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공가 시집살이 너무 쉬운데요 (73)화 (73/177)

#73.

“공작님과 함께 황성에 가셨으니 저녁에나 오실 듯합니다.”

“그렇군.”

“언제쯤 오실지 연락을 넣어 둘까요?”

시녀장의 물음에 엘레나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됐네. 그것보단 쉬고 싶군.”

그러곤 용건이 끝난 사람처럼 피곤하다며 방으로 들어가려 했다. 하긴 오는 내내 멀미를 했으니 쉬고 싶은 모양이었다.

“이따 보자꾸나.”

엘레나는 그 말만 남겨 둔 채 방으로 들어갔다. 뒤이어 아키드와 나도 각자의 방에서 여독을 풀기로 했다.

한나가 짐을 정리하는 사이 나는 방 안을 둘러보았다.

에셀 성의 구조는 하델루스 성과 달리 부부간의 각방을 위한 구조 자체가 없는 것 같았다.

생각해 보면 하델루스 성의 구조가 특이한 거지 대개는 이렇게 생겼을 터였다.

악녀의 소굴인 것에 반해 평범하기 그지없었다. 게다가 아까 캐서린의 모습은 정말 의외였다.

‘안녕.’

상대가 알아듣기 쉽게 입 모양을 크게 벌리는 모습은 영락없이 순수한 아이의 모습이었다.

원작대로라면 그녀는 누군가와 눈이 마주치면 웃는 게 아니라 눈 깔라고 경고했을 텐데.

하지만 아까 마주친 그녀는 원작에서 본 캐서린과는 전혀 딴판이었다.

아니, 어쩌면 아직 본색을 드러내지 않아서일지도 몰랐다.

소설에서도 캐서린이 온갖 권모술수로 메이벨을 악녀로 몰려고 했었으니까.

자신이 한 일을 메이벨이 한 것처럼 꾸미는 건 캐서린에게는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나는 소설에서 간담이 서늘했던 부분을 떠올렸다. 캐서린이 메이벨의 팔을 부러뜨리고 사과한답시고 벌인 일이었다.

{캐서린이 팔을 부여잡고 신음을 터트렸다. 메이벨의 손에 들린 유리 조각에선 캐서린의 피로 추정되는 붉은 액체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방금까지 캐서린의 팔에 박혀 있던 유리를 메이벨이 손수 뽑아낸 흔적이었다.

캐서린이 고통에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자 메이벨이 안쓰럽게 쳐다보았다.

“괜찮으세요, 영애? 아프셔도 지혈을 하려면 유리를 뽑아야 해서요.”

메이벨이 치료를 위해 의료 상자를 열 무렵이었다. 캐서린이 제로니스가 들어오는 것을 발견하곤 흠칫, 떨며 뒤로 물러났다.

“이, 이러지 마세요, 메이벨.”

“에셀 영애?”

“사과를 하러 왔을 뿐인데, 똑같이 갚아 주겠다니요. 저는 빈혈이 있어서 이렇게 피를 흘리면…….”

캐서린이 파리해진 낯으로 휘청였다. 이에 제로니스가 캐서린을 부축했다.

“전하…….”

“무슨 일이지?”

제로니스의 물음에 캐서린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저는 그저 사과를 하러 왔을 뿐인데…….”

그러곤 메이벨을 원망스러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이에 제로니스의 시선이 메이벨의 손에 들린 유리 조각으로 향했다.

“메이벨, 이럴 것까지는 없었잖아.”

“제로, 나는…….”

메이벨이 억울한 빛을 띠던 그때, 캐서린이 명멸하는 듯한 눈동자로 제로니스에게 기대었다.

“화내지 말아요. 그저 제가 메이벨을 화나게 해서 벌어진 일이에요.”

“화나게 했다고 사람을 죽이려 해?”

제로니스를 따라 들어온 에드워드가 이를 으드득으드득, 갈며 항변했다.

메이벨은 에드워드가 내뿜는 살기에 흠칫, 몸을 떨었다.

메이벨은 뒤늦게 알아챘다. 이 모든 게 함정이라는 걸. 자신이 또다시 그녀의 수에 걸려들었다는 걸. 메이벨이 뒷걸음질하며 말했다.

“제가 그런 게 아니에요.”

“이번엔 네가 심했어.”

제로니스가 짙은 한숨을 내쉬며 캐서린을 부축했다. 메이벨은 멀어지는 제로니스를 씁쓸하게 바라보았다.

유리 조각을 서둘러 뽑으려다 베인 상처보다 제로니스가 저를 믿어 주지 않는 것이 더욱 고통스러웠다.

“수도에 오지 말걸 그랬어.”

메이벨은 그 자리에 주저앉아 엉엉 울음을 터트렸다.}

캐서린은 여타 조무래기 악역과는 다르게 지략을 사용할 줄 알았다.

어릴 때부터 능숙하게 자신의 어두운 속내를 감추고 선한 행세를 해 가족들도 껌벅 속였으니까.

또한 황후가 되기 위해 제로니스 앞에서는 온갖 내숭을 일삼았다.

이변이 없다면 에셀 공작가의 여식인 캐서린과 황태자인 제로니스의 결합이 이루어졌을 텐데, 하필 메이벨이 등장해 버린 것이었다.

제로니스의 마음 한 터럭도 얻지 못한 캐서린은 메이벨의 등장에 초조해졌다.

제로니스가 그녀에게 은연중에 마음을 쓰는 걸 눈치챈 탓이었다.

해서 악녀로 둔갑시켜 그녀를 제로니스에게서 떨어뜨리려 했다. 물론 아키드의 도움으로 메이벨이 누명을 벗게 되었지만.

“그래. 저 선한 얼굴에 속으면 안 돼.”

내가 막 악녀에게서 현혹되지 말자고 되뇔 무렵이었다.

“속다니? 누구한테?”

“누구긴. 악녀…… 으갹!”

나는 갑자기 들린 목소리에 무심코 대답하다 말고 소스라치게 놀라 뒤로 나자빠졌다. 눈 깜짝할 사이에 캐서린이 옆에 와 있는 탓이었다.

캐서린은 놀라게 한 게 미안했는지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엇, 미안해. 놀랐어? 뭔가 골똘히 생각하고 있는 거 같아서 가만히 있던 건데.”

“캐, 캐, 캐서린?”

“어라, 내 이름 알아?”

캐서린이 해맑게 웃으며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 손을 물끄러미 쳐다만 보았다.

선뜻 잡지 못한 건 그녀가 일으켜 주는 척하면서 도로 놓는 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든 탓이었다.

하지만 내 예상과 달리 캐서린은 아무렇지 않게 내 손을 잡아 일으켜 주었다. 의심한 게 머쓱해지는 순간이었다.

“다친 곳은 없어?”

상냥한 물음에 내가 고개를 끄덕이니 캐서린이 해사하게 웃었다.

“다행이다. 꽝 소리가 나서 놀랐어.”

“괜찮아, 요.”

내가 힐끔 한나를 쳐다보니 그녀가 어색하게 웃었다. 아마 캐서린이 온 지 꽤 된 모양이었다.

그때 캐서린이 총기 어린 눈동자로 질문했다.

“근데 내 이름은 어떻게 알았어?”

“에셀 공작님이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절로 공손한 말투가 튀어나왔다. 괜히 잘못 건드렸다가 뼈도 못 추릴까 봐 지레 겁먹은 태도였다.

내가 로에나에 빙의했다 한들 진짜 악녀와는 차원이 달랐으니까. 로에나가 그냥 악녀라면 캐서린은 본투비 악녀였다.

내가 와들와들 떨며 조심스럽게 대꾸하자 캐서린이 두 눈을 끔벅이는가 싶더니 박장대소했다.

“아하하. 뭐야, 말투 너무 귀여워.”

“귀, 귀엽다니……요.”

“말 편하게 해도 돼. 나만 말을 놓으면 이상하잖아.”

“그, 래.”

그럼에도 내가 계속해서 로봇처럼 삐거덕거리자 캐서린이 또다시 와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뭐가 그렇게 우스운 걸까? 지나가는 낙엽에도 재밌다며 웃어 줄 것 같은 무해한 반응이었다.

이건 내 경계심을 무너뜨리기 위한 웃음 작전일까? 의도를 파악하고 싶어도 당최 파악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이름은?”

“로에나 하델루스.”

“만나서 반가워, 로에나. 아버지에게 이야기 많이 들었어.”

“에셀 공작님께서 내 얘길 하셨다고?”

“응! 우리가 분명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거라고 하시던데.”

“…….”

“그리고 널 보는 순간 느꼈어. 우린 친구가 될 운명이라고.”

그딴 운명 집어치워!

나는 캐서린이 내게 관심을 갖는 것이 몹시 껄끄러웠다. 악녀의 아버님을 만났을 때부터 느껴졌던 기묘하고 불길한 기운이었다.

악녀의 아버지시여, 왜 그런 쓸데없는 말을 하셔서 제게 이런 시련을 주시나이까.

나는 이곳엔 없는 에셀 공작을 떠올리며 이를 잘근잘근 씹었다.

소설에서와 달리 캐서린은 해맑아도 너무 해맑았다. 이게 연기가 맞는지도 의심스러울 정도로 자연스러운 소녀미가 폴폴 풍겼다.

그때 캐서린이 내 손을 잡고 물었다.

“로에나, 지금 한가해?”

“응?”

“한가하구나! 잘됐다. 내가 말 구경을 시켜 줄게.”

“아니, 난…….”

아직 대답을 안 했는데…….

하지만 캐서린은 내 대답을 들을 생각이 없던 모양이었다. 그녀가 내 손을 붕붕 흔들며 말했다.

“마침 우리 루가 새끼를 낳았거든. 망아지들이 너무 귀여워. 우리 루의 새끼들을 본 친구는 네가 처음이야!”

그러곤 당장에라도 나를 마구간으로 데려갈 기세였다. 승마를 배우고 있다더니 기어이 나까지 말에 태울 속셈인 듯했다.

친구라니. 내가 악녀의 친구라니. 그게 말이 되나요?

설마 나를 낙마 사고로 위장해 다리 하나를 부러뜨리려는 속셈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끄나풀로 이용해 먹을 심산일까?

내가 복잡한 머릿속을 한 채 마지못해 질질 끌려가던 차였다. 아키드의 방문이 열리는가 싶더니 그가 나를 발견했다.

“로에나?”

“아키드 님!”

나는 그가 구세주라도 되는 양 아키드에게 조르르 달려갔다. 그러자 아키드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저분은…….”

“안녕! 나는 캐서린 에셀이야.”

캐서린이 해맑은 미소와 함께 아키드에게 손을 흔들었다. 아키드가 그제야 캐서린의 정체를 알아채곤 인사했다.

“아키드 하델루스입니다.”

다소 딱딱한 말씨에도 캐서린은 굴하지 않고 그 역시 마구간에 초대했다.

“너도 말 편히 해. 로에나와 나는 그러기로 했어.”

반강제였지요.

내가 한숨을 내쉬자 아키드가 고개를 저었다.

“싫습니다.”

“으응?”

“에셀 공작가와는 친해지고 싶지 않습니다.”

아키드의 당돌한 선언에 캐서린이 두 눈을 둥그렇게 떴다.

나는 갑작스러운 아키드의 선전포고에 입을 헤벌렸다. 에드워드가 어지간히도 싫었던 모양이다.

그때 캐서린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왜?”

“딱히 이유랄 것은 없습니다. 그것보다 그 손 좀 치우…….”

아키드가 막 내게 손을 뻗은 무렵이었다. 캐서린이 턱에 호두가 생기도록 입을 앙다무는가 싶더니 호기로운 얼굴로 더럭 내 양팔을 채 가며 말했다.

“그렇다면 하는 수 없지. 대공자는 여기 있어. 로에나는 나랑 루네 놀러 가기로 했으니까.”

순식간에 캐서린의 품에 안착하게 된 내 눈동자에 지진이 일었다. 뒤이어 아키드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에셀 공작가는 뭐든 이렇게 자기 멋대로입니까?”

총체적 난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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