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공가 시집살이 너무 쉬운데요 (75)화 (75/177)

#75.

대공은 엘레나에게 등짝을 얻어맞은 후에야 장난질을 멈추었다.

만나자마자 장난을 걸 정신이 있는 걸 보니 다친 데는 다 나은 모양이었다.

“또 한 번 그딴 장난을 치면 그땐 내 손으로 당신 어깨를 부러뜨릴 줄 알아요.”

“걱정한 적 없다기에 시험해 봤을 뿐입니다.”

“다른 사람이 비틀거렸어도 똑같이 했을 거예요.”

“그렇습니까?”

전혀 믿지 않는 기색을 띠며 싱글벙글한 대공은 내가 봐도 얄미웠다.

오염된 스티그 섬에 오래 있다가 그새 머리가 어떻게 된 건지 텐션이 평소보다 높았다.

또다시 엘레나와 데미안의 우당탕탕 말씨름이 이어지는데 정령이 말했다.

― 대공한테서 이상한 냄새 나.

“아버님, 정령이 아버님한테 냄새난대요.”

“응? 아아.”

대공은 그제야 품속에서 두루마리를 꺼내 테이블에 펼쳐 놓았다. 유리병 안에는 흙이 담겨 있었다.

아마도 내가 전에 부탁했던 스티그 섬의 흙인 모양이었다.

“이건…….”

“스티그 섬에서 추출한 흙이다. 오염이 가장 약한 곳부터 심각했던 곳 순으로 넣어 두었다.”

생각보다 세밀하게 소분해서 가져왔구나. 번호까지 매겨서 정리까지 해 올 줄은 몰랐기에 조금 놀랐다.

뺀질거리는 줄만 알았는데 의외로 철두철미한 면이 있었네.

하긴 내 다이어리를 보며 감탄했던 그라면 정리벽이 있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내가 끝 번호를 가리키며 물었다.

“번호가 클수록 진원지와 가깝다는 거죠?”

“그래. 특히 이건 진원지라고 볼 수 있을 만큼 오염이 심하게 된 곳이었다. 색을 보면 바로 알겠지.”

대공이 짚어 준 흙은 확실히 오염된 게 느껴질 만큼 짙은 흑색이었다. 꼭 기름을 뒤집어쓴 흙처럼 새까매서 꺼림칙하기까지 했다.

실체화하지 않은 정령이 유리병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에셀 성이라서 일부러 정체를 드러내지 않고 진행한 것이었다.

― 죽은 땅에서 나는 냄새가 나.

― 이미 틀렸구나, 이 땅은.

유리병을 열지도 않았는데 냄새가 나는 모양이었다. 이미 대공에게 편지로 언질을 받은 터라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땅이 죽었다더니 사실인가 보네요.”

“그래. 손쓸 틈도 없이 오염이 퍼져서 막기도 급급했거든.”

“그런데 오염은 어떻게 멈추신 거예요? 지금의 사제들로는 역부족이라고 하셨었잖아요.”

내가 유리병의 뚜껑을 열어 정령에게 내어 주며 묻자 대공이 대답했다.

“운이 좋았어. 마침 대단한 신성력을 지닌 자가 스티그 섬에 있었거든.”

“대단한 신성력이요?”

“성녀의 출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지.”

‘성녀라고?’

나는 익숙한 단어에 주춤했다. 그 단어는 원작에서 메이벨을 칭하던 것이기 때문이었다.

메이벨의 신성력은 성녀 못지않은 힘을 지니고 있었으니까.

물론 별의 루이스의 후예라서 빛 속성 마법을 잘 다루는 거였지만, 그것까지 밝혀지는 데는 오랜 시간이 흘렀었다.

메이벨조차도 제 신분을 정확히 모르고 살아온 탓이었다.

‘설마 메이벨일까?’

앞서 아실에게 메이벨이 이스터스에 없다는 소식을 듣고 나서인지 말도 안 되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그녀의 행방이 쭉 궁금하던 차라 성녀라는 말에 자연히 그녀를 떠올린 모양이었다.

혹시나 싶어 누구냐고 물어보려는 찰나였다.

― 말도 안 돼!

정령의 새된 음성이 내 입을 막았다. 어느새 유리병을 밀어뜨린 정령들이 파르르 떨며 내게 달라붙었다.

그 여파로 유리병이 산산조각이 나자 대공과 대공비, 아키드가 동시에 나를 감쌌다.

“로에나!”

그중 제일 빠르게 나를 감싼 아키드가 나를 뒤로 물렸다. 오염된 흙에 노출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내가 정령사라는 걸 알면서도 나부터 지키려는 모습이 듬직해 감동이었다.

“나비들의 짓인가?”

대공이 정령을 ‘나비들’이라 칭하며 살벌하게 되물었다. 이미 바깥에서 정령을 언급할 때 ‘나비’라고 칭하기로 약속한 상태였다.

대공은 저 흙을 가져오느라 조심 또 조심했던 입장이니 화가 날 법도 했다. 엘레나가 내 손에 묻은 흙을 털어 내며 말했다.

“어디 아픈 데는 없니?”

“네. 없어요. 이미 나비들이 흙을 정화했는걸요.”

다행히 정령들이 놀란 와중에도 정화를 시도한 덕에 흙이 닿아도 아프지 않았다. 하긴 소중한 정령사를 다치게 할 그들이 아니었다.

그때 소란을 들은 한나가 문밖에서 물었다.

“무슨 일 있으세요?”

긴한 이야기를 하는 터라 집무실에는 우리 넷만 있었다. 아마도 안쪽에서 깨지는 소리가 들려 확인차 물은 것 같았다.

“아무 일 없다. 괜찮으니 세 걸음 더 물러나 있어.”

“네, 마님.”

엘레나의 차분한 대답에 멀어지는 발자국 소리가 세 번 들렸다. 이윽고 엘레나가 손수건으로 흙을 주워 담으려 하자 데미안이 저지했다.

“제가 하겠습니다.”

그러곤 능숙하게 흙을 치워 다시 한번 확인했다. 처음 봤을 때까지만 해도 죽은 듯했던 검은 흙이 비옥한 흙처럼 갈색을 띠고 있었다.

“확실히 정화됐군.”

눈앞에서 오염이 순식간에 정화되는 것을 보고 대공이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나는 대공을 살필 여력이 없었다. 정령들이 와들와들 떨며 내게 달라붙은 탓이었다.

“대체 왜 그래?”

― 또, 또, 재앙이 시작될 거야!

― 싫어, 더는 잠들기 싫어. 흐엉!

정령들이 횡설수설하며 알아듣지 못할 소리를 내뱉었다. 심상치 않은 반응에 정령들을 다독이며 물었다.

“차근히 말해 봐. 대체 오염의 원인이 뭔데 이렇게 호들갑이야.”

애초에 흙을 가져오도록 한 건 오염의 원인을 파악하기 위함이었다. 아마도 이들은 오염의 원인을 알아채 지레 겁을 먹은 것 같았다.

내 격려에 정령들이 눈물을 퐁퐁 흘리면서 말했다.

― 누군가 금기를 어겼어.

― 흑마법이야, 이건 흑마법에 의한 오염이라고!

“뭐?”

나는 흑마법이라는 말에 시간이 정지된 것처럼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

반쯤은 예상한 일이긴 했으나 짐작이 맞다고 확인받고 보니 허탈해진 탓이었다.

이제 보니 정령들의 반응이 이해가 되었다.

― 우리도 정확히 무슨 금기를 어긴 건지는 몰라. 그저 시간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밖에는.

― 너무 무서운 시간이었어. 세계가 멈추고 우리와 인간이 완전히 분리되어 떨어져 버렸으니까.

처음 흑마법에 대해 이야기할 때도 똑같이 몸을 파르르 떨며 공포에 질려 있었으니까.

‘대체 누가…….’

소설에선 등장조차 하지 않았던 존재들이 나타났다. 그것도 원작보다 훨씬 앞선 시간에 더욱 강한 오염과 함께.

만약 진짜 흑마법사의 짓이라면 이대로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되었다. 금기를 어긴 자가 누군지 찾아내어 조치를 취해야 했다.

“새아가? 정말 괜찮은 거니?”

엘레나가 내 뺨을 붙들며 조심스레 물었다. 데미안과 아키드 역시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대체 나비들이 무어라 했길래 그런 표정을 짓는 거지? 위협이라도 했나?”

대공의 말에 그제야 내 표정이 무섭게 일그러져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참담한 심정으로 고개를 도리질하며 입을 열었다.

“원인을 알아냈어요.”

“그게 정말이냐?”

대공이 화색이 돋은 얼굴로 얼른 말하라는 몸짓을 취했다. 오염의 원인만 안다면야 다음도 대비할 수 있는 탓이었다.

하지만 이어진 내 대답에 세 사람의 얼굴이 삽시간에 굳어 버렸다.

“흑마법이에요.”

* * *

“흠흠흠.”

맑은 콧노래 소리가 욕실 안을 가득 울렸다.

아까까지만 해도 대공에게 가지 말라고 울먹이던 메이벨은 언제 그랬냐는 양 콧노래에 맞춰 발장구를 치고 있었다.

시중들던 시녀가 자리를 떠난 후라 그녀는 거칠 게 없었다. 욕조 속 장미 꽃잎에서 은은한 향이 피어올라 심신을 안정시켰다.

메이벨이 물속에서 화사한 미소를 띠며 중얼거렸다.

“드디어 수도로 돌아왔어.”

마침 그 속에서 어떻게 빠져나오나 고민했는데 하델루스 대공을 만난 건 행운이었다.

어린아이의 몸으로 돌아다니다간 험한 꼴을 당하기 십상인 탓이었다.

제 예상과는 달리 아이의 몸이 되었으나 원하던 것을 얻었으니 나쁘지 않은 시작이었다.

게다가 설마 그들이 도움이 되는 날이 올 줄이야.

메이벨은 간 크게 대공의 마차를 습격한 괴한들을 떠올리며 히죽 웃었다.

본래는 그들을 기다렸으나 대공이라는 더 좋은 패를 만나 일찌감치 버린 패였다. 한데 끈질기게 따라붙으니 성가셨다.

물론 그들 덕에 따분한 북부가 아니라 곧장 수도로 올라올 수 있기는 했지만.

‘너를 노리는 자들이 있는 것 같구나.’

‘저, 저를요?’

‘혹시 이 표식을 본 적이 있느냐?’

메이벨은 대공이 내보였던 표식을 떠올리며 푸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그것은 흑마법사를 상징하는 문신이었다. 그것도 흑마법사의 말단들이나 지닌 낮은음자리표가.

‘모르겠어요. 처음 보는 문장이에요.’

‘그런가.’

모른 척 시치미를 떼자 대공은 더는 추궁하지 않았다. 오히려 심각한 표정을 짓는가 싶더니 저를 백작가의 영애로 둔갑시켰다.

안 그래도 한미한 출신 때문에 걱정이 많았는데 잘된 일이었다. 그를 만나려면 적어도 격에 맞는 가문이 필요할 테니까.

그것보단 자꾸 추적해 오는 흑마법사들을 떨궈 낼 필요가 있었다. 이대로 있다간 저까지 덤터기를 쓸지도 몰랐다.

나중에 때가 되면 어련히 찾아갈 텐데, 성질도 급한 자들이었다.

메이벨이 숨겨 둔 단검으로 제 손가락을 찔렀다. 그 순간 왼쪽 심장에서 커다란 문신이 피어올랐다.

휘몰아치는 소용돌이를 닮은 높은음자리표. 그 위에는 모래시계 형상과 같은 마법진이 덧대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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