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
대체 왜 이렇게 된 걸까?
나는 좌 캐서린, 우 아키드에게 양팔을 붙잡힌 채 마구간으로 연행됐다.
캐서린이 나를 놓아주지 않는 터라 하는 수 없이 아키드도 나를 따른 것이었다.
다행히 마구간에 도착하니 캐서린이 나를 놓아주어 자유의 몸이 될 수 있었다. 아키드가 내게 은밀히 말했다.
“부인, 내일이라도 당장 다른 곳을 찾아야겠습니다.”
하지만 그새 그 말을 들었는지 캐서린이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갈 거면 대공자 혼자 가. 로에나는 여기서 나랑 놀 거니까.”
귀신같이 뒤를 돌아 경고하는 캐서린을 아키드가 어이없게 쳐다보았다.
“소공작 못지않게 뻔뻔하군.”
“우리 오라버니는 그냥 뇌가 없어. 나랑 비교하지 마. 기분 나빠.”
캐서린이 뾰로통한 표정을 지으며 아키드를 흘겼다. 그러곤 내게 잠시만 기다리라며 마구간으로 들어갔다.
아키드는 나와 단둘이 되자 작게 속삭였다. 혹여라도 안에서 그녀가 듣고 또 딴지를 걸까 봐서 조심하는 듯했다.
“부인, 저와의 약속 기억하시죠?”
“아무리 그래도 에셀 영애의 정강이를 차는 건 좀…….”
“저도 그냥 해 본 소리입니다.”
내가 캐서린에게 들리지 않도록 귓속말하자 아키드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생각하기에도 말도 안 되는 상황이라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에셀 소공작이었다면야 냅다 정강이를 날려 주었겠지만 차마 악녀에게 그런 짓을 할 수는 없었다.
목숨이 두 개라면 모를까, 절대로.
“적당히 장단을 맞추다 도망칠까요?”
“지금이라도 도망칠 수 있어요.”
내 제안에 아키드가 사르륵 눈웃음 지으며 대답했다. 내가 가자고 하면 어디든 따라올 기세였다.
꼭 충성심 가득한 강아지를 보는 듯해 가슴이 찌르르, 울렸다.
그때 캐서린이 문틈으로 고개를 빼꼼 내밀어 손짓했다.
“이제 들어와도 돼.”
그 말에 내가 아키드의 손을 잡았다. 입 모양으로 일단 저쪽 장단에 맞추자고 은근히 속삭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아키드가 고개를 끄덕이며 나를 이끌고 비장하게 마구간 안으로 들어갔다. 건초와 흙냄새가 곳곳에서 풍겨 왔다.
캐서린이 안내한 공간에는 백마와 망아지들이 있었다. 그녀가 개중에 똘똘하게 생긴 망아지를 가리키며 말했다.
“얘는 도, 쟤는 레, 그리고 저기 얼룩이는 미야.”
툭 치면 도, 레, 미 하고 울 것 같은 이름이었다.
“이름이 참 리듬감 있고 좋네.”
“헤헤, 고마워!”
영혼 없는 칭찬에도 캐서린이 어여쁘게 웃었다. 나는 그 미소를 보자마자 움찔했다.
연한 살구색 머리카락처럼 볼을 발그레하게 물들인 게 제법 귀여운 탓이었다.
악녀라는 걸 몰랐다면 홀라당 넘어갔을 법한 미인이기도 했다.
정신 차리자.
나는 아키드의 얼굴을 보며 심호흡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내 얼굴은 새빨개졌다. 아키드의 얼굴만큼 내게 자극적인 게 없는 탓이었다.
“더워요?”
아키드가 내 볼을 매만지며 작게 물었다. 정작 더위를 타게 만든 상대가 저인 줄은 꿈에도 모르겠지.
“조금 답답한 것 같기도.”
내가 수줍게 말하자 아키드가 곁에 있던 시종에게 창을 열라고 지시했다. 덕분에 열린 창틈으로 바람이 솔솔 불어 기분이 좋아지던 찰나.
나는 창 아래로 빼꼼 튀어나온 살구색 머리카락을 보고 흠칫, 떨었다. 아직 저 이상한 더듬이를 발견한 사람은 없는 것 같았다.
‘설마…….’
내가 막 상대를 유추하기 직전, 익숙한 얼굴이 창을 통해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헉!”
놀란 내가 어버버거리며 손가락질하자 창밖의 에드워드가 덩달아 펄쩍 뛰며 팔을 파닥파닥 움직이다 뒤로 나자빠졌다.
콰앙―!
“윽!”
엄청난 소리와 신음이 한데 섞였다. 그 소리에 깜짝 놀란 캐서린이 창으로 시선을 옮겼다.
잠시 후, 캐서린의 얼굴이 환해지며 손을 흔들었다.
“제로오!”
제로?
나는 퍽 다정하게 남주의 애칭을 부르는 캐서린을 바라보았다.
원작에서 제로니스에게 늘 깍듯하게 전하라고 칭하던 캐서린과는 사뭇 다른 살가운 부름이었다.
그리고 아까 발견한 건 분명 에드워드였는데 제로니스라니?
내가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캐서린과 창을 번갈아 볼 무렵이었다.
스르륵 금색 머리카락이 창을 통해 드러났다. 제로니스가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어떻게 알았어?”
그리고 그 말이 신호라도 된 것처럼 캐서린이 화사하게 웃었다.
“바로 보이던데?”
“그렇군.”
제로니스가 딴청을 피우며 작게 중얼거렸다. 은근하게 올라간 입꼬리가 만족스러움을 드러내는 것 같았다.
게다가 캐서린까지 덩달아 볼을 붉히는 게 아닌가. 나는 둘 사이에 흐르는 기묘한 기류를 포착하고 두 눈을 홉떴다.
‘너희, 왜 독자 모르게 연애하세요?’
아니, 그것보다 상대는 악녀 캐서린이었다.
어릴 적부터 제로니스는 캐서린을 무척이나 어려워했다고 들었는데, 어째서 둘 사이가 푸딩처럼 말랑말랑한 건데.
전혀 생각지도 못한 핑크빛 기류에 정신이 혼미해졌다.
‘메이벨은 어쩌고 바람을 피우고 있는 거야!’
나는 제로니스의 다분한 바람기에 충격받았다. 그가 내 차애가 된 이유는 그 지고지순함 때문이었는데 어린 시절 캐서린과 썸을 타다니.
알고 보니 악녀가 전 여친이라도 되었단 말인가. 하지만 소설에선 둘 모두 그런 낌새조차 내보인 적이 없었다.
오히려 가문 대 가문으로 서로를 이용하는 데 익숙한 두 사람이었다.
제로니스가 캐서린을 함부로 하지 못했던 건 그녀가 공녀인 탓이 컸다.
메이벨을 옹호하지 않았던 그 에피소드도 실은 캐서린이 더는 패악을 부리지 못하게 하려고 일부러 넘어간 것이었다.
뒤에서는 에셀 공작가와의 접점을 느슨하게 하기 위해 준비하면서 말이다.
한데, 그래야만 하는 두 사람이 왜 꽁냥거리고 있는 거죠?
도통 알다가도 모를 모습에 어리바리하게 서 있자 아키드가 말했다.
“안 나가요?”
“네?”
“에셀 영애는 금세 우리를 버리고 나갔습니다.”
“어?”
어느새 마구간 안에는 나와 아키드뿐이었다. 캐서린이 그새 쪼르르 제로니스에게 간 모양이었다.
내가 엉거주춤 움직이니 아키드가 말했다.
“괜찮아요? 안색이 좋지 않아요.”
“네, 그냥 조금 피곤한가 봐요.”
내가 어색하게 웃자 아키드가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잠시 후 그가 내 손을 붙잡으며 말했다.
“안 되겠어요.”
“네?”
“지금이 기회인 것 같으니 도망갑시다.”
그 말과 함께 우리가 들어온 문 반대편에 있는 문으로 아키드가 나를 이끌었다. 캐서린이 한눈팔고 있을 때 딴 길로 새자는 뜻 같았다.
아까부터 내 안색이 나쁘기는 했는지 아키드의 얼굴이 사뭇 굳어 있었다. 괜히 걱정을 시킨 건 아닌가, 하고 고민하는데―
“어디 가?”
등 뒤로 익숙한 음성이 들렸다. 내가 삐걱거리며 뒤를 돌아보니 캐서린이 해맑게 웃으며 손짓했다.
“길을 잃었구나. 그쪽이 아니라 이쪽이야.”
우리가 도망갈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는 얼굴이었다.
* * *
저녁이 되자 대공이 에셀 성으로 돌아왔다. 나는 만반의 준비를 마치고 우다다다 대공에게 달려갔다.
“아버님!”
“컥.”
대공이 무방비한 상태로 내게 안겨 괴상한 신음을 터트렸다.
엉거주춤 물러난 걸 보니 옷에 달린 견장에 내가 다칠까 봐 몸을 낮춘 것 같았다.
대공이 나를 번쩍 안아 들며 말했다.
“키나가 누구한테 착지를 배웠나 했더니.”
“많이 힘드셨어요? 얼굴이 반쪽이에요!”
“타지에서 오래 머물렀으니 해쓱해질 만도 하지.”
대공이 미간을 찌푸리며 작게 중얼거렸다. 언뜻 ‘망할 황실’ 어쩌고 했지만 못 들은 척 웃음으로 때웠다.
“그래도 여전히 멋지세요!”
“그래?”
대공은 언제 미간을 찌푸렸냐는 듯이 느른히 웃었다. 뒤이어 엘레나가 대공에게 말했다.
“다리를 부러뜨릴 수고는 덜었군요.”
“살벌한 안부 고맙습니다, 대공비.”
“어깨도 성치 않으면서 아이는 잘만 안으시는군요.”
“워낙 누굴 많이 안아 봐서.”
“저급하긴.”
엘레나가 눈살을 찌푸리며 질색했다. 나는 대공의 바람둥이 같은 발언에 가자미눈을 떴다.
저 입은 열기만 하면 엘레나를 화나게 하는 탓이었다.
가만 보면 딱히 엘레나를 싫어하는 것 같진 않던데 늘 뾰족한 말만 내뱉는 게 이상했다.
엘레나는 상대하고 싶지 않은지 화제를 돌렸다.
“폐하께 전해 들었습니다. 습격이 있었다고요.”
‘습격?’
내가 놀라 대공을 쳐다보니 그가 내 머리를 헝클이며 말했다.
“별거 아니니 걱정하지 말고.”
“별거 아니긴요. 그런 사람이 곧장 수도로 올라가던가요?”
“이런, 제 걱정을 꽤나 하신 모양이군요. 기뻐서 어쩌나.”
“걱정은 무슨! 내가 당신 걱정을 왜……!”
엘레나가 눈을 홉뜨며 부정하자 대공이 피식 웃었다.
그나저나 대체 어느 간 큰 놈이 대공을 습격했단 말인가?
북부가 아니라 수도로 곧장 올라온 것도 습격과 관련이 있는 건가 싶어 멀거니 쳐다보는데 대공이 나를 내려놓았다. 그러곤 어깨를 부여잡고 신음을 터트렸다.
“윽.”
“아버님?”
“데미안!”
내가 놀랄 새도 없이 엘레나가 대공에게 내달려 그의 어깨를 붙들었다.
바로 옆에 있던 나보다도 빠른 몸짓이었다. 그녀가 다급하게 의원을 부르라 소리 지르려던 찰나.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데미안의 어깨가 얕게 흔들리는가 싶더니 달콤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아, 다친 어깨는 이쪽인데 깜박했군.”
그러곤 반대쪽 어깨를 짚으며 도로 애달프게 신음을 터트렸다. 일순 정적이 흘렀다.
꾀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