드가 가만히 로에나를 응시했다. 어느 순간부터 자주 아픈 것 같아서 걱정스러웠다.
이상하게도 그녀가 아프면 자꾸만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꼭 이런 상황을 겪어 보기라도 한 것처럼 불길함이 엄습하곤 했다.
“로에나가 내게 솔직하면 좋을 텐데.”
무엇이든 말해 준다면 도와줄 준비가 되어 있는데.
아키드는 자신이 로에나에게 그만한 신뢰를 주지 못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에 다소 착잡해졌다.
동시에 지금보다도 더 가까워질 수 있게 노력해야겠다 다짐하며 그녀의 손등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지금보다 더 가까워졌으면 좋겠어.”
낮게 읊조리는 아키드의 음성이 방 안에 고요히 내려앉았다. 적극적인 행동과 달리 귓바퀴가 붉어진 채로.
* * *
또다. 또 혼절했다.
나는 천장 무늬를 살피며 어제 일을 떠올렸다. 갑작스럽게 기억이 흘러 들어온 데다 통증까지 동반해서 의식을 잃고 말았다.
게다가 기억과 함께 흘러든 감각은 무척 슬프고 고통스러웠다. 뭔가 마음이 너덜너덜하고 아려서 나까지 기분이 저조해질 정도로.
다시 생각해도 기분 나쁜 과거라 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대체 이놈의 몸뚱이는 뭐만 하면 픽픽 쓰러지고 난리야.
“이래선 전염병이 아니라 심신미약으로 죽을지도 몰라.”
그래. 실은 로에나는 원래부터 시한부였던 게 분명하다. 그런 게 아니라면 이렇게 픽픽 쓰러질 리가―
“그런 말 하지 말아요.”
“……!”
갑자기 들리는 타인의 목소리에 깜짝 놀란 나는 눈을 도르륵 굴렸다. 그리고 보이는 햇살처럼 눈부신 한 사람.
“몸은 괜찮아요?”
아키드였다. 인기척이 없어 곁에 누가 있다고 느끼지 못했다.
“아키드 님.”
“자꾸 아픈 모습만 보게 되는 것 같네요.”
아키드가 낮게 읊조리며 손등으로 내 뺨과 이마, 목 언저리를 매만지며 체온을 재었다.
하루 새 해쓱해진 걸 보니 밤새 내 옆을 지킨 것 같았다. 옷차림도 어제 본 그대로였고.
“열은 없네요.”
“고마워요, 아키드 님. 밤새 곁에서 지켜 주신 거죠?”
“걱정이 돼서요. 혹시라도 밤새 무슨 일이 생길까 봐.”
아키드가 손을 물리며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 누군가 나를 이토록 걱정해 준다고 생각하니 퍽 감격스러웠다.
전생에는 내가 아파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아서일까.
그저 성가신 존재로만 취급받던 내가 그에겐 중요한 존재가 된 거 같아서 기분이 좋았다.
이젠 걱정시키지 말아야지.
더는 아키드를 속상하게 하지 않겠다, 다짐한 나는 상체를 일으켜 침대 헤드에 기댔다.
“잠은 잤어요?”
그에게 손을 뻗자 그가 붙잡아 제 얼굴에 대었다. 그러곤 화사하게 웃으며 말했다.
“충분히요.”
거짓말. 눈 밑이 거뭇거뭇한 게 밤새운 얼굴이면서.
“그렇다기엔 퀭한 거 같아요.”
“그래서 별로예요?”
아키드가 질문과 함께 고개를 모로 기울여 나를 올려다보았다. 청명한 청회색 눈동자가 고요하게 와 닿았다.
내가 시선을 마주친 채 대답했다.
“네. 별로예요.”
“예?”
아키드는 예상한 답이 아니었는지 당황해 동공이 흔들렸다. 나는 허둥거리며 제 얼굴을 살피려는 그를 도로 붙들어 시선을 맞추었다.
그러곤 배시시 웃으며 정말 하고 싶었던 말을 내뱉었다.
“제 눈엔 별로 보인다고요.”
“…….”
“반짝반짝 빛나는 별.”
내가 한 손을 흔들며 부연 설명하자 아키드의 얼굴이 삽시간이 붉어졌다.
그 모습이 어찌나 귀여운지 절로 아랫입술을 안으로 말아 물었다.
내 사전에 아키드가 별로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오히려 피곤에 전 모습도 그것대로 멋지다고 생각했으니까.
잠시 후, 그가 손등으로 입가를 가리며 어물어물 대답했다.
“대체 그런 말은 어디서…….”
“어디서 배운 거 아니에요. 그냥 아키드 님만 보면 저절로 떠오르는데요?”
원래 덕후는 주접 빼면 시체라고 했다.
최애를 칭찬할 구석이 얼마나 많은데.
숨만 쉬어도 예쁘다, 예쁘다 칭찬하고 싶은 게 덕후의 마음이었다.
나는 아키드가 부끄러워하는 게 재미있어 자꾸만 놀리고 싶어졌다. 해서 그의 볼을 살살 쓰다듬으며 다정히 속삭였다.
“원한다면 더 해 줄 수도 있어요.”
“…….”
“아이, 예뻐라.”
내 간드러진 음성에 아키드가 움찔, 떠는가 싶더니 예고도 없이 바짝 다가왔다.
잘생긴 얼굴이 바로 코앞으로 다가오자 심장이 쿵, 떨어졌다.
내가 아무 말 없이 멀거니 쳐다보자 아키드가 작게 물었다.
“내가 예뻐요?”
“그럼요.”
“내 눈엔 로에나가 더 예쁜데.”
작게 읊조리는 음성에선 장난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청회색 눈동자에 입을 헤벌린 내 모습이 비쳤다.
심장이 공터에서 공놀이하듯 통통통, 뛰기 시작했다. 얼굴이 익을 것 같을 즈음 아키드가 말했다.
“그것보다 로에나, 언제까지 아키드 님이라고 할 겁니까?”
“네?”
“저만 이름으로 부르는 것 같아서요. 어쩐지 거리감도 들고.”
코끝을 간질이는 숨결이 봄바람처럼 살랑살랑 내 마음을 몽글몽글하게 만드는 듯했다.
“그럼 이제부터 아키드라고 부를까요?”
“아뇨.”
“네?”
이름으로 부르래서 물었더니 거부를 할 줄은 몰랐기에 당황한 나는 두 눈을 깜박였다.
그러자 아키드가 제 손으로 뺨에 있던 내 손을 포개며 다정히 말했다.
“아키라고 불러 주세요.”
“…….”
“로에나한테만 허락한 거예요, 내 애칭.”
나, 나한테만!
나는 아키드의 천연한 플러팅에 심장이 조여드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심장을 부여잡았다간 또 걱정할 것 같아 차분히 다스렸다.
가까스로 진정한 내가 잔뜩 붉어진 얼굴로 수줍게 입을 열었다.
“아키.”
“네, 로에나.”
아키드는 제 애칭이 불리자 환하게 웃으며 화답했다.
아, 어쩜 애칭까지도 이리 귀여울 수 있을까. 입에 착착 감기는 게 왜 이제야 허락한 건가, 야속하기까지 했다.
나는 한 번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해 홀린 듯 그를 불렀다.
“아키.”
그러자 아키드가 푸스스 웃음을 터트렸다. 이내 그가 도로 시선을 맞추며 힘주어 말했다.
“네, 당신의 아키가 여기 있어요.”
“…….”
“애칭으로 불리는 게 생각보다 벅차네요. 가까워진 거 같아 좋습니다.”
아키드는 수줍은 듯 입가에 머금은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몸속에 구름이 꽉 찬 것처럼 몽글몽글한 기분이 들었다.
이대로 붕 날아서 하늘로 올라갈 수도 있을 것만 같은 벅찬 느낌이었다.
아키드와 어느새 이만큼이나 가까워졌구나. 그런 생각이 드니 나도 덩달아 웃음이 나왔다.
“그럼 자주 불러야겠네요. 지금보다 더 가까워지게.”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다고, 지금보다도 더 가까워지고 싶은 맘에 내뱉은 말이었다. 그리고 이어진 아키드의 대답은 만족스러웠다.
“바라던 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