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공가 시집살이 너무 쉬운데요 (76)화 (76/177)

#76.

메이벨이 붉게 물든 손가락을 문신에 가져다 대며 스산하게 중얼거렸다.

“방해하지 마. 필요해지면 어련히 찾아갈 테니.”

그 순간 붉은 핏방울이 검은 새의 형상을 한 채 창밖으로 사라졌다.

메이벨이 단검을 도로 감추고 얼마 후, 옷가지를 가지고 온 시녀가 피를 보고 깜짝 놀라 다가왔다.

“괜찮으세요? 어쩌다가 다치셨어요.”

“날카로운 곳에 베였나 봐요. 아파서 봤더니 이미 피가 나고 있어서…….”

메이벨이 눈물을 뚝뚝 흘리자 시녀가 얼른 손가락을 감싸 쥐었다.

“치료를 해야겠어요. 우선 이쪽으로.”

시녀가 가운을 입히며 어디론가 안내했다. 메이벨은 시녀가 하자는 대로 순순히 따라가며 힐긋 창을 살펴보았다.

새는 이미 자취를 감춘 후였다.

* * *

“흑마법이라고?”

대공이 뜻밖의 존재에 굳은 낯으로 되물었다.

하긴 이미 소탕되었다고 생각한 흑마법사 집단이 버젓이 돌아다닌다고 하니 놀랄 법도 했다. 내가 차분히 말을 이었다.

“네. 누군가 금기를 어기고 흑마법을 사용한 모양이에요. 그 탓에 오염이 시작되었고요.”

“흑마법이 오염과 관련 있다는 말은 처음 듣는데.”

대공이 의문을 제기하자 내가 말을 덧붙였다.

“나비들이 말하길, 흑마법사는 삿된 힘을 사용해서 자연의 자정 능력을 해친다고 했어요. 자연이 자정 능력을 잃게 되면 대륙 전체가 죽어 버릴지도 몰라요.”

삿된 힘은 자연을 죽인다. 그리고 죽은 땅에서 살아가는 인간은 모조리 시름시름 앓다 죽어 버린다.

오염이 짙을수록 접촉만 해도 그 오염이 퍼지게 되는데, 소설 속 로에나도 오염된 땅에 접촉한 시녀에게 옮아 죽은 것이었다.

그때 엘레나가 혼이 쏙 빠진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정말 흑마법사의 짓이라면 수상하구나. 이미 그들은 100년도 전에 몰살당했을 텐데.”

엘레나가 믿지 못하는 건 당연했다. 나 역시 정령의 말을 듣고도 긴가민가했던 부분이니까.

예전에 가정 교사와의 수업에서 흑마법사 숙청에 관한 부분을 배운 적이 있었다.

이미 역사서에는 그들이 사라졌다고 기록되어 있었으니까.

100여 년 전, 거리의 아이들이 하나둘 사라지는 것을 이상하게 여긴 재상이 흑마법사 집단을 눈치채 소탕한 적이 있었다.

누군가의 생명을 힘의 근원으로 삼는 집단인 흑마법사는 존재 자체가 악인 탓이었다.

그들은 삿된 힘을 사용하기 위해 피를 매개로 한다.

특히 어리고 순결한 피를 적실수록 힘이 증폭되어 암암리에 인신 공양을 하기도 했었다.

흑마법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라도 하는 미친 집단이 바로 그들이었다.

지금은 재발을 방지해 그들에 관한 기록 자체가 모두 삭제되었다고 들었다.

“하지만 나비들은 흑마법사의 짓이라고 말했어요.”

나는 여전히 떨고 있는 정령들을 측은하게 바라보았다. 많이 놀랐는지 내 몸에 찰싹 붙어서 떨어지지 않으려 했다.

엘레나가 작게 한숨을 내쉬며 읊조렸다.

“아직 남아 있던 건가.”

“음지로 숨어들었다면 색출하는 게 쉽지 않겠군요. 우선 고아들이 사라지는 일이 없었는지 확인부터 해야겠습니다.”

대공이 당장 뒤를 쫓을 것처럼 행동하는데, 아키드가 내게 물었다.

“혹시 나비들이 흑마법사에 관한 단서 같은 건 안 말했습니까?”

“아.”

그러고 보니 정령들이라면 우리보다 흑마법사에 관해 더 잘 알 터였다.

나는 힘없이 내 몸에 들러붙어 있는 정령들을 조심스럽게 손 위로 올리며 다정히 물었다.

“혹시 그들이 어떤 금기를 어긴 건지 알 수 있어? 목적을 알아야 찾아내기 쉬울 거 같아서.”

― 그건 우리도 몰라. 흑마법을 시전한 당사자만 알 수 있어. 흑마법은 삿된 힘이라 우리 같은 존재는 곁에 흑마법사가 있어도 인식조차 못 해.

큰일이었다. 정령조차 흑마법사를 인식할 방법이 없다면 정말 맨땅에 헤딩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깨진 부분이 어디인지 알아내지 못하는 한 독에 물을 아무리 퍼부은들 물이 차지는 않을 테니까.

“그럼 흑마법사가 대놓고 거리를 활보해도 알아낼 방도가 없다는 거야?”

― 대신 그들도 우리를 인식할 수 없어. 원래 빛은 어둠과 만날 수 없는 것처럼 우리와 흑마법은 닿을 수 없는 힘이거든.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동시에 막막함이 들었다. 서로 인지하지 못하는 만큼 상대를 발견해 내는 것 자체가 어려운 일이었으니까.

물론 내가 정령사라는 걸 저쪽에 들킬 위험은 덜었다.

“그럼 누가 이런 짓을 벌였는지도 확인할 수 없다는 거야? 미리 알아낼 방법도 없고?”

― 아예 알아내기 어려운 건 아니야. 금기를 시전한 자에게는 표식이 생긴다고 들었거든…….

“표식?”

― 표식 몇 개는 본 적이 있어. 우리가 아는 표식이라면 어떤 금기를 어긴 건지 알 수 있을 테지만…….

― 하지만 알아내기 어려울 거야. 보통은 가장 내밀한 곳에 표식이 생기는 데다 흑마법으로도 표식을 감추는 게 가능하거든.

정령들이 한숨을 토해 내며 시무룩한 몸짓을 보였다. 아무런 정보도 주지 못해 답답한 모양이었다. 그들이 축 늘어진 채 중얼거렸다.

― 오염이 시작되었다면 흑마법이 성공했다는 뜻이야. 그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내지 못하면 오염이 번지는 걸 막기 힘들 거야.

― 오염이 생길 때마다 정화하는 건 끝없는 일이야. 시전자가 사라지지 않는 한 오염은 계속해서 생기거든.

내가 아무리 유일한 정령사에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다 한들 정화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원인도 모른 채 무턱대고 정화만 하다간 몸만 축내고 근본적인 해결은 하지 못할 것이다.

“그럼 너희가 아는 표식을 알려 줄래? 혹시라도 같은 금기를 어겼을 수도 있으니까.”

내가 종이를 내밀자 정령들이 부산스레 움직이며 무언가를 그렸다. 난해한 마법진들이었다.

딱 봐도 음습한 기운이 폴폴 풍기는 기괴한 문양이기도 했다.

나는 마법진 아래 이어지는 높은음자리표 음표에 얕은 탄성을 내뱉었다.

“어라?”

아키드도 나와 같은 생각을 했는지 시선이 마주쳤다. 내가 냉큼 음표를 가리키며 말했다.

“아키드 님, 이거.”

“네, 문양은 좀 다르지만 음표군요.”

분명 아키드가 제 과거에 대해 말할 때 음표 문신을 지닌 사제 이야기를 했었다.

제게 험한 일을 시켰던 사제에게 낮은음자리표가 그려져 있었노라고.

물론 정령들이 그린 표식에는 높은음자리표가 그려져 있었지만 같은 음표라는 점이 심히 걸렸다. 혹시 이 음표가 계급을 상징하는 게 아닌가, 하고.

그때였다.

“음표라고?”

음표라는 말에 대공이 마법진을 채 갔다. 샅샅이 살피는 대공의 눈빛에 예리함이 깃들었다. 엘레나가 넌지시 물었다.

“뭔가 짐작 가는 바라도 있어요?”

“비슷한 문신을 한 자를 본 적이 있습니다. 어쩌면 이번 습격이 단순한 우연이 아닐 수도 있겠군요.”

“네? 그럼 지난 습격의 배후가 흑마법사들이란 뜻인가요?”

“확실하진 않습니다. 그들에겐 낮은음자리표가 그려져 있었으니까요.”

아키드는 낮은음자리표라는 말에 사색이 되었다. 대공에게 구해졌을 당시 음표에 관해 말하지 않은 게 걸리는 모양이었다.

혹여라도 자신이 말하지 않아서 일이 틀어진 건가, 우려하는 듯도 했다.

내가 아키드의 손을 꼭 붙잡아 용기를 북돋으니 그가 입을 열었다.

“아버지, 실은…….”

그러자 대공이 그의 머리를 가볍게 헝클였다.

“알고 있다.”

“알고 계시다고요?”

“그래. 물론 이미 증인은 다 죽어 버렸지만.”

대공의 눈빛이 서늘해졌다. 이상하게도 나는 저 눈빛을 알 것만 같았다.

기묘한 기시감에 눈을 찌푸리던 찰나, 이상한 기억이 흘러들어 왔다.

[데미안이 색색, 가쁜 숨을 내쉬는 로에나를 차갑게 내려다보았다. 돌출된 턱에서 그의 분노가 여실히 드러났다.

지독한 열병에 허덕이는 로에나는 저 분노가 누구를 향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저 이 기나긴 고통이 어서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는 생각뿐.

언제부터 아팠던가.

나는 왜 침대에 누워 있는 건가.

왜 이렇게 몸이 아픈 거지?

물어볼 수 없는 말들이 마른 입 새로 허물어지듯 삼켜졌다. 입을 열고 싶어도 그럴 힘조차 남아 있지 않은 탓이었다.

그때 내내 침묵하던 대공이 등을 돌리며 기사단장에게 말했다.

“찾아내.”

“…….”

“누가 이따위 짓을 했는지 당장 찾아내라.”

“존명.”

그렇게 데미안은 방을 나가 버렸다. 로에나는 슬픔에 허덕이며 까무룩 잠이 들었다. 다시는 깨지 못할 것만 같은 깊고 깊은 잠에.]

“헉!”

나는 심장에서 찌릿한 통증을 느끼며 휘청였다. 모르는 기억이다. 무슨 기억인지도 알 수 없다.

한데 몸은 아는 것처럼 태연하게 맥락 없는 기억의 편린을 받아들였다. 소름 끼치는 기시감이 온몸의 솜털을 바짝 세우게 했다.

다이아나와 코비슈타인을 마주쳤을 때 느꼈던 것과 비슷하지만 조금 달랐다.

그때는 기억을 해내는 순간 전체 맥락이 이해되었던 반면, 지금은 대체 무슨 내용인지 알 수 없는 탓이었다.

‘로에나가 아팠던 적이 또 있었던가?’

이상한 일이었다. 내가 알지 못하는 1년 동안 로에나가 크게 아팠던 적이 없다고 들었는데.

데미안이 나왔으니 분명 시집온 이후의 기억일 텐데…….

‘그럼 지금 이 기억은 뭐지?’

이건 분명 로에나의 기억이었다. 대공의 서늘한 눈빛을 보자마자 떠올린 로에나의 몸이 기억하는 과거.

한데 왜 이전과 다르게 내 머리가 받아들이지 못하는 걸까. 대체 무엇이 달라서?

수없는 질문이 머릿속을 헤집자 머리가 두 쪽으로 깨질 듯이 아파 왔다. 아키드가 휘청이는 나를 부축하고 물었다.

“로에나? 괜찮아요? 안색이……!”

하지만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두통을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혼절한 탓이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