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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가 시집살이 너무 쉬운데요 (72)화 (72/177)
  • #72.

    하인트 제국의 수도, 인트라비아는 정기 회의를 위해 모인 귀족들의 마차로 붐볐다.

    정기 회의는 1년에 두 번, 각자의 영지에 내려가 있는 귀족들이 수도로 모여 황제에게 영지 상황을 보고하는 것이다.

    영주가 직접 보고하는 게 원칙이나 영지 내 상황에 따라 대리자가 출석하기도 하는 비교적 느슨한 귀족 모임이었다.

    나와 아키드, 엘레나가 탄 마차는 이어진 마차 행렬로 인해 시가지에서 지지부진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가장 밀리는 구간이라 속력이 나오질 않는 듯했다.

    마부의 말로는 이 구간만 지나면 뻥뻥 뚫릴 거라는데. 하필 정기 회의 기간이라 러시아워가 따로 없었다.

    엘레나는 멀미가 나는지 입가에 손수건을 댄 채 색색 잠들어 있었다.

    나는 처음 보는 수도의 모습을 마차 창을 통해 엿보았다. 북부의 서늘한 기후와 달리 이곳 인트라비아는 따뜻했다.

    나무 그늘 아래로 가면 선선한 바람 덕에 더위조차 모를 날씨였다.

    바깥에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입고 있는 옷도 제법 가벼웠다. 고대의 건축물과 현대의 건축물이 조화를 이룬 풍경도 예술이었다.

    꼭 유럽 어딘가로 여행 온 기분이 들었다. 내가 다소 들뜬 음성으로 말했다.

    “여기 있는 마차가 다 제국 방방곡곡에서 몰려든 귀족들인 거죠? 처음 보는 가문의 문장이 엄청 많네요.”

    “규모가 제법 있는 정기 모임이다 보니 먼 곳에서도 오는 이들이 많을 겁니다.”

    아키드가 착실히 대답하며 나를 따라 창밖을 응시했다. 우수에 찬 눈동자에는 다소 쓸쓸하고 그리운 감정이 깃든 듯했다.

    ‘그러고 보니 대공 성에 오기 전에는 수도 외벽에서 살았다고 했지.’

    나는 아키드에게 들었던 과거를 떠올리며 그가 왜 저런 표정을 짓는지 금세 이해했다.

    어떻게 보면 아키드의 고향은 북부가 아닌 이곳 인트라비아였다.

    치열한 어린 시절을 보냈을 그를 생각하니 가슴이 뻐근해졌다.

    이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수도를 방문하게 된 자신의 상황에 기분이 싱숭생숭할 터였다.

    게다가―

    ‘친구가 저 대신 사제에게 끌려간 후 실종됐었어요. 어쩌면 그때 저 대신 죽은 게 아닐까 싶고요.’

    친한 친구가 실종된 곳이기도 하니 기분이 가라앉는 건 당연할 터.

    어쩌면 수도에 대한 마지막 기억이 좋지 않아 오고 싶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있다 보면 실종된 친구가 생각나고, 또 거리에서 겪었던 온갖 수모와 서러움이 생각날 테니까.

    나는 아키드가 이번 여행을 통해 수도에 대한 부정적인 기억을 조금이나마 씻기를 바랐다.

    그의 아픈 시절이 모여 있는 이곳에 행복한 기억이 덧입혀지기를 원했다.

    “그러고 보니 아키드 님은 수도 지리에 밝겠네요.”

    “다니던 곳만 알아요. 귀족들이 다니는 길을 이용해 본 건 이번이 처음이라 저도 여긴 잘 모릅니다.”

    아키드가 창밖의 포장도로를 가리키며 말했다. 보통 이 도로는 귀족들의 마차가 이동하는 곳이었다.

    아키드와 같은 거리의 아이는 지나갈 수도 없는 곳. 나는 그의 표정이 우울해지기 전에 냉큼 말했다.

    “그럼 숨은 명소를 아주 잘 아시겠어요. 귀족들도 모르는 곳들요.”

    “몇 군데 알고 있기는 하지만, 로에나가 보기엔 별로일 수도 있어요. 대부분 서민이 다니는 곳이라 그리 청결하지도 않고…….”

    아키드가 말꼬리를 늘이며 망설이는 기색을 띠었다. 태생부터 귀족인 내가 그런 곳을 좋아하지 않을 거라 여기는 것 같았다.

    하지만 전생에 소시민으로 살았던 나로서는 오히려 친근한 것들뿐이었다. 나는 배시시 웃으며 반색했다.

    “저 그런 거 신경 안 써요. 오히려 아키드 님이 북부에 오기 전에 어디서 머물고 놀았는지 궁금한데요?”

    “딱히 좋은 장소들은 아닌데…….”

    “그때 13지구 쪽에서 지냈다고 하셨죠?”

    내가 집요하게 묻자 아키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곳은 치안이 좋지 않아 권하진 않아요. 거기 말고 7지구 쪽이 나을 겁니다.”

    아키드가 야무지게 수도에 관해 설명을 이었다.

    인트라비아는 귀족들이 머무는 1~6지구와 평민들이 머무는 7~13지구로 나뉜다.

    황성이 1지구에 위치해 가장 치안이 철저한 반면, 13지구는 빈민촌이라 치안이 나빴다. 7지구는 그중 귀족과 평민이 섞일 수 있는 중립 지구이기도 했다.

    “1~6지구는 어머니께 구경시켜 달라고 하는 게 좋을 겁니다. 저는 가 본 적도 없어서.”

    “그곳은 나중에도 충분히 갈 수 있을 텐데요. 그것보다 저는 아키드 님이 살던 곳이 궁금해요.”

    내가 눈을 초롱초롱하게 뜨며 연신 구경시켜 달라 노래를 부르자 아키드가 못 이기는 척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방실방실 웃으며 냉큼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약속해 달라는 의미였다. 아키드가 손가락을 걸어오자 나는 거듭 강조했다.

    “북부로 돌아가기 전에 꼭 수도 구경시켜 주셔야 해요. 이왕이면 단둘이요.”

    작게 읊조린 사심 가득한 뒷말에 아키드가 피식 웃었다. 그가 상체를 기울여 작게 속삭였다.

    “호위까지는 따돌리지 않겠다고 약속하시면요.”

    “멀찍이서 쫓아오게 하면 되지 않을까요? 그리고 흰둥이만 한 호위도 없을걸요?”

    나는 엘레나의 무릎에서 잠이 든 흰둥이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대지 속성 신수인 만큼 방어력이 끝내주는 탓이었다.

    호위 기사가 원거리를 맡는다면 흰둥이는 근거리를 맡아 호위하면 되었다. 나는 상체를 더더욱 기울여 그에게 귓속말했다.

    “저는 둘이 놀고 싶어서 그래요.”

    ‘전 사실 둘이 오고 싶었어요.’

    아키드가 이전에 내게 했던 말을 그대로 돌려주자 그가 두 눈을 둥그렇게 떴다. 결국 날 이길 수 없다 여겼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로에나가 원하는 대로 해요.”

    한결 밝아진 그의 미소에 나는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대화를 하고 나니 정체 구간을 지난 마차가 술술 달려 에셀 성 초입에 다다랐다.

    잠시 후 성 정문에서 신원을 확인하고 입장한 우리는 초원과도 같은 정원을 가로질러 본성 입구에 도착했다.

    그제야 잠에서 깬 엘레나가 부스스한 머리를 정돈하고 말했다.

    “신세 지는 일주일 동안 말썽 피우면 안 된다.”

    별장의 공사가 일주일 후에 끝나서 하는 말이었다. 그 이후에는 별장에서 머물 예정이었다.

    “네! 어머님.”

    내가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자 엘레나가 마차 문고리를 탁탁, 두드려 열어도 됨을 알렸다.

    이윽고 마부가 마차 문을 열었다. 에셀 공작가의 사용인들이 2열로 서서 우리를 맞았다. 그중 시녀장으로 추정되는 여인이 인사했다.

    “먼 길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머무실 방은 정리해 두었습니다, 대공비 전하.”

    “오랜만이구나.”

    엘레나는 시녀장과 안면이 있는지 가볍게 안부를 물었다. 내가 아키드의 손을 붙잡아 막 내렸을 무렵이었다.

    정수리가 따가운 기분에 고개를 드니 3층 창문에서 누군가 다급히 숨는 게 보였다.

    그게 의아해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곧이어 살구색 머리카락이 슬금슬금 올라왔다.

    이어 내 또래로 보이는 여자아이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화들짝 놀라 도로 숨었다.

    나는 그녀를 단번에 알아보고 손으로 입을 가렸다. 저 인상착의는 캐서린 에셀이 분명했다.

    악녀가 나를 염탐하는 중이라는 생각에 절로 비지땀이 흘렀다.

    잠시 후, 또다시 살구색 머리통이 창문 위로 솟았다.

    이번에는 피하지 않고 나를 빤히 쳐다보는 게 아닌가.

    기묘한 눈싸움을 이어 가는 찰나, 캐서린이 얼굴을 붉히며 입을 크게 움직여 무어라 말했다.

    ‘안녕.’

    입 모양을 보건대 인사하는 것 같았다. 뒤이어 손까지 흔드는 걸 보니 환영한다는 의미 같기도 했다.

    악녀의 인사를 씹었다가는 괜한 고초를 겪을 것 같아 마지못해 손을 흔드니 캐서린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뒤이어 무어라 말했으나 길어서 알아듣기 어려웠다.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니 그녀가 손짓, 발짓을 하며 의사를 표현했다.

    하지만 도통 알아들을 수 없는 몸짓이라 멀거니 바라만 보았다. 그때였다. 엘레나가 나를 돌아보며 물었다.

    “하늘은 왜 보고 있니?”

    “아, 저기에 누가 있어서.”

    내가 창문을 가리키자 어느새 캐서린은 사라져 있었다. 엘레나에 이어 그쪽을 바라본 시녀장이 말했다.

    “캐서린 님과 인사를 하신 모양이네요. 지금은 수업 중이셨을 텐데…….”

    아아, 그럼 아까 그 몸짓은 이따 보자는 뜻이려나?

    그러고 보니 손목을 톡톡, 두드린 건 시간을 말한 듯하고, 양팔을 흔든 건 달려가겠다는 뜻인 모양이었다.

    대강 악녀의 의중을 파악한 나는 오싹한 기분에 팔을 쓸었다.

    예고도 없이 악녀와 마주친 것만으로도 소름이 돋을 판국인데 추후 방문 계획까지 듣게 돼서였다.

    우리는 시녀장의 안내에 따라 귀빈실로 이동했다. 시녀장이 상냥한 음성으로 말했다.

    “편하게 있으시라고 층 하나를 모두 비워 두었습니다. 시키실 일이 있으실 땐 종을 울려 주시면 층 관리 시종이 수발을 들어줄 겁니다.”

    “고맙군.”

    “방은 말씀하신 대로 네 분 모두 별도로 준비해 두었습니다.”

    “네?”

    어머님, 대체 무슨 짓을 하신 겁니까?

    나는 엘레나를 원망스럽게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그녀가 대공과 한방을 쓰고 싶지 않아 모두 각방을 달라 요구한 모양이었다.

    게다가 나와 아키드의 결혼 서약서에는 합방 조건이 따로 있다 보니 그것도 배려한 듯했다.

    층 하나를 비워 주었으니 방을 하나씩 쓰는 게 편한 건 사실이지만 솔직히 혼자 쓰기엔 너무 넓기도 했다.

    ‘이런 배려는 필요 없는데.’

    나는 주먹 울음을 터트리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아 내었다. 그때 엘레나가 시녀장에게 물었다.

    “그래서 대공은 언제 귀가하시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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